48
사냥
이선은 정유진에게 '사냥꾼'을 지목하게 했다.
정유진과 자경단이 분노에 찬 시선으로 3명의 살인자를 지목했다. 그들은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그러기엔 증인이 너무 많았다.
"중위, 러시아 제국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저 살인자들을 처벌하겠소."
"가, 각하! 각하께선 분명 전권위원이십니다만, 군인에 대한 사법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제게 맡겨주시면 군사재판에 넘기겠습니다."
소대장은 콧수염을 부르르 떨며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선은 넘어가지 않았다.
"예전에 마튜닌 위원이 왔을 때도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 넘어간 것 알고 있소. 두 번은 안 속지. 나는 연해주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킬 의무가 있소. 이번에도 그냥 넘어간다면, 주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그렇게 되면 중위도 책임을 모면하긴 어렵지 않겠소?"
"그, 그래도······."
"중위, 엄밀히 말하면 부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중위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처벌만 확실히 한다면 책임은 묻지 않겠소."
"으, 으음······."
"아니, 오히려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시정방침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훌륭한 변경 관리라고 폐하께 보고 드리지. 자, 어쩌시겠소?"
설득을 가장한 협박에, 소대장도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뜻대로 하십시오. 부디 상부에는 이번 일을 잘······."
"아아, 일부 정신 나간 병사들의 일탈 행위로 치부할 터이니, 중위에게 책임이 갈 일은 없을 겁니다."
이선은 3명의 살인자를 초소 앞 공터로 끌어냈다. 소대장이 무거운 얼굴로 소총수들과 함께 그 앞에 섰다.
"사, 살려주십시오!"
"수, 술에 취해서 저도 모르게 한 행동입니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다!"
"제, 제발 속죄할 기회를 주십시오!"
"술 먹으면 살인행위가 정당화되나?"
이선은 냉소적으로 답했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되어 오히려 국민을 해쳤으니 그 죄가 크다. 나 극동 전권위원 이선은, 황제 폐하를 대리하여, 살인자를 즉결처분한다. 중위, 집행하시오."
이선의 명이 떨어지자, 소대장이 소총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발사!"
타다당!
사형은 순식간에 집행되었다. 그 준엄함에 사람들은 기가 질렸다.
엄밀히 말하면 소대장의 말처럼 이선에게 군인에 대한 사법권은 없었으니 월권이었다. 하지만 결코 이번 일을 묵과할 순 없었다.
'이 문제로 누가 나한테 맞설 거야? 저 칠칠치 못한 중위? 만약 그렇게 되면, 역으로 박살 내주지.'
이선의 강렬한 시선에 소대장은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수고가 많소, 중위. 곧 마적 토벌을 위해 병력이 소집될 거요. 지원 병력을 보내드리지. 그때까지 국경을 잘 방어하도록 하시오."
"옛, 각하! 마적 따위가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엄중히 방어하겠습니다!"
소대장은 거수경례하며 이선을 배웅했다.
"자, 이제 차이를 봤소?"
이선의 말에 정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위원. 아니, 군 대감."
"여기선 그냥 위원이라고 합시다. 어차피 조선을 떠난 건 선생이나 나나 마찬가지니까. 아무튼, 이제 나를 도울 생각이 생겼소?"
"위원께서 다른 분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저희 힘도 쓰도록 하십시오."
정유진과 녹둔도의 자경단원들이 일제히 이선을 향해 충성을 맹세했다.
정유진은 이선에게 그동안의 일에 대해 보고했다. 그는 젊지만 유능한 이였다. 자경단을 조직하고, 얀코프스키와 협력해서 효율적으로 운용했다.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마적에 맞서 녹둔도 일대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지휘관으로 타고난 친구군. 여기서 썩기엔 좀 아까운데.'
"좋습니다. 내가 여기서 이 난리를 친 건, 겨우 살인자 몇 명 잡자고 한 게 아닙니다. 국경 연변에서 마적들의 씨를 말리고, 동포들의 이민과 개척을 돕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모두 새로 편성될 고려인 대대의 부대원으로 편입될 겁니다. 무기도 새로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아!"
자경단원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정 선생은 나와 함께 연추로 갑시다.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으면 좋을 듯해서."
이선은 정유진의 능력이 탐이 났다.
"알겠습니다. 근데 제가 가면 여기 사람들은······."
"여긴 걱정 말고 군 대감 모시고 가게. 자네가 없다고 해서 도망가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자경단원 중 연장자인 김 포수의 말에 정유진도 빙긋 웃었다.
"알겠소, 아바이. 그럼 다녀올게요."
녹둔도를 끝으로 고려인 마을을 모두 순회한 이선은, 정확한 인구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러시아령에 거주 중인 고려인은 30개 마을, 2600여 호, 2만여 명.
이는 임시체류자를 모두 포함한 수치로, 이선은 자신의 권한으로 그들에게도 합법적인 체류권을 주었다.
'이주자 특성상 청년 남성층이 많고. 계획했던 1천 명보다 더 많이 징집할 수 있겠군.'
'고려 대대' 편성은 착실하게 진행되어, 보병 3개 중대 600명이 순차적으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얀코프스키의 자경단을 기병 중대로 편성하고, 장기적으로 기병과 포병도 훈련시킬 예정이었다.
'보병 3개 중대, 기병 1개 중대, 포병 1개 중대로 구성된 완편 대대 확보를 목표로!'
이선은 극동으로 해상 운송한 무기를 고려 대대에 풀었다. 러시아 제국의 제식소총인 베르단(Berdan) 1천 정, 개틀링 건 10문, 3년 치 탄약.
이선은 각 중대마다 무기를 배치하게 했다. 1870년에 도입된 러시아군 제식소총인 베르단도 중요하지만, 개틀링 건은 무장 수준이 뒤떨어진 극동지역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당!
개틀링 건의 시연사격에, 기관총을 난생처음 보는 고려인들은 깜짝 놀랐다. 표적판은 그야말로 가루로 변해 있었다.
"맙소사, 저게 다 뭐야?"
"저거 맞으면 뼈도 못 추리겠군······."
이선은 훈련병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병사 여러분, 이게 바로 근대의 전쟁이다! 개틀링 건은 농민 출신이라 할지라도 사용법을 배우면 금방 숙달될 수 있다. 그러면 적이 아무리 기병이라 할지라도, 기관총 앞에서 한낱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오오······."
"병사 여러분의 손으로 마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다! 마적들을 쓸어버리면, 저 광활한 토지가 여러분의 것이 될 것이다!"
"와아아아!"
훈련병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 그리고 낡은 구체제도 쓸어버려야지.'
다음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의미심장한 미소로 대체했다.
이선은 고려 대대의 지휘관으로 선임된 드보프스키 소령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령. 강군으로 키워주십시오."
"제국의 국경을 지켜내는 데 손색이 없는 부대로 만들어내겠습니다."
고려인은 군대경험이 없어서, 장교진과 부사관은 부득이하게 일단 러시아인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초등교육을 이수한 고려인에게는 부사관을, 중등교육을 이수한 고려인에게는 사관학교 지원을 권유해 직업군인도 양성할 예정이었다.
'······ 하지만 학교 취학률과 졸업률이 너무 처참하군. 일단 학교부터 더 많이 보내야겠다.'
이선이 군대 못지않게 중점을 두는 게 교육이었다. 고려인들은 조선 출신답게 교육을 중시했으나, 아직은 대부분 전통적인 서당 교육에 의존했다.
"공맹의 도리도 좋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지식이 필요한 법. 앞으로 8세 이상의 모든 취학연령의 아동들은 초등학교를 보냅니다. 최소 4년제 초등학교는 이수할 수 있도록."
"뭐야, 전통을 저버리고 아라사 학교를 다니라고?"
"그건 그렇다 쳐도, 농번기에 애들을 학교에 보내면 그만큼 일손이 더 줄어드는 거 아냐?"
'조선식 서당'이 아니라 '서양식 학교'에 적잖은 고려인이 저항감을 느꼈다.
"서양식 교육을 배우면, 새로운 기회가 열립니다. 누구나 평등한 기회, 능력에 따른 결과! 오늘은 농사꾼이지만, 내일은 제국의 관리가 될 수 있다!"
이선은 당근을 제시했다. 조선 특유의 교육열과 출세 욕구를 자극시켰고, 야심 찬 청년들은 자극을 받았다.
"시대는 변하는데, 우리만 뒤떨어질 수 없다!"
이선은 고려인 청년 중에 성공의 표본인 김학우와 최재형을 마을들에 보내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게 했다.
러시아 당국 역시 고려인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걸 진작부터 추진해왔으므로, 이선의 조치에 환영했다. 이선은 열악한 변방의 교육 사정을 감안해, 연해주의 교육을 관리하는 연해주 교육청에 아낌없이 투자를 했다.
1881년 10월.
추수가 끝났다. 황무지를 개척한 논은 황금빛으로 무르익었고, 고려인은 '내 땅'에서 얻은 수확의 기쁨을 만끽했다.
하지만 추수가 끝나고 북방의 겨울이 다가오자, 국경 너머의 마적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붉은 수염의 오랑캐', 홍호자(紅鬍子)라 불리는 마적들은 연해주 최대의 골칫거리였다.
홍호자는 인구가 희박한 청-러시아 국경 일대에 산재해있었다.
이들이 암약하는 지역은 청나라 영토지만, 만주 동부 지역에 대한 행정권이 거의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마적들은 국경선을 제멋대로 넘나들며 마음껏 약탈과 살육을 저질렀다.
러시아 제국 국경수비대가 그때마다 이들을 격퇴하곤 했지만, 이들의 병력으로는 광활한 국경지대를 모두 관리할 수가 없었다.
마적들은 이주민으로 부를 갖춘 연해주의 고려인을 가장 만만한 상대로 여겼고, 잦은 약탈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노예로 납치되어 청나라로 팔려가곤 했다. 이들은 어디에 호소할 곳 없이 당해야만 했다.
이들의 보호자로, 이선이 나타났다.
"늘 그렇듯이 다 빼앗고, 불태우고, 잡아 와라!"
"끼얏호-!"
마적들은 연례행사처럼, 국경을 넘어 고려인 마을을 향해 쳐들어왔다. 늘 그렇듯이 러시아 국경수비대를 피해 연해주로 침투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사격술이 뛰어난 포수들을 단기훈련 마치고 편성한 고려대대 1중대, 얀코프스키와 정유진의 자경단으로 편성한 2중대가 있었다.
이선과 드보프스키 소령, 정유진과 얀코프스키는 마적의 침투가 예상되는 지점마다, 중요성에 따라 분대에서 소대씩 배치를 했다.
"홍호적이다!"
"침착해라! 훈련 받은 대로만 해라!"
"사거리까지 기다려라!"
두두두두두두-!
병사들은 거센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긴장감을 느끼면서도 소총의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침착하게 대형을 유지했다.
"······ 지금이다! 쏴라!"
타다다당!
보병의 일제 사격에 마적들이 픽픽 쓰러졌다.
하지만 마적들 또한 싸움이라면 이골이 나 있는 자들이었다.
"殺(죽여)!"
마적들은 기동력으로 보병을 압도하려는 듯, 속도를 멈추지 않고 돌격했다.
"기관총!"
요소마다 배치한 비장의 무기, 개틀링 건이 등장했다.
"발사!"
드르르륵······.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총알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당!
개틀링 건은 1분에 수백 발의 총알을 쏟아냈다.
"으아아아아악!"
살아남아 비명이나마 지를 수 있는 마적은 그나마 운이 좋은 것이었다. 선봉에 서서 포화를 정면에서 받은 마적들은 육신의 형태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재장전! 발사!"
개틀링 건의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는 마적들에게 있어 지옥의 소리나 다름없었다.
순식간에, 마적 1개 부대는 소멸해버렸다.
기관총이 멈추자, 전장에는 순간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
방어자들조차도, 인세에 강림한 지옥도의 모습에 얼어붙었다.
산산조각난 인간과 말의 사체가 뒤엉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참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적들을 그토록 증오하던 고려인들조차도, 처음 거둔 값진 승리에 기뻐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근대의 힘에 그들은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Ура! победа! (만세! 이겼다!)"
그나마 이런 광경에 익숙한 러시아 장교가 승리의 만세를 외쳤다. 그제서야 병사들도 따라 만세를 외쳤다.
"와아아아!"
"이겼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호로자식들, 드디어 원한을 갚는구나!"
병사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승리를 기뻐했다.
만주와 연해주를 내달리며 마치 맹수처럼 군림하던 마적들이, 그들의 사냥감으로 여기던 농부들에게 섬멸당한 것이다.
마적들은 예상치 못했던 저항에 당황하며 기동력의 우세를 통해 우회 루트를 찾으려 했지만, 방어자 역시 기병을 준비해둔 상황이었다.
예년과 같은 아무르 카자크 기병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병들도 있었다.
"전우들, 하던 대로만 합시다! 돌격!"
얀코프스키의 명령에 기병중대가 일제히 마적들을 향해 돌격했다.
타다다당!
기병중대는 기동력을 발휘해 총을 쏘았다. 특히 '네눈이'의 사격실력은 백발백중이었다.
"으으윽!"
기병중대는 카자크 못지않은 기동력을 보이며, 마적들은 국경 너머까지 쫓아냈다.
각지에서 승전보가 전해졌다.
예상보다 큰 전과에, 이선은 기쁘면서도 표정 관리를 했다.
근대의 압도적인 힘을 교육받은 마적들은, 고려인들을 더 이상 사냥감으로 여기지 않을 터였다.
아니, 이제는 그들이 사냥감이었다. 주제파악을 못하고 또 다시 날뛴다면 토벌을 면치 못할 터였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겨우 마적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것으로 희희낙락할 수 없었다.
이선의 목표는, 훨씬 더 크고 높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