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64화 (6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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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예(曲藝)

"통석의 염이라니, 지금 이게 무슨 말장난이십니까? 일본어에는 이런 표현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선은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는 태도였다.

"그래요? 아무튼, 국왕의 장자인 본인이 충분한 유감을 표한 것 같습니다만. 다른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이선은 바로 역공을 가했다.

"최근 조선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전 병조판서 민겸호와 별기군이 결탁하여 대원군을 모해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별기군 교관이 호리모토 소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 정부는 오히려 호리모토의 공모 여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모함입니까! 일본군 장교가 변란의 음모를 공모했다니요! 지금 책임 회피하려고 죄를 뒤집어씌우는 거 아닙니까?"

"조선 말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방귀 뀐 놈이 성을 낸다고. 혹시 호리모토가 아니라 일본 정부가 공모한 거 아닙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 사항을 들이미는 걸 봐선 더더욱 심증이 굳혀지는데……."

"정말이지 어이가 없군요. 협상을 하려고 온 겁니까, 협박을 하려고 온 겁니까?"

'그거 니네가 잘하는 일이잖아. 운요호 사건도 니네가 일으키고 조선한테 책임 전가하고 협박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겠지. 그런 관계는 여기서 끊어 버리자.'

"당연히 협상을 하려고 온 거지요. 다만 일본 정부가 변란을 핑계 삼아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관철하려고 하니, 조선 정부도 귀국의 심중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왕자와는 협상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귀국의 국왕 전하를 알현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이선은 단호했다.

"필요한 절차를 먼저 거치세요. 내가 전권대사입니다. 전권대사와 실무 회담을 한 후에 국가 원수를 알현하는 것이지요."

"그럼 대원군이라도 뵙고 논하겠습니다."

"뭔가 오해하시나 본데, 내가 조선에서 외교에 가장 호의적으로 접근할 사람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요. 대원군께서는 그리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십니다만."

"……아무튼, 오늘의 논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나부사는 협상장을 박차고 나왔지만, 곧 딜레마에 빠졌다.

애초에 그가 받은 훈령은 서울에 가서 임금을 알현하고, 대원군과 협상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무력시위를 해서라도 관철하라는 훈령도 있었다.

'하지만 무력시위는 불가능하다.'

일본 군함과 수송선 4척, 1개 대대 4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왔지만, 병력의 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부사는 청국 군함 3척과 500명의 군사 외에도, 근대적 무장을 한 조선군이 인천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나, 둘! 하나, 둘!"

협상장으로 쓰이는 인천부 관아 밖에는, 이선을 호위하고 온 1개 중대 병력이 훈련 중이었다.

러시아 주재 일본 공사관에서 오래 근무한 적 있는 하나부사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비록 조선인의 얼굴로 조선어를 쓰고 있지만, 이들은 러시아제 소총과 러시아 군복을 입고 있었다.

하나부사는 밀정을 통해 이들이 러시아 거주 조선인이며, 최근 조선군으로 편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더불어 일본 내에서 러시아통으로 꼽히는 하나부사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와 이선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청과 러시아가 완화군의 배후에 있는 건가? 완화군이 러시아를 믿고 저렇게 강하게 나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강경론으로 나가는 게 의미가 있는가?'

하나부사는 보고서를 작성해, 외무성을 향해 다시 훈령을 내려 달라고 청했다.

인천을 떠난 일본 우편선이 시모노세키로 왕복하는 동안, 조선은 중요한 시간을 벌고 있었다.

그사이, 이선은 변란 소식을 듣고 인천으로 들어온 미국 군함 모노카시(USS Monocacy) 호의 함장 코튼(C.S Cotton) 중령을 김홍집과 함께 방문했다.

"조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는 조선의 왕자, 이선입니다. 조선 국왕께서는 미국 군함의 방문을 환영하며, 왕자인 내가 친히 영접하라 명하셨습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각하."

밖에도 영접사로 왕자가 나타나자 코튼도 놀란 모양이었다. 그도 조미 조약 체결 당사자인 슈펠트 준장으로부터 이선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조선 정부는 지난 5월에 체결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미합중국과 만대에 걸쳐 우호를 갖길 희망합니다. 조선 정부는 조약의 조속한 비준을 원합니다."

김홍집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한 장본인으로, 새 정부가 김홍집을 중용한다는 건 곧 외교 정책을 그대로 이어나가겠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감사합니다. 미합중국 정부와 대통령께서는 조선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며,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길 원합니다. 본관의 파견은 대통령의 명령으로 이뤄졌으며, 저는 주중 공사의 훈령에 따라 조선의 사태를 관찰하고 보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코튼 중령은 주중 미국 공사 영(J.R.Young)의 훈령을 받고 조선으로 왔다.

전임 대통령 그랜트의 측근인 영은 다른 미국 외교관들과 달리 동양 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조선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조선 정부 역시 이웃 나라인 일본과의 분쟁을 원치 않고, 일본과 우호 관계가 회복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조선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반복한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귀국 정부는 이를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양국 간의 조약 1조에 따라, 미합중국 정부는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우호적인 주선을 할 용의가 있습니다."

조미 조약 제1조, 이른바 '거중조정(居中調停, good office)' 조항이다. 한 나라가 제3국에 의해 강압적 대우를 받을 때 다른 나라는 중재를 한다는 조문이었다.

조선은 여기에 엄청난 기대를 걸었지만, 훗날의 역사는 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말해 준다.

이선은 거중조정에 대해 전혀 환상이 없었지만, 우호적으로 답했다.

"귀국 정부에서 도와준다면, 이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양국의 관계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건 조약을 비준하고,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입니다. 조선은 자주독립국으로서, 서양 국가 중 가장 먼저 수교 조약을 체결한 미합중국 정부에 특별한 우의를 갖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 점을 백악관에 전해 주십시오."

왕자라는 신분, 유창한 영어, 서양식의 외교적 매너, 미국에 대한 상당한 호의를 보이는 이선에게 코튼은 호감을 느꼈다.

"그리하겠습니다."

"조선에 머무는 동안 최고의 예우를 보내드릴 터이니, 부디 사양하지 마십시오."

"조선 정부와 각하의 호의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선과 코튼은 서양식으로 악수를 하였다.

'이번에 조약을 맺은 3개국 중에선 미국이 우호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크다. 신정권이 조미 조약을 조속히 비준하겠다는 건 외교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뜻이고, 미국뿐만 아니라 조미 조약을 주선한 청나라에 대해 우호적인 손짓이다.'

이선이 미국에게 접촉하는 건 외교적 호의 외에도 여러모로 계산된 행동이었다.

'또 다른 조약 국가인 영국과 독일을 향해서도, 내가 차르와의 친분으로 러시아에 경도되어 있다는 의혹을 불식시킬 수 있겠지.'

이선은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외교적 패를 다 쓰고 있었다.

'청나라와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고, 미국을 이용해 청나라와 영국을 안심시킨다.'

이선의 구상은 착착 진행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잘되어 가고 있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몰라. 정말 외교는 외줄 타기 곡예나 다름없군.'

얼마 후, 정여창과 마건충을 대표로 하는 청국 사신단이 한양으로 들어왔다.

대원군은 직접 청국 사신단을 접견하여 환영의 뜻을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대인. 이렇게 먼 길을 오게 하는 수고를 끼쳐드려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국태공께서 친히 반겨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강경한 배외론자로 알려진 대원군이 정중한 태도로 청국 사신단을 친히 접견하니, 사신들의 기분도 제법 유쾌했다.

한양에서는 청국 사신을 문자 그대로 '칙사 대접' 해 주기 시작했다.

경복궁 경회루에서 임금이 친히 참석한 주연이 열렸다. 종친들도 모두 동원되어 청나라 사신단을 맞이했다.

산해진미가 차려지고, 춤과 노래, 곡예와 온갖 공연으로 흥을 도왔다.

"황상께서 소방(小邦)을 언제나 이렇게 배려해 주시니, 지극한 황은에 어찌 다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원군과 이선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임금은 청나라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중국과 청구(靑丘, 조선)는 언제나 한집안과 같은 사이였습니다. 사소한 변란으로는 그 관계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일부 패악한 역적들이 왜적과 내통하여 대국과의 관계를 상하게 하려 하였습니다만, 충성스러운 우리 군민들이 나서 역적을 제압했습니다. 대국에 누를 끼쳐서 송구합니다만,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임금이 직접 나서서 하는 말에, 사신들도 딱히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 조선과 한양은 지극히 평온해 보입니다."

"황상의 덕화(德化)가 온 조선에 깃들고 있거늘, 어찌 평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잠자코 있던 대원군이 나섰다.

"조선은 청국이 서양 각국과의 수교 통상을 도운 데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청국의 중체서용을 본받아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니, 앞으로 많은 도움을 주십시오."

대원군이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직접 개혁을 추진하겠다는데, 양무파가 반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

"일본과도 평화적으로 지내고 싶습니다만, 유구를 침범한 일본이 조선까지 위협할까 봐 걱정입니다. 조선은 중국의 동쪽 울타리이니, 순망치한의 관계입니다."

"국태공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본의 준동은 대청이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어찌 일일이 대국의 신세를 질 수 있겠습니까? 조선이 스스로 부강하여 강한 무비를 갖추면, 청국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는 대청에서도 옳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홍장이 이유원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을 알고 있는 대원군은 이를 그대로 활용했다.

"청국에서도 상승군이라는 사례가 있어, 서양식 군대를 편성해 장발적(태평천국)을 토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마침 아라사 땅에 살던 우리 백성들이 조국을 그리워하여, 자발적으로 양총을 들고 귀부하였습니다. 이에 조선도 청국을 본받아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였습니다."

정여창과 마건충은 대원군이 완화군을 통해 러시아와 내통하였는지 의심하였는데, 대원군이 먼저 선수를 쳤다. 청나라의 상승군을 모델로 군대를 편성했다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허허, 타국으로 떠난 백성들이 스스로 무기를 들고 귀부하다니요. 실로 귀국의 복입니다."

"이게 다 황상의 덕화가 세상을 뒤덮은 덕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호쾌하게 웃는 대원군과 미묘한 표정의 청나라 사신들을 보면서, 이선은 속으로 나지막이 웃었다.

청국 사신단도 눈과 귀가 있어, 사건의 전모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민씨가 일본과 내통하여 변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대원군이 군대와 백성을 선동해 정권을 잡아 놓고서, 그 죄를 민씨에게 뒤집어씌운 거겠지. 보통 교활한 늙은이가 아니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조선의 정권은 대원군파가 완전히 장악했고, 민씨 세력은 역적으로 몰려 소멸하였다.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해 내정에 간섭하는 일도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일본의 영향력 증대가 걱정되던 판이긴 하였는데, 그나마 대원군이 대청에 우호적인 게 다행입니다."

"무능하고 부패한 민씨 일파보다는, 차라리 조선 백성의 지지를 받는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있는 게 나을지도."

"완화군 이선은 총명한 데다 중당(이홍장)과도 친분이 남다르니, 잘만 활용하면 장기적으로 대청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들도 완화군이 재정과 군사, 외교로 대원군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걸 알고 새로운 대응책을 고심했다.

"그러길 바라야지. 총리아문과 북양 대신께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합시다."

8월 18일, 정여창과 마건충은 사실상 대원군 정권을 승인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공친왕과 이홍장에게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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