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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
봉기가 있었던 7월 24일 당일, 중궁전의 승하를 알리는 전교가 있었다.
"중궁전이 오늘 오시에 승하하였다. 거애(擧哀)하는 절차는 규례대로 마련하고 빈전(殯殿)은 환경전(歡慶殿)으로 하라."
"그렇다면 중궁전이 승하하신 걸 직접 본 사람이 있소?"
"없는 듯합니다. 대원위께서 왜 이리 서둘러 전교를 내리게 하신 건지······. 말이 많습니다."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예상대로, 대원군이 민심을 달래고자 서둘러 중전의 사망을 공표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전의 생사가 확인된 건 아니었으므로, 이는 무리한 조치였다.
"결국, 모든 뒷수습은 내가 해야겠구려. 아무튼, 먼저 시급한 일부터 합시다."
이선은 먼저 베베르를 만났다.
"영사, 조선에서 정변이 발생해 정권이 교체됐습니다. 현 집정자는 국왕의 부친이시자 제게는 조부가 되는 대원군입니다."
"대원군은 강력한 배외론자 아닙니까? 러시아 역시 대원군 집정기에 몇 번이나 수교를 제의했는데, 모두 거절당했지요."
"그때와 지금은 정세가 다릅니다. 대원군께서도 서양과의 수교를 취소하진 않을 겁니다. 청국의 중재를 거치지 않고 조선과 수교할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일단 먼저 본국의 훈령을 기다리는 게 순서일 듯합니다. 프랑스 영사 딜롱도 천진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나 역시 일단 천진으로 돌아가서 훈령을 기다리려 합니다."
"그럼 그리하시지요. 카레야 호는 인천에 대기해야 하니, 프랑스 영사와 함께 천진으로 가십시오."
이선은 밀봉한 문서를 베베르에게 전달했다.
"이건 러시아 정부에 보내는 극비문서이니, 오직 황제 폐하와 각료들만 열람할 수 있도록 비밀 전문(電文)을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조선은 대륙과 연결하는 전신(電信)이 없으니, 결국 천진이든 블라디보스토크든 가야 했다.
"알겠습니다. 공작은 어찌하실 겁니까?"
"저는 이제 한양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고려대대와 카레야 호는 제물포에 대기하도록 하고요."
"한양은 지금 정세가 극히 불분명합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이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조선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지금이 그럴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선은 가신들을 모두 소집했다. 청에서 무역을 하던 송금덕과 장여원도 이미 불러들였다.
이선은 제일 먼저 이들에게 서찰을 전달해주었다.
"천진으로 보낼 서찰 세 통이오. 한 통은 영선사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한 통은 북양대신서리 장수성에게, 한 통은 통령북양수사 정여창에게 보내는 것이오. 시간을 다투는 문제이니, 조속히 가서 전달하시오."
마침 이홍장은 모친상을 당해, 조정으로부터 휴가를 받아 고향인 안휘성 합비에 내려가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 상황에서 이홍장을 대신한 결정권자는 북양대신서리 장수성과 정여창이었고, 실제 역사에서 청군의 조선 파병을 결정한 것도 그들이었다.
"예!"
송금덕이 고개를 조아렸다. 이선은 다음으로 장여원을 불렀다.
"그대는 중국 남방의 지리에도 익숙하다고 했었지? 안휘성도 가본 적 있소?"
"예, 강남으로 가는 길에 들려본 적이 있습지요."
"즉시 상해를 거쳐 안휘성 합비로 가시오. 북양대신이 지금 합비에 있을 것이오. 이 서한은 신속하게 북양대신에게 전달되어야 하오. 남의 손을 거치지 말고 반드시 직접 전달하시오!"
"알겠습니다!"
앞으로 조선 문제를 전담하는 건 이홍장이니, 반드시 그를 설득해야 했다. 이선은 그와 맺어둔 친분이 효과를 발휘하길 기대했다.
송금덕과 장여원을 청으로 보낸 이선은, 김학우를 불러 서한 두 통을 전달했다.
"그대는 일본 동경에서 2년 동안 일한 적이 있다고 하였지? 내가 듣기로 일본어가 유창하다 들었는데."
"예, 조금 합니다."
"좋네. 지금 즉시 원산으로 달려가, 일본으로 가는 기선을 타게. 하나부사 공사가 시모노세키로 갈 거고, 아마 내 예측이 맞으면 이노우에 외무경도 거기로 갈 것이네. 김옥균과 백춘배도 그쪽으로 올 거고. 한 통은 김옥균에게 보내는 서한이고, 한 통은 이노우에에게 보내는 것이네. 반드시 직접 전달하게."
"그리 하겠습니다!"
외교적 수습책을 찾기 위해 가신들을 각지로 파견한 이선은, 이제 내부의 수습책을 찾아야 했다.
"이제 한양으로 가서 성상과 국태공을 뵙시다."
"군 대감, 고려대대는 어찌합니까?"
"서양식으로 무장한 병사와 군함을 한양으로 들이면 문제의 소지가 있소. 병인년과 신미년의 양요를 기억하는 조선인들에게 지나친 공포를 주는 건 좋지 않지. 조정의 정식 허가를 받을 때까지, 잠시 인천에 대기하도록 합시다."
"조정이 허가를 내줄까요?"
이선이 씩 웃었다.
"지금 믿을만한 무력이 누구보다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대원군이시오."
이선은 고려대대 1중대의 임시 지휘관을 맡고있는 정유진과 얀코프스키, 카레야 호의 선장 베벨을 불렀다.
"인천 부사의 협조를 얻었으니, 당분간 제물포에 군영을 설치하고 한양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무엇보다 군기는 엄정해야 하고, 민폐는 철저히 금지해야 합니다."
"예, 걱정 마십시오."
"연락이 오면, 즉시 한양으로 입경하시오. 기선으로는 양화진까지 들어올 수 있을 겁니다."
이선은 가장 중요한 당부를 했다.
"이곳에서 여러분은 러시아군 소속이 아니라, 모두 의용군 소속임을 명심하십시오. 곧 영국 군함이 인천으로 올 겁니다. 만약 그들이 정체를 물어보면 무조건 조선인으로, 조선군 소속이라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정 동지, 그대는 이 순간부터 조선군 무관이오. 임시로 초관(哨官)에 해당되는 직위를 내릴 터이니, 가급적 병사들과 대화할 땐 조선어만 사용하시오."
엄밀히 말하면 이선에게 벼슬을 내릴 권한은 없었지만, 어차피 사후승낙을 받을 예정이었다.
"명을 받듭니다!"
지휘 능력 외에도 책임감과 동포애가 강한 정유진은 임시 지휘관 인선으로 손색이 없었다.
"판 얀코프스키, 그리고 베벨 선장. 여러분은 조선군의 첫 군사 고문관입니다. 청국과 일본에도 서양인 군사 고문관은 많이 있으니, 외국인이 물으면 조선과 고용 계약을 맺었다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얀코프스키는 폴란드 정치범 출신이고, 베벨은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상선사관이니 본래 러시아군 소속도 아니었다.
러시아군이 조선군을 장악했다는 외국의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미리 러시아군 출신은 배제해둔 것이었다.
인천에서 모든 사전 조율을 마친 이선은, 송금덕을 시켜 미리 마련해둔 송상의 배에 올랐다. 이 배에는 이선이 조선에 보내는 선물이 담겨 있었다.
안영흠과 장무영, 고려대대에서 가려 뽑은 소수의 정예 병력만 이끌고 한양으로 향했다.
"자, 오래 기다렸소. 이제 우리의 고향, 한양으로 돌아갑시다."
"오오!"
이선을 태운 배는 돛을 펼치고, 한강을 향해 나아갔다.
한편, 한양.
대원군은 왕명으로 집정을 맡자마자 소요의 진정에 골몰했다.
먼저 가장 문제가 된 군제를 개혁했다.
"무위영은 종전대로 훈련도감이라 호칭하고, 그 나머지 각 영(營)도 일체 옛 규례를 복구하도록 하라. 통리기무아문(機務衙門)을 혁파하고 삼군부(三軍府)라 칭하라."
대원군 집정기의 옛 제도로 돌아간 것이었다.
봉기에 가담한 군인·백성들의 죄를 묻지 않고, 사면령을 내려 죄인들을 대거 석방했다.
또한 지탄을 받고 있던 척족들을 모조리 파직했다. 그리고 왕족과 명망 높은 신료, 척족 정권 하에서 중용받지 못하던 소론·남인 계열 인사들을 등용하여 대원군파 정권을 출범시켰다.
"영의정 홍순목을 유임한다. 신응조를 우의정에 임명한다. 이재면을 호조판서 겸 선혜청 당상 겸 훈련대장으로, 신정희를 어영대장으로, 조희순을 금위대장으로, 이회정을 예조판서로 삼는다."
대원군의 장자인 이재면이 호조판서와 선혜청 당상, 훈련대장을 겸하면서 재정과 병권 모두를 장악하게 되었다. 실질적으로는 대원군이 모든 걸 통제하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각종 폐단을 제거하고 개혁을 추진하려고 해도, 곧 인재의 부족을 통감하게 되었다.
'쓸 만한 자들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시무를 맡아 정책을 집행할 자들이 필요한데.'
대원군을 지지하여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은 거의 시대에 뒤떨어진, 위정척사 계열의 보수파들이었다.
임금을 보좌하여 개화 정책을 이끌어나가던 시무(時務)개화파 관료들은 몸을 사려 대원군 정권에 출사하려 들지 않았다.
대원군은 서둘러 능력 있는 인재를 중용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갑자년(1864)에 집정했을 때보다 더 상황이 나빠지지 않았는가!"
재정 파탄과 군대의 부족함이 심각하여, 대원군은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했다.
대원군은 급한 대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각 지방의 수령들에게 명하니, 미납세미를 즉각 한성으로 올려라! 밀린 군료를 지급하고 도성민의 식량을 충당해야한다."
반란의 원인이 된 군량과 한양의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면 쌀이 화급히 필요했다.
1882년 7월 26일, 봉기 3일 후.
이선을 태운 송상의 배가 마포나루에 이르렀다. 이선은 마침내 조선에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한양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이 없군요."
"왜 변함이 없겠소? 나라가 크게 뒤집어졌는데······."
이선의 지적에 안영흠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즉시 운현궁으로 가서 군 대감이 오셨음을 알리겠습니다."
"그래 주시오. 이왕이면 대원군께서 마포로 오셨으면 더 좋겠다는 부탁도 드리고."
순리대로라면 손자인 이선이 대원군을 찾아가는 게 도리에 맞지만, 대원군에게 끌려다닐 의사가 없었다.
"대원군께서 직접 말입니까?"
"손자가 드릴 선물이 있어서 보여드리고 싶다고 전하세요. 한성까지 우리가 다 나를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선의 말에 안영흠은 깨달은 바가 있는 듯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제가 대원위 합하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몇 시간 후, 대원군은 측근들과 함께 마포나루로 나왔다. 공사다망한 상황에서 손자가 오라가라하는 건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대원군에게 이선은 중요한 존재였다.
"쉬이, 물럿거라! 대원위 대감 행차시다!"
대원군이 마포나루에 이르자, 한복 차림의 이선이 무릎을 꿇고 맞이했다.
"소손이 할아버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불충불효한 손자를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이선이 조선 예법 기준으로도 과할 정도로 대로에서 절을 하자 대원군도 가만히 팔인교 위에 앉아서 맞을 수는 없었다.
"어허, 어찌 이러는고. 보는 눈이 많은데 어서 일어나거라!"
"아닙니다. 시생이 외람되이 나라의 허락도 없이 외국에 나갔거늘, 먼저 사죄를 하여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어찌 조선에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이선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은 채 일어서지 않자, 대원군이 급히 일으켜 세웠다.
"용서한다, 이미 용서했느니라! 너는 성상의 장자이니, 백성들 보는 앞에서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아니 된다. 왕실의 체통을 지켜야 하느니."
대원군은 이선을 보자마자 뭐라 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선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왕실의 체면에 집착하는 대원군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소손이 정무에 힘쓰시는 할아버님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 있사옵니다."
"호오, 그게 무엇이냐?"
이선은 대원군을 이끌고, 배 위에 가득한 쌀가마니를 보여주었다.
"작금의 난리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쌀 부족이라 알고 있습니다. 하여, 저는 무엇보다 시급히 쌀을 준비해두었습니다."
도성의 쌀 부족에 고민하던 대원군에게 천군만마가 닿은 느낌이었다.
"어디서 쌀을 이만큼 구했느냐?"
"시생이 청국과 무역을 하지 않사옵니까? 이번에 돌아오는 상인에게 무엇보다 쌀을 사두라 하였습니다. 여기 있는 건 일부에 불과하고, 제물포에는 더 많이 있습니다. 이를 모두 운송하게 하소서."
이선은 송금덕을 시켜, 청에서 오는 길에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쌀을 최대한 많이 사두라고 명했다. 송금덕은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 이번 무역에서 얻은 이문을 모두 쌀에 투자해 조선으로 싣고 왔다.
"과연 내 손자, 현명하도다! 도성의 백성이, 아니 조선 팔도가 모두 너를 칭송하리라!"
대원군이 크게 기뻐하는데, 이선은 일부러 겸양의 뜻을 표했다.
"나라에서 금하는 사무역을 왕족으로서 하였으니, 저의 죄가 무겁습니다."
"그 무슨 소리냐? 그따위 금령은 개의치 말거라.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법이다. 민심이 안정될 것이거늘, 그까짓게 뭐가 중요하단 말이냐?"
과히 대원군다운 답이었다.
"시생이 외국에서 보니, 외국과의 통상무역은 실로 국가의 부를 채우는 데 중요하다 느꼈습니다. 조선에서도 금령을 폐하고, 무역을 장려해야 합니다."
"그러하냐?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대원군이 너무나도 선선히 외국과의 통상무역에 긍정 의사를 밝히자, 주위의 가신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그들이 아는 대원군은 강력한 척화론자였다.
하지만, 이선은 놀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