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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의 대상
"군 대감! 조선에서 보낸 첩자가 고려대대의 병사들에게 잡혔습니다."
안영흠이 이선의 블라디보스토크 집무실로 들어와 급히 보고를 했다.
"상세히 말해보시오."
"연해주 일대에서 거동이 수상한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특히 '전권위원'에 대해 캐묻고 다니더랍니다. 정유진과 중대원들이 수상하게 여겨 일단 잡아서 억류해두었습니다."
정유진과 옛 녹둔도 자경단원들은 이선에게 이미 충성을 맹세한 터라, 이들은 은밀히 이선에 대해 조사하는 조선의 첩자들을 잡아버렸다.
"아마 그들은 조선 조정에서 보낸 밀사일 겁니다."
김학우는 짐작이 간다는 듯이 말했다.
"이미 재작년에 조선에서 밀사를 파견해 연해주를 정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도운 적이 있지요. 밀사가 말하길, 몇 년 내로 중앙의 조정에서 직접 밀사를 보낼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선도 짚이는 바가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 보낸 이들이라면 억류하면 안 될 노릇. 내가 직접 만나봐야겠소. 정중히 모셔오라고 하시오."
1882년 초여름. 조선은 이미 서양 각국과 수교를 결정했고, 미국·영국·독일과 수교 협상에 들어갔다.
이뿐만 아니라, 인접국가인 러시아에 대한 정보도 파악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이미 1878년과 1880년에도 밀사를 보내 조사를 했지만, 이번에는 지방관 차원이 아니라 임금이 직접 사람을 뽑아 파견한 것이었다.
정탐을 위해 파견된 이들은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이었다.
오위장은 정3품의 무관으로, 궁궐 숙위의 역할을 맡았기에 임금과 가까운 자리라 할 수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두만강부터 아무르강까지, 극동 러시아의 정세를 정탐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1882년 경에 연해주 일대를 탐방하여,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라는 군사지도를 제작해 조정에 바친다.
조선도 나름대로 진지하게 서양과 주변 국가들의 정세에 대처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역사대로라면, 이들은 고려인들의 협력으로 무사히 연해주를 정탐하고 있어야 했다.
"놔라! 이놈들, 대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거냐?"
김광훈과 신선욱은 고층의 서양 건물에 들어가자 위압감을 느꼈지만, 일부러 더 목청을 높였다.
"이런, 내가 정중하게 모셔오라고 했는데.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궁궐 숙위인 오위장을 지낸 이들은 바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완화군 대감!"
"그동안 아라사에 계셨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뵙게 되니 더 놀랍습니다. 존귀하신 몸으로 어찌 성조를 저버리고 서양 오랑캐의 나라로 가셨단 말입니까?"
"군 대감께 이 무슨 무례란 말인가!"
옆에 있던 안영흠과 장무영이 발끈하여 소리쳤지만, 이선이 그들을 제지했다.
"허허, 성격이 급하시군요. 먼저 소개부터 해주시지요."
"저는 오위장을 지낸 김광훈입니다."
"저 역시 오위장을 지낸 신선욱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왕의 장자에게 예의를 갖추어 답하긴 했다.
"성상께서 보내셨습니까? 나를 잡으라고 온 건 아닐 거고, 아라사에 온 목적이 있을 터인데? 아마 아라사 정세에 대해 정탐하라는 것이었겠지요?"
밀사는 솔직히 인정했다.
"맞습니다. 하나, 아라사가 조선을 침략할 마음이 있는지, 우호를 맺고 수교할 생각이 있는지. 둘, 아라사 땅에 사는 조선 백성들이 어찌 살고 있는지. 셋, 아라사 군대의 허실은 어떠한지 알아보라 명하셨습니다."
"겸사겸사 완화군의 행보도 확인할 겸?"
"······ 그렇습니다."
"그럼 바로 나를 찾아오셨야지요. 내가 설명해드리리다."
이선은 밀사, 아니 이들을 보낸 임금이 궁금한 점에 대해서 가감 없이 설명해주었다.
김광훈과 신선욱은 놀랐다. 이들도 제법 세상 돌아가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선은 차원이 다를 정도로 세계의 정세에 대해 정통했다.
이선이 허심탄회하게 모든 걸 다 이야기하고, 무엇보다 러시아 황제를 구하고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는데 더 놀랐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군 대감께 여쭙고 싶습니다. 대감께서는 조선과 아라사 중에 어디에 충성하고자 하십니까?"
이선은 정색하며 답했다.
"나는 성상의 장자이자 성조의 신하입니다.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밀사들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상께서 저희에게 은밀히 명하셨습니다. 만약 완화군을 아라사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동안의 일은 묻지 않을 터이니 어서 조선으로 돌아오라고."
이선이 빙긋 웃으면서 돌아갔다.
"안 그래도 곧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조선이 서양과 조약을 맺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 도움이 필요하겠지요. 미국, 영국, 덕국 3국과 조약을 맺는 건 청국 북양대신이 주관하는 것으로 압니다."
"예, 저희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조정에선 김윤식과 김홍집이 실무를 맡고 있습니다."
"아라사 또한 전권사절을 보낼 예정입니다. 하지만 아라사는 다른 서양 국가들과 달리, 청국을 사이에 끼고 협상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조선과 아라사를 잇는 가교가 되어주어야겠군요."
순간, 이선은 미소를 거두었다.
"이번엔 내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하문하시옵소서."
"경들이 직접 연해주의 우리 동포들을 보아하니, 어떠합니까? 조선의 백성들과 다르지 않던가요?"
밀사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감을 뵙기 전에 먼저 이곳에 사는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분명 그들은 두만강 너머 조선 백성들보다 훨씬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입을 모아 '전권위원'의 덕을 찬양하더군요."
"그럼 그들을 억지로 조선으로 데려가야겠습니까?"
"분명 그들은 조선을 저버리고 타국으로 간 범월죄인이지만, 어찌 그게 백성들의 탓이겠습니까? 그동안 나라에서 제대로 정치를 못한 탓이지요."
"정치를 못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럼 왜 그런 문제가 발생한 걸까요?"
"모든 백성을 굽어 살피려는 성상의 밝은 뜻을 관리들이 받들지 못해서입니다."
원론적인 말에, 이선이 강한 어조로 힘을 주어 말했다.
"맞습니다! 성상께서는 밝고 어지신데, 간악한 자들이 성상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습니다. 마땅히 이들을 처단하지 아니한다면, 어찌 국가의 정치가 바로 서겠습니까?"
"그, 그 말씀은······."
"경들은 오위장을 지냈으니 잘 알 겁니다. 작금의 조선이 나라는 고사하고, 도성, 아니 궁궐조차 제대로 지켜낼 힘이 있습니까?"
"······."
"전통적인 오위영을 개편해 새로운 군대를 편성한 건 좋습니다. 하지만 기존에 있는 병사들은 1년 가까이 급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이게 나라입니까? 무기를 가진 자들을 함부로 홀대하면 안 됩니다. 전조(前朝, 고려)에서 무신들을 함부로 대하다 어떤 꼴을 당했습니까?"
밀사들은 할 말을 잃었다. 오위장을 지낸 이들은, 옛 오위영 병사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이들의 급료를 빼돌려 사복을 채우고 있었다. 병사들의 분노가 폭발하면, 그 방향이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몰랐다.
"일본뿐 아니라, 서양 열강들이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저들이 군대를 이끌고 침범하면 어찌하렵니까? 그런데 작금의 조선은 궁궐조차 방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
경들 또한 조선의 신하로서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대감의 말씀은 구구절절 옳습니다."
"조정의 녹을 먹은 자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김광훈과 신선욱은 너나 할 것 없이 한숨을 토해냈다. 러시아에 오자 조선과의 격차는 더욱 확연하게 보였다. 하지만 조선은 이선의 말처럼 궁궐을 방위할 능력조차 부족했다.
"조선에 곧 변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야 합니다."
"벼, 변란이라니요?"
"반란이나 외적의 침입이 우려된다는 말이지요. 나는 조선의 앞날이 걱정되어 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내가 곧 성상께 충성하는 백성들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려고 하니, 경들도 나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십시다."
"군 대감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과연 군 대감께서는 총명함이 남다르다 하더니, 나라와 임금을 생각하는 마음도 남다르십니다!"
완화군이 직접 '임금에게 충성하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돌아간다니, 밀사들도 기쁨을 표시했다.
'조선 조정에 나에 대한 보고를 하는 건 막아야지. 그리고······.'
궁궐 숙위를 책임지는 오위장을 지낸 이들은, 궁궐 방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었다. 이선은 이들의 협조와 충성을 원했다.
밀사들은 연해주에 머무르는 동안 후대를 받으며, 고려인의 발전상을 시찰하였다. 이들은 거듭 감탄하며, 이선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이 싹 텄다.
모든 게 이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진 않았다. 마적 토벌과 간도 유민을 받아들인 이후, 연해주에 이주한 고려인은 3만을 넘어섰다. 고려인들은 새로운 토지를 하사받아 변경의 황무지를 개척해나갔다.
이를 지지한 러시아 관료들도 있지만, 반대파들은 이선을 향해 불만을 쏟아냈다.
"대체 이선 공작은 황제 폐하의 전권위원이 맞습니까? 러시아의 이익이 아니라 조선의 이익만을 위해 일합니다."
"청나라 국경을 넘어 교전을 벌였으니, 외교적으로 두고두고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러다 연해주가 모두 고려인으로 채워질지도 모릅니다."
"조선의 왕자라더니 그 출신이 어디 가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러시아가 아니라 조선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더 이상 이선 공작에게 전권위원 직을 맡기면 안 됩니다. 사퇴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비난들에 대해서, 이선은 아주 흔쾌하게 응답을 했다.
"제 책임을 통감합니다. 전권위원 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고, 공작······?"
연해주 군정장관 바라노프는 깜짝 놀랐다. 단지 이런 여론이 있음을 경고하고 이선의 독단을 진정시키려 했는데, 순순히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저는 제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러시아와 조선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했습니다. 제가 물러나는 게 러시아와 황제 폐하께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공작이 맡던 일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마튜닌 위원을 승진시켜서 제 후임을 맡기고자 합니다."
"이미 후임자까지······.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바라노프는 이선의 사직을 수리했다.
'어차피 난 조선으로 돌아갈 예정이니, 전권위원 직에 집착할 이유가 없지.'
물론 이선은 아무 생각 없이 전권위원 직에서 물러난 게 아니었다. 그는 이미 안전장치를 만들어놓고 물러난 것이었다.
"이봐, 소문에 따르면 그분은 왕자라던데. 주상 전하의 아들이래."
"어쩐지. 생김새부터 귀티가 남다르더니."
"그런 귀하신 분이 여기까지 무슨 이유로?"
"중전이 죽이려 해서 어쩔 수 없이 몸을 피하셨다네."
"저런, 그거 딱하구만."
"높으신 분도 어쩔 수 없군. 우리처럼 조선에서는 살 수 없으니 아라사로 온 거구만."
"그런데도 우리 동포들을 위해 그토록 힘을 써주다니, 역시 귀하신 분은 달라."
"근데 군 대감이 조선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던데."
"그래서 말인데, 군 대감을 잘 따르면 조선에 돌아가 한 자리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더 이상 자신이 왕자라는 걸 감추지 않는 이선은 소문이 퍼지는 걸 내버려두었다.
이선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가신들, 안영흠, 장무영, 최재형, 김학우, 정유진을 소집했다.
"이제 때가 됐소.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오."
"오오!"
"마침내······."
조선에서부터 따라온 안영흠과 장무영은 감개무량한 듯 탄성을 내질렀다.
"그런데 군 대감, 이렇게 돌아가시면 위험한 것 아닙니까? 중궁전과 민씨들은 대감을 경계할 터인데······."
"멋대로 국경을 넘어 외국과 외교를 한 죄인이라고 공격할 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전에 또 암살을 시도할지도 모르지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저 장무영이 목숨을 걸고 군 대감을 모실 겁니다."
이선은 빙긋 웃었다.
"이런, 내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조선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는 거요?"
"물론 운현궁이 돕기야 하겠지만, 윤협 공에게 듣기로 지금 운현궁의 처지도 좋지 못하다고······."
"내가 그동안 청국과 아라사를 돌아다닌 이유가 뭐라 생각하시오?"
이선은 결코 대원군에게 의존할 생각이 없었다.
"고려대대 1중대와 군함을 이끌고 인천으로 들어갈 것이오."
"호오, 그거 묘안이로군요."
"그렇다면 감히 공격하려는 뜻은 품지 못하겠군요."
"고려대대는 명을 받으면 대감을 호위할 것입니다."
최재형과 김학우, 정유진은 환영의 뜻을 밝혔지만, 안영흠과 장무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감, 러시아 소속인 부대와 군함을 이끌고 돌아가면, 러시아와 결탁했다는 비난받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조정과 사대부들의 비난을 받게 될 것이고, 이는 운현궁에서도 옹호하지 못할 겁니다."
"그 무슨 말이오? 그들이 언제 러시아군 소속으로 조선으로 들어간다고 했소?"
"네? 그럼 아니란 말입니까?"
"그들은 러시아가 아니라, 이선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선의 군대로 갈 것이오."
이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