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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歸國)
1882년 7월 19일, 임오년 6월 5일.
카레야 호는 원산을 떠나 한반도 해안을 항해하여, 무사히 인천 앞바다에 도착했다.
'인천이라. 이제는 정말 한양의 문턱까지 왔군.'
이선은 감회가 새로웠다.
쫓기듯 망명자로 떠난 지 어언 2년 4개월. 마침내 힘을 축적하여 돌아온 것이다.
조선에서 해야 할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조선에는 아직 근대적 항만이 없어 접안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선은 자신의 가신들과 소수의 호위 병력, 베베르와 러시아 외교관들만 하선하여 제물포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월미도 인근의 해상에서 대기하게 했다.
"병사들이 대거 상륙하면 혼란이 발생할 것입니다. 일단 배에 대기하고 하고, 외교 인원만 상륙하도록 하죠."
미국과 영국도 수교 조약의 전권공사가 해군 제독들이라 군함과 수병을 이끌고 왔는데, 이들 역시 해상에서 대기했다.
이선은 상륙하기 전에 앞서 양복에서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랜만에 입는 한복과 갓이었다.
"우리가 양복 차림으로 내리면 다 일본인인줄 알 터이니, 모두 한복으로 갈아입읍시다."
이선의 가신들은 군말 없이 모두 옷을 갈아입었다. 상투가 없다곤 하지만, 크게 위화감은 없었다.
이선 일행과 베베르가 보트로 제물포에 상륙하니, 제물포 첨사가 그들을 맞이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일본?"
소수의 백인과 다수의 동양인이 보이니, 첨사는 지레 일본인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러시아. 아라사요."
"아라사라고요? 그럼 뒤에 계신 분들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첨사는 이선 일행의 존재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선이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통역이오. 아라사에는 이주한 조선 백성이 많이살고 있지요."
베베르는 러시아 외무부에서 발행한 신임장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제국은 조선국과 수교통상을 원합니다. 귀국 조정에 보고해주십시오."
이미 미국, 영국, 독일 3국과 조약을 체결한 걸 지켜본 제물포 첨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환영의 뜻을 밝혔다.
"알겠습니다. 조정의 명이 떨어질 때까지, 잠시 제물포에서 기다려주십시오."
"그러지요."
제물포에는 외국 사절들을 위한 관사가 있었다. 각국 사절들은 조선식 가옥에 불편함을 느끼고 배 위에서 생활하다가 협의 시에만 상륙했는데, 이선 일행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제물포에는 이미 천진 주재 프랑스 영사 딜롱(Dilon)이 와서 대기 중이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조선과의 수교를 명받고 온 것이었다.
딜롱과 천진 시절부터 안면이 있는 베베르는 논의를 위해 만나러 가고, 이선은 측근들과 회의를 가졌다.
"일단 성상과 조정에 아뢰도록 해야겠소. 김 공, 신 공."
이선은 먼저 김광훈과 신선욱을 불렀다.
"경들은 성상께 돌아가 복명(復命)하십시오. 아라사가 조선과의 수교통상조약을 원한다고."
"알겠습니다. 그럼 군 대감에 대해서는 뭐라 고해야 할지······?"
"죄인 이선은 군부(君父)의 명을 어기고 멋대로 외국에 나갔으니, 신자(臣子)된 이로서 죄를 청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천에서 엎드려 죄를 청하오니, 지엄한 왕명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무슨 말씀을······!"
가신들이 놀라자, 이선이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죄를 진 신하로서 도리를 다하려는 것이니, 그대들은 개의치 마시오."
김광훈과 신선욱이 감동하여 외쳤다.
"군 대감의 성상과 나라에 대한 충심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군 대감의 행적과 충심에 대해 충실히 아뢰겠습니다."
"부탁합니다."
김광훈과 신선욱을 한양으로 보낸 후, 이선은 안영흠과 장무영을 운현궁으로 보냈다.
"그대들은 속히 운현궁으로 가서 할아버님께 내 밀서를 전하시오."
"알겠습니다. 하온데 군 대감께서 오위장에게 그리 말씀하신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정말 잡으려고 들면 어쩌시려고······."
이선은 빙긋 웃었다.
"명분이지, 명분. 오위장의 보고를 통해 내 말은 역사에 남게 될 것이오. 설령 성상께 전해지지 않더라도, 내가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지."
"성상께 전해지지 않다니요?"
"아, 오위장이 조정으로 들어가 복명하려면 절차상 족히 며칠의 시간은 필요할 터, 그대들이 먼저 운현궁과 접촉할 수 있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저희가 속히 운현궁으로 먼저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그들에게 귓속말로 밀명을 더 내렸다.
심각해진 안영흠과 장무영은 부리나케 한양으로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지금 임금이나 조정에서 그럴 여유나 있을지 모르겠다.'
이선은 냉소했다. 음력 6월, 양력 7월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 한양은 폭발 직전이었다.
바로 그 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폭탄의 뇌관이 당겨지고 있었다.
기존의 오영(五營)을 폐지하고 무위(武衛)·장어(壯禦)의 2영을 설치하고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는 등 군제 개혁이 단행되자,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병사들의 불만이 점차 누적되었다.
무위영과 장어영에 속하는 병사들조차 별기군과 비교하면 열악한 대우를 받았고, 특별대우를 받는 별기군의 녹색 도포 자락만 봐도 분노를 느꼈다.
2영에 속하지도 못한 병사들은 대부분 실직 상태에 놓였고, 왕십리에서 채소 장사를 하거나 날품팔이를 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이들의 급료가 무려 13개월째 밀려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받아야할 급료는 선혜청이 지불해야 했는데, 당상 민겸호와 전임 당상인 경기감사 김보현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마침내 6월 5일, 구 오영병사들에게 13개월 만에 급료를 지불한다는 통보가 왔다.
"이게 뭐야? 쌀이 반도 안 채워져 있잖아?"
"허, 이걸 보게. 죄다 모래와 겨로 있네!"
"선혜청 놈들이 장난을 쳤구나!"
병사들은 격분하여 선혜청으로 달려가 항의했다.
"이놈들아! 이걸 먹을 쌀이라고 준거냐!"
"대체 처자식에게 어떻게 이런 쓰레기를 먹으라고 줄 수 있겠느냐!"
"얼씨구? 싫으면 도로 놓고 가던가!"
"이런 거지같은 놈들. 주는 대로 고맙게 받아먹을 것이지, 어디서 행패냐?"
하지만 창고지기와 하인들조차 병사들을 모욕했고, 병사들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야 이 개자식들아!"
병사들은 창고지기와 하인들을 폭행했다. 이때만 해도 단순 소요사태에 지나지 않았다.
보고를 받은 임금은 어이없어 하며 말했다.
"13개월이나 급료를 내주지 못한 것도 이미 민망한 일인데, 게다가 섬이 차지 않은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그들이 먹여줄 것을 바라는 식량은 아홉 말의 쌀에 불과한데, 이것조차도 일 년이 지나도록 충분히 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일하여 의식을 마련하면서도, 감히 군령을 어기지 않았으니 오히려 기율이 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영의정 홍순목의 답에 임금도 동의했다.
"그렇다. 군졸들이 군령을 어기지 않는 것은 역시 가상한 일이다."
만약, 마침내 지불된 급료가 정상적이었다면, 혹은 최소한 일이 터진 후에 대처를 잘 했더라면, 병사들의 분노는 잠재워졌을지도 모른다.
임금은 군료 미지급 사태에도 군율을 지켜온 병사들을 위무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이를 집행해야 할 병조판서 겸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이미 '폭동 주동자' 4인을 체포한 상황이었다.
이제 일은 해결의 수순을 벗어나고 있었다.
운현궁은 그 누구보다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이때, 이선의 명을 받은 안영흠과 장무영이 운현궁으로 들어왔다.
"대원위 합하, 강녕하시옵니까?"
대원군은 매서운 눈빛으로 이선의 가신들을 쏘아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가 내게 보고조차 하지 않고 완화군과 해외로 떠난 죄가 무거우나, 지난 일은 구구절절 논하지 않겠다. 완화군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인천에 계십니다. 합하께 드리는 군 대감의 서한이옵니다."
대원군은 이선이 보낸 서찰을 읽어보았다. 매서운 표정이던 대원군의 표정이 점차 누그러졌다.
"이 말이 모두 참이냐?"
"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저희가 직접 군 대감을 청국과 아라사에서 함께 모셨습니다. 군 대감의 말씀은 모두 참입니다."
대원군은 정치적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돌아온 완화군이 자신에게 큰 정치적 자산이 되리라는 걸 동물적인 육감으로 파악했다.
"좋다. 완화군이 보유한 자산이 얼마나 되느냐?"
"아라사 돈으로 50만 루블······. 그러니까 청은으로 하면 30만 냥 쯤 되옵니다."
생각보다 엄청난 이선의 자산 규모에 대원군은 저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졌다. 가난한 조선에서 엄청난 돈이었다.
"그 돈을 운현궁의 정치자금으로 보태겠다고?"
"더 나아가 조선의 개혁자금으로 쓰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하하, 역시 시원시원하구나! 이렇게 총명하고 통이 크니, 내가 손자 하나는 정말 잘 두었군!"
대원군은 껄껄 웃었다.
"그럼 완화군이 거느린다는 부대의 규모는 어찌 되느냐?"
"연해주에 살던 조선 백성들을 조직한 것으로, 지금 인천에 와 있는 병사는 200명입니다. 모두 신식 양총으로 무장했으며, 1분에 수백 발을 쏟아내는 기관총이란 것도 갖고 있습니다."
대원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통해 서양 무기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별기군하고 비교하면 어떤가?"
"별기군을 안 봐서 모르겠습니다만, 감히 대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주 좋다. 그럼 청국 북양대신과 아라사 황제는 완화군을 지지할 뜻이 있다고 봐야겠지?"
"높으신 분들의 뜻을 소인들이 어찌 알겠사옵니까? 단지 군 대감께서 그분들의 깊은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사옵니다."
대원군은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마침내 때가 무르익었구나."
"합하, 지금 도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여겨집니다. 들으니 구 5영 군사들의 급료가 13개월이나 밀렸다고······."
"그래, 그조차도 절반 이상 빼돌린 채로 줬다고 했지. 나라 꼴 하고는. 국가를 농단하는 도적들을 참고 지켜보기가 어렵구나."
대원군은 혀를 끌끌 찼다.
"군 대감께서는, 밀린 병사들의 급료를 대신 낼 생각이 있다 하였사옵니다. 운현궁의 이름으로 말이지요."
"그게 무슨 소리냐? 선혜청이 해야 할 일을 왜 운현궁이 해?"
대원군이 어이없다는 듯 답하는데, 안영흠이 이선의 말을 전했다.
"군사와 백성은 나라를 지키는 근간이옵니다. 조정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왕족 된 이로서 도리를 다하는 것이 맞다 여깁니다."
"누가 그걸 모르느냐? 완화군이 운현궁 명의로 쌀을 풀면, 세도를 부리는 민씨 척족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당장 역모라고 의심할 터······. 아아!"
대원군은 마침내 깨달은 바가 있었다.
"완화군의 말이 옳다! 내 즉시 사람을 보내 밀린 급료를 대신 내주겠다고 전하겠노라."
구식 군인들이 모여 사는 왕십리에 반가운 소문이 퍼져나갔다.
"소식 들었나? 대원위 대감께서 밀린 급료를 대신 내주시겠다는군!"
"정말인가? 역시 우리 같은 천것들을 생각해주시는 분은 대원위 대감 밖에 없으시구만!"
"그리고 민겸호에게 잡혀간 이들도 풀려날 수 있도록 주선해주시겠다는군."
"민겸호, 그 개자식. 이번 기회에 쳐죽여버리면 소원이 없겠네."
"더러운 민가놈들, 대원위 대감께서 집정하실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말이야."
"아무튼 우리에겐 운현궁밖에 없네 그려. 일이 잘 풀리기를 기다려보자고."
이 소식은 곧 병조판서 겸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귀에도 들어갔다.
"뭐라? 운현궁이 쌀을 풀어 병사 놈들의 밀린 급료를 대신 내주겠다고? 운현궁에 그럴 돈이 어디 있단 말인가?"
민겸호는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동생이므로 대원군과는 처남 매부 사이요, 임금에게는 외삼촌이 되었다.
여기에 중전의 신임까지 더해지니, 민겸호는 민씨 척족의 수장으로서 세도가 극에 달했다. 임금의 생부인 대원군조차 우습게 여겼다.
"그 노인네가 드디어 노망인가? 누님도 참, 노망난 노인네랑 사느라 힘들겠어."
잠시 생각하던 민겸호는, 무언가 미치는 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라사에 갔던 김광훈과 신선욱이 돌아왔지. 완화군 이선이 아라사에 버젓이 살아있으며, 조선으로 오고 싶다지? 범월죄인이 감히 어딜 돌아온단 말이냐?"
김광훈과 신선욱은 한양에 돌아오자마자 임금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민겸호가 승정원에서 보고가 올라가려는 걸 막아놓은 상황이었다.
"답이 나왔군! 대원군과 완화군을 내세워, 저 무지한 놈들을 선동해 군란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폭동 주모자로 잡아온 놈들과 아라사에 다녀온 놈들을 엄히 심문해서 배후를 밝혀내기만 하면 된다!"
민겸호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데, 아들인 동부승지 민영환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했다간 민심이 동요될까 두렵습니다. 가뜩이나 민심은 우리 가문에 대한 증오가 강하고 운현궁에 대한 신망이 높은데, 불에 기름을 붓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성상의 뜻을 받들어 저들을 위무하는 게 옳지 않은가 합니다."
"쯧쯧, 너도 참 어리구나. 그까짓 무지렁이들의 민심이 무엇이 두렵단 말이냐? 여흥 민가와 중전 마마의 우환인 운현궁과 완화군을 한 번에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번 일만 성공시키면, 우리 가문은 영원히 탄탄대로일 것이니라."
민겸호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