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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점(轉換點)
1881년이 끝나고, 1882년 임오년 새해가 밝았다.
이때, 이선은 2만 고려인을 상대로 새로운 실험을 개시했다.
근대 국민국가의 두 가지 원칙.
국민개병과 국민교육.
추수가 끝나자 농번기에서 해방된 젊은 청년들은 본격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아 군대를 편성했다.
취학연령의 아동들은 새로이 학교에 가 새로운 근대교육을 받게 되었다.
지금은 2만 고려인을 대상으로 막 시작되었지만, 장차 조선과 2천만 조선인을 상대로 이뤄질 일이었다.
'연해주는 조선의 표본이 될 것이다.'
이제 막 시작에 불과했지만, 이선은 자신감이 넘쳤다.
'1882년은 조선에게 있어도, 내게 있어도 운명의 해지.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영조약, 조독조약, 그리고······.'
이선은 새해 달력을 넘겨가다, 7월 달력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임오군란. 국내 정치에 외세라는 변수가 등장하고, 끝내 망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지. 이것만은 막아야한다.'
이선은 해외에 나간 1880년 초부터, 가신들에게 3년 이내로 돌아오겠다고 선언했다. 그건 바로 1882년 7월에 있을 임오군란을 염두에 두고서였다.
'역으로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연해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내게 충성하는 가신들을 이끌고 조선으로 돌아간다.'
이선은 새로 편성한 고려인 대대 병력 외에도, 의용함대를 통해 기선 1척을 임대할 예정이었다.
이미 작년부터 원산과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에 항로가 열렸고, 일본 기선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원산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고 다녔다.
이선이 지금 당장이라도 개항장으로 지정된 원산으로 기선을 타고 들어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에는 실리 못지않게 명분이 필요한 법. 무작정 들어가는 것보다 일단 여기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자. 국적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조선인의 보호자라는 평과 민심을 얻을 수 있도록.'
1882년 봄이 되자, 이선이 기다리는 실리와 명분이 하나둘씩 연해주에 이르렀다.
"홍호적의 횡포에 더 이상은 간도에 살 수가 없습니다. 부디 저희를 아라사로 받아주십시오!"
청-러 국경 너머 들려오는 소식은 최악이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청나라의 봉금 지역, 소위 '간도(間島)'라고 부르는 지역.
사실상 청나라의 행정력은 전혀 미치지 않았고, 거의 마적들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거침없이 마을들을 약탈하고 정기적인 세금까지 걷어 갔다.
간도에 정착한 조선 농민들은 만주의 지주들과 마적들의 횡포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고려인들의 처지는 훨씬 나은 것이었다.
마적들은 고려인 부대의 방어로 연해주 침투에 실패하자, 간도의 조선 백성들을 더더욱 쥐어짰다.
행정력 부재 상태에서 신음하던 조선인들은,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제대로 된 보호를 받으면서 번영한다는 소문을 듣고 우수리 강을 넘어 러시아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공작,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만주에서 러시아로 넘어오는 이들이 족히 수천은 될 듯합니다."
"이대로 가면 저들은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는 유민 신세가 됩니다. 러시아가 아량을 베풀어서 받아들여야지요. 다행히도 개척해야할 땅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일단 고려인 마을에 각각 분산배치하고, 새로운 개척지를 물색해보지요."
면적은 넓지만 인구가 희박한 극동 러시아에서, 아직까지는 국경을 넘는 조선인의 수가 감당이 될 처지였다.
청-러시아 국경이 열림에 따라, 수천의 간도 조선인이 연해주로 넘어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쇄적으로 두만강 일대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함경도 육진 지역에서도 소문은 파다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라사에 간 사람들은 모두 땅을 받고 지주가 돼서 한몫 잡았다더라."
"아 정말이야. 아라사에 가기만 하면 일단 살 땅과 집을 준다니까."
"아라사 황제는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귀족들의 거칠고 무서운 전횡으로부터 백성을 구원하는 강력한 백제(白帝)라더라."
"아라사 고관 중에 조선 출신이있어서, 아라사 황제를 설득해 조선인을 위한 정책을 펼친다더라."
가뜩이나 새로운 땅에서 대한 열망이 강한 국경 지대에서 유혹적인 소문이 퍼지자, 당국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두만강을 넘어가는 이들이 속출했다.
이쯤 되자, 청나라의 길림장군(吉林將軍, 길림의 책임자)이나 조선의 함경도 관찰사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와 직접적인 수교관계가 없는 조선의 함경도 관찰사는 길림장군에게 대신 항의를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따라 길림장군이 연해주로 사신을 보냈다.
"대청국과 조선국은 공동으로 러시아 정부에 요청합니다.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어선 조선인들을 모두 환국시키고, 재발방지를······."
협상 수석대표 자격으로 자리에 앉은 이선은, 사신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청나라의 공식적인 입장은, 간도라고 부르는 지역에 조선인이 거주할 수 없다는 거 아닙니까? 조선의 공식적인 입장 역시 마찬가지지요."
"그, 그렇습니다."
청나라는 만주를 자신들의 본향으로 여겼다. 만주에 '봉금령'을 내려 한인(漢人)들의 이주를 철저히 금했는데, 봉금령의 빈틈을 타 18세기부터 조선인이 '간도'라 불리는 지역에 이주를 시작했다.
청나라는 러시아와 국경 분쟁이 시작되자, 러시아의 압력에 대비해 1880년 이른바 '경진개척'령을 내려 봉금령을 해제했다.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청나라는 간도에 조선인이 다수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처리를 놓고 고민 중이었다. 이들은 조선 조정에 추방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그래서 간도에 사는 조선인들이 알아서 러시아령으로 이주하겠다는데, 대체 뭐가 문젭니까?"
"어, 음, 하지만 대청국은 조선의 상국으로서, 조선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 이곳저곳을 떠도는 걸 용인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청국은 러시아의 상국이 아니지요? 러시아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 않습니까?"
협상 차석대표로 나온 마튜닌이 불쾌감을 표시하자, 청나라 사신은 당혹감을 느끼는 듯 했다.
중앙 정부의 관리조차 서양 열강에 겁을 먹고 제대로 된 협상을 못하는데, 이런 한미한 지방관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저는 길림장군의 명을 받고 왔을 뿐입니다. 국경 문제를 잘 해결하라는 길림장군의 명이 계셨습니다."
"그럼 오신 김에 그 국경 문제에 대해 논의하지요. 대체 길림 당국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수많은 마적들이 러시아 국경을 빈번히 넘고 있습니다. 엄연히 러시아 국민인 사람들을 약탈하고, 괴롭히고, 심지어 죽이거나 청나라로 끌고 가 노예로 팔고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이걸 언제까지 묵인해줘야 합니까?"
이선의 강경한 발언에 청 사신은 더욱 당혹감을 느끼는 듯했다. 마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건 엄연히 길림 당국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납치된 조선인들이 길림으로 팔려 들어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청 조정에서 만주 지역의 실태 파악에 착수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행정이 미비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귀국에서는 양해를······."
"길림 당국이 실태 파악하는 동안, 조선인들은 계속 괴롭힘을 당할 것입니다. 러시아 정부는 귀국에 마적 토벌을 즉시 시행하라고, 정식으로 요구합니다."
"그, 그건 불가능합니다. 일단 만주에 있는 병력을 소집하고, 토벌을 추진하려면 1년은 필요합니다."
"이미 러시아군은 마적들을 토벌해왔습니다. 길림 당국에서 그럴 의사가 없다면, 우리가 하던 대로 계속 러시아에 넘어온 마적들을 토벌해도 상관없겠지요?"
완전히 협상의 주도권을 상실해버린 사신은, 엉겁결에 답했다.
"그건 귀국의 자유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러시아-청-조선 삼국의 관계 개선에 크게 방해가 되는 국경 마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에 인구 송환 논의는 재개하도록 하죠."
이선이 은근슬쩍 러시아군을 이끌고 국경을 넘을 뜻을 밝혔는데도, 이선에게 완전히 기세가 꺾인 청 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실상 길림 당국의 묵인을 얻게 되자, 이선은 겨울 내내 훈련에 매진했던 고려대대를 국경 너머까지 출동시킬 준비를 했다.
"앉아서 저들의 약탈을 기다리다 수동적으로 철퇴하는 게 아니라, 다시는 날뛰지 못하도록 저들의 본거지를 박살냅시다. 얀코프스키의 정찰에 따르면, 의외로 본거지는 허술하다는군요."
"청국 국경을 넘어간다는 건 분쟁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요?"
마튜닌이 난색을 표했다.
"그러니 아직 정식 러시아군 소속이 아닌, 비정규군인 고려대대만 보내겠다는 겁니다. 지난 회담에서 봤다시피, 청나라는 국경 상황조차 제대로 파악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깨달았을 즈음에는 이미 마적들의 해악이 사라졌겠지요."
"이건 우리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닌듯하니, 먼저 페테르부르크에 보고를······."
"아니, 어느 세월에 말입니까. 황제 폐하께서 나와 위원에게 '전권'이란 호칭을 붙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럴 때에 대비하란 것 아니겠습니까?"
마튜닌은 '남우수리 전권위원'이고, 이선은 '극동 전권위원'이니 관등은 같아도 이선이 권한은 더 컸다.
"러시아 제국이 크림 반도를 얻을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그때도 크림 타타르가 러시아 제국의 신민들을 노예로 잡아 오스만 제국으로 팔아넘긴 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예카테리나 대제께서 크림 타타르와 오스만을 격파하여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크림 반도를 획득한 것 아닙니까. 지금 이 상황도 비슷합니다. 러시아가 새로 얻은 영토와 주민을 안정시켜야지요."
청나라를 오스만 제국에, 마적들을 18세기 크림 타타르의 노예상인에, 고려인을 노예로 잡혀갔던 슬라브인들로 비유한 이선의 설명에 러시아 관료들도 바로 이해를 했다.
"맞습니다. 더욱이 길림 당국의 묵인을 받았는데, 안 될 게 무엇입니까? 나는 토벌에 찬성합니다. 대대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대대장 드보프스키 소령은 이선의 뜻에 동의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신속히 침투하여 적을 격퇴하도록 하지요."
이선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선이 국경 너머의 마적 토벌에 집착하는 건, 고려인들의 원수를 갚고 국경의 치안을 안정시킬 목적이 가장 컸지만,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1882년 봄, 800여명의 고려대대 병사들은 우수리 강을 넘어 수풀로 뒤덮인 국경지대에 진입했다.
마적들이 멋대로 국경을 넘어온 것처럼, 국경이 설치된 지 불과 20년 밖에 되지 않은 간도-연해주 지역은 월경을 해도 티조차 나지 않았다.
"마적의 본부를 신속히 타격하고, 잡혀간 양민들을 구출한다!"
"오오오!"
고려대대 병사들은 지난 겨울을 훈련으로 충실하게 보냈고, 강렬한 전의로 불타고 있었다.
고려대대는 중대별로 진격하며 인근에서 가장 큰 마적의 본거지 근처에 진입했다.
타앙!
정찰대를 이끄는 백발백중의 저격수, 얀코프스키가 적의 초소를 제압했다.
"돌격!"
드보프스키 소령이 군도를 뽑아들자,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했다.
"와아아아!"
"홍호적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자!"
"동포들을 구하자!"
마적들에 대한 누적된 분노로 가득 찬 고려대대 병사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양놈들이다! 아라사 놈들이다!"
"뭐라고? 아라사 놈들이 여기까지 어떻게?"
마적들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하며 허둥지둥했다.
"잠깐, 군복은 아라사 군이 맞는데, 외모가 조선놈들이오!"
"뭐, 조선?"
그들의 경악이 채 끝날 틈도 없이, 고려대대가 본거지로 밀려들어왔다.
마적의 본거지는 변방 마을을 점거해서 개조한 것이었고, 변변한 방어 시설도 없었다. 여태껏 토벌대가 당도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기습은 충격적이었다.
"기관총 발사!"
타다다다당!
"중대, 착검! 돌겨어어어억!"
"와아아아!"
기병대의 돌격에 이은 한바탕 개틀링 건의 총탄이 쏟아진 후, 고려대대 병사들이 일제히 착검돌격을 감행했다.
"자비를 베풀지 마라! 마적 포로는 필요 없다!"
마적들에게 오랜 원한이 누적된 고려인들이었으므로, 러시아군 장교들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이 개자식들, 네놈들 손에 10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원수다!"
"내 누이는 5년 전에 납치돼서 아직도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 개새끼들아!"
"내 자식들도 잡혀갔었지. 그 어린 것들이 어딘가에서 고생할 걸 생각하면······."
"죽여라! 살려두지 마!"
고려인들은 그동안 자기들이 당해왔던 만큼 무자비하게 마적들을 살육하고, 즉시 창고를 뒤졌다.
납치되어 끌려왔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총성에 벌벌 떨며 숨어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오?"
"조, 조선 사람입니다!"
"무사해서 다행이오! 우리도 조선인이오!"
"여러분을 구하러 왔소! 이제 해방이오!"
"참말요?"
"와아!"
대개 젊은 여성이나 어린 아이들인 납치 피해자들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과 눈물이 흘러나왔다.
고려대대는 각지의 마적 본거지를 파괴하여, 마적들을 소탕하고, 납치 피해자들을 구출했다.
고려대대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이뤄낸 성과에 더 없이 뿌듯해했다.
지금까지 그들은 언제나 관(官)과 외세, 도적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려왔다. 어디에 가서 호소할 곳조차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들 자신의 힘으로 외부의 악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작은 출발이었으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