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풍운아(風雲兒)
청 사신단이 대원군 정권을 승인한다고 비밀 보고를 올리고 며칠 후.
하나부사가 이선에게 회견을 요청했다.
"조선 정부에 재협상을 요청합니다."
이선은 바뀐 역사에 적용된 일본 정부의 새 정책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하던 하나부사가 태도를 바꿔 유화적으로 나서자 일본 정부의 정책이 바뀌었음을 눈치챘다.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역시 이노우에 외무경은 현명하시군요. 외무경도 소싯적에 존왕양이를 내세워 영국 공사관 방화도 저질렀던 사람인데, 충의지사의 뜨거운 마음을 잘 알지 않겠습니까?"
이선의 추측이 맞다면, 아마도 일본의 온건책을 대표하는 건 외무경 이노우에일 터였다.
'물론 이노우에가 청년기를 떠올리며 충의지사의 뜨거운 마음을 알아서 그랬을 리는 없고.'
청과 러시아의 눈치를 보리라는 대외적 문제와 1873년의 '정한론 논쟁'과 마찬가지로 대외강경파보다 내치우선파가 우세한 일본 내부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짐작에서였다.
하지만 이선은 일본이 원하는 걸 순순히 내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협상은 자연히 길어졌다.
이선은 일단 김홍집에게 협상의 실무를 맡도록 하고, 자신은 비밀리에 일본에서 온 손님을 맞이했다. 일본 내부의 정보를 자신에게 비밀리에 보내 주었던 이였다.
'이미 다 알던 사실이라 그렇게 큰 도움이 된 건 아니었지만, 일단 성의가 있어서 좋군.'
정보원은 바로 김옥균이었다. 측근인 백춘배의 전언(傳言)에 이어 김학우를 통해 이선의 밀서를 받은 김옥균은, 크게 놀라워하며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이선에게 보냈다.
하나부사를 따라 조선에 도착한 후에도, 은밀히 이선과 통하며 정보를 주고받았다.
김옥균은 조선에 오자마자 이선을 즉시 만나고 싶어 했지만, 이선은 정무가 급선무라고 회동을 미루었다.
'아쉬운 건 저쪽이니 애가 타겠지.'
때가 무르익자, 이선은 김옥균의 회견 요청을 허락했다.
"완화군 대감, 홍문관 교리 김옥균이 삼가 대감을 뵙사옵니다."
허여멀건한 얼굴에 짧은 수염을 기른 30대 초반의 사내가 자신을 소개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직접 만나긴 처음이군요. 반갑습니다."
김옥균이 정중하게 예를 표하니, 이선도 답례했다.
이선은 개화기의 풍운아, 김옥균을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김옥균은 겉보기에는 정5품 홍문관 교리에 지나지 않았다. 1872년 과거에 급제한 이래, 10년 동안 김옥균의 벼슬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김옥균의 정체는 이른바 '개화당',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비밀 결사의 지도자였다. 그동안 막후에서 암약하며 공식 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임오군란은 김옥균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원군을 지지하는 세력은 결코 내 사람이 될 수 없다. 김홍집은 유능하고 훌륭한 관료이지만, 유학적 원리에 충실하니 왕조의 충신은 될지언정 내 가신이 될 수는 없는 사람이다.'
이선은 김옥균과 개화당을 자신의 가신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정치란 건 일방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것보다, 주고받는 관계가 더 확실하다. 나와 개화당은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지금 천하의 사세(事勢)는 밖에 나가서 시세의 변동을 조사하지 않으면 외국과 교섭할 수가 없습니다. 구구한 변명이오나, 저의 충심 또한 참으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김옥균은 자신이 일본에서 장기 체류한 일 때문에 보수파의 비난을 받는 걸 알고 있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대원군에게 이를 해명해야 할 필요를 느껴 사죄문까지 준비한 상황이었다.
"김 공의 높은 뜻을 압니다. 그렇게 따지면 허가 없이 청국과 아라사에 나갔던 나부터 처벌해야 합니다.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역시 군 대감께서는 이해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김 공이 일본으로 간 건 나라를 개혁하려는 뜻이 있었을 터이니, 고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당장 시급한 국가의 과제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선이 김옥균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하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국가가 지극히 큰 변고를 당한 직후이므로, 인재를 등용하는 데 홍통지법(弘通之法)을 쓰지 않는다면 나라를 보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홍통지법이라. 구체적으로?"
"이른바 사족·중인·상인의 구별 없이, 승진의 관례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재능에 따라 높이 등용하소서. 신분의 간격이 없게 한 뒤에야 인재를 크게 쓸 수 있으며, 만백성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소의 지론입니까, 아니면 일본에 가서 생각이 바뀐 겁니까?"
"과연 일본에서도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쓰고 있어, 그 국운이 크게 융성할 기미가 보입니다. 하지만 소생은 평소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습니다."
그 자신이 세도가인 안동 김씨 출신이면서도, 김옥균은 신분제 폐지론자였다. 일찌감치 성리학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김옥균은 불교의 평등사상에 심취했다.
친화력이 좋고 사교술이 빼어났던 김옥균은, 신분을 막론하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두루 친분을 맺었다.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릴 줄 알았다.
중인 유홍기를 스승으로 모셨고, 동지로 여기는 이들 중에선 상민이나 심지어 천민도 있었다.
신분 차이가 분명했던 조선 사회에서, 이건 단순한 기행이 아니었다.
김옥균 자신이 명문가 출신으로 과거 급제자이면서도, 신분 차별이 갖는 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려 했다. 풍운아 김옥균의 독특한 매력은 여기에 있었다.
"김 공은 금릉위(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과 어울린다지요? 그들의 생각 또한 그러합니까?"
전부 김옥균의 개화당 동지들이었다. 김옥균은 순간 흠칫했으나, 그의 교우 관계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으므로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저희의 생각은 비슷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김옥균처럼 생각이 급진적이진 않았다. 예컨대 박영효는 왕실의 부마라는데 엄청난 자부심이 있었고, 김옥균이 천한 신분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다.
"다들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생각이 특이합니다 그려."
"나라를 개혁해야 하는데, 그 문제점을 인식하는 게 어찌 위아래가 따로 있겠습니까?"
솔직한 성격의 김옥균은 자신의 속내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사고방식은 혁신적이지만, 속내를 너무 쉽게 드러내는군. 이러니 이용을 당하지. 역시 혁명의 지도자가 될 위인은 못 되는군.'
이선은 갑자기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그래서 은밀히 불평분자들을 모아 파당을 형성하고, 나라를 뒤엎을 모의를 하고 있소이까? 북촌의 명문가 자제들뿐만 아니라 의역(醫譯) 중인들, 무관과 상인, 심지어 승려와 천민들까지 끌어모으고 있다지요."
소수 양반 엘리트들의 쿠데타라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김옥균이 이끌었던 비밀 결사는 중인과 평민, 천민까지 두루 참여한 형태였다.
갑신정변에 참여한 상민이나 천민들이 목숨을 걸고 역모에 가담한 건, 김옥균이 미천한 신분으로 천대받던 그들을 대등한 인간으로 대우하고, '능력에 따른 출세'를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김옥균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외쳤다. 이선의 말은 거짓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를 더 놀라게 했다.
"발뺌할 생각 하지 마시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김 공이 스승으로 여겼던 고(故) 오경석이 북경의 영국 공사관을 찾아가 수교를 제안했던 일, 김 공이 승려 이동인을 일본으로 파견해 영국 외교관과 친분을 맺은 걸 모두 알고 있습니다. 나라에서 금하는 외교를 사사로이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871년, 신미년은 개화파가 은밀한 형태로나마 등장한 시기였다.
대원군의 측근이자 1세대 개화파였던 우의정 박규수는 신미양요의 충격으로 수교론자가 되었고, 역관 오경석이 자발적으로 북경 주재 영국 공사관에 찾아가 수교를 희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조선의 개혁을 희망하는 개화당이 형성되었다. 박규수 사후에는 오경석이, 오경석 사후에는 유홍기가 막후에서 개화당을 지도했다.
박규수의 제자인 김옥균은 개화당의 원년 멤버였고, 동지들을 끌어모으는 일은 바로 그의 몫이었다.
"그, 그걸 어떻게……."
김옥균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개화당이 꾀했던 불법행위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었다.
멋대로 파당을 결성하고 사적으로 외교까지 하다니, 역적이라고 규정해도 할 말이 없었다.
김옥균은 순간 어떻게 이선의 입을 막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선의 배후에 칼을 차고 서 있는 장무영을 보고 이성을 되찾았다.
"설마, 원산에서 역관 백춘배가 모든 걸 다 고하던가요?"
김옥균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보가 누설될 만한 계기라곤 이선이 자신의 측근이자 개화파 동지인 백춘배와 접촉한 것이었다.
"아니요. 오해하지 마시오. 백춘배는 무고하오. 단지 내가 가진 정보가 그만큼 많을 뿐이지."
"……대원군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김옥균은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다. 군란 이후 조직이 탄로 나고, 대원군에게 모든 게 들통난 상황이었다. 김옥균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삐질 거렸다.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개화당 전체의 명운이 달려 있었다.
"대원위께서 아신다면 벌써 그대들을 체포해 갔겠지. 그대들이 저지른 불법 행위가 어디 한둘이오?"
김옥균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이선에게 매달리기로 했다.
"완화군 대감, 저희가 비록 사사로이 파당을 형성하고 외국과 통교하긴 했지만, 이는 역심이 아니라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는 충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디 밝게 헤아려 주십시오!"
김옥균은 칼날 위에 서는 심정으로 이선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작금 조선의 문제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마는, 가장 큰 문제는 양반 세도가의 독점이 오래 이어지면서 재능 있는 이들을 제대로 못 쓰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이를 바로잡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하하하! 내가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청국과 아라사에 갔던 나부터 처벌해야 한다고. 나도 사사로이 외국으로 나가 각국 외교관을 만나 외교를 하였습니다. 심지어 러시아 황제로부터는 특별한 대우까지 받았지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조선을 저버리고 러시아를 택한 것이겠습니까? 모두 조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선은 김옥균을 안심시키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나 역시 신분제를 혁파하고 오직 사람을 그 능력으로 써야 한다는 점에서 공과 생각이 일치합니다. 내가 공에게 보낸 김학우는 함경도 아전 출신이오, 최재형이란 자는 아예 노비의 아들입니다. 하지만 오직 그 재능과 품성을 보고 발탁한 것입니다. 신분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선은 씩 웃었다.
"공도 고려대대의 사열에 대해 들었지요? 이들 역시 따져보면 그 근본은 함경도 출신의 상민입니다. 근데 상놈이 쏘는 총알에 양반은 죽지 않을 것 같습디까?"
김옥균은 이선이 모든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시험하려 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는 본래 임금을 설득해 정당성과 권력을 확보하려 하였지만, 이선의 등장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김옥균은 마침내 자신과 동지들이 꿈꾸는 바를 이뤄 줄 이가 나타났다고 믿게 되었다.
"군 대감께서는 약관의 춘추에도 총명하고 탁월하십니다. 소생의 무리는 세상을 바꿀 의지는 있으나 능력은 없지요. 하오나 대감께서는 의지와 능력 모두를 갖고 계십니다. 부디 저희들을 밝은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
"그 말인즉슨, 그대와 그대가 이끄는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충성하겠다는 뜻이오?"
"저는 오래전부터, 이 나라 조선을 변혁하고 이끌어나갈 뛰어난 지도자를 갈망했나이다. 대원군께서는 일을 단호하게 추진하여 민심의 지지를 얻고 있으나 개화에 대해 완고하십니다. 성상께서는 개화의 필요성을 알고 계시지만 결단력이 부족하십니다."
이제 거리낄 것이 없게 된 김옥균은 속내를 솔직히 밝혔다.
"소인이 살펴보니 나라의 명운이 오직 군 대감께 달렸습니다. 소생의 충성을 받아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