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69화 (69/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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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강화조약(朝日講和條約)

인천 제물포에서 협상을 이어나가던 김홍집, 하나부사는 거듭 의견 차이를 보고 있었다.

실제 역사라면 8월 30일에 일본의 무력시위 끝에 뜻대로 강압적인 조일 강화 조약, 속칭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일본인의 죽음에 대해서 그 어떠한 유감 표명을 할 용의가 있으며, 장례도 후하게 치러줄 것이오. 유족에게 위로금을 전달할 뜻도 있소. 공사와 영사관 직원들의 내지 여행도 허가할 의사가 있소. 또한 인천은 예전 조약에 따라 예정대로 개항할 것이오."

이선의 명을 받은 김홍집은 양보 사항을 언급한 후,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배상금은 단 한 푼도 지급할 수 없고, 일본 공사관의 경비 병력은 더더욱 허용할 수 없소. 이런 부당한 요구를 계속한다면, 더 이상 협상의 여지는 없소이다."

"으음……."

조선의 단호한 태도에 하나부사는 더 이상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8월 30일, 일본 정부의 훈령을 담은 일본 우편선이 제물포에 당도했다.

태정관 지령

조선 정부는 우리나라에 대해서 태만한 책임을 면할 수 없어도, 그 사정은 원래 양해할 것이 있으므로, 우리가 요구하는 바도 역시 공평하고 지당할 필요가 있고 극단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생각건대, 조선 정부가 원래 화(和)를 해치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님은 우리 정부가 믿는 바이므로, 사신은 성의를 가지고 다시 양국이 대국을 보전하고, 장래를 위해 영원하고 선량한 교제를 얻기에 이르라. 그 요구와 이를 보증하는 조약을 합하여 저들 나라의 합당한 대신과 편의대로 교환함으로써 비준을 청하는 전권을 우리 정부가 사신에게 부여하는 바이다.

메이지 15년 8월 27일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별첨. 하나부사 공사만 열람할 것.

정보에 따르면, 지나(중국)는 조선의 신정권을 승인한 듯하다. 미국은 조선과의 조약을 조속히 비준할 의사가 있으며, 러시아 또한 조선과의 수교를 준비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신정권을 승인한다.

이미 규슈 일대에 내려졌던 육군의 동원령은 해제되었다. 조선에 파병된 병력도 새 조약이 체결되는 대로 즉각 철수한다. 오직 평화적인 수단으로 협상하라. 강경론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향후 협상은 대원군과 논의하되, 지나치게 조선과 청국을 자극하지 말라.

완화군 이선은 조선의 정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라.

공사는 조선 정부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하라.

일본의 요구를 최대한 관철하도록 하되, 상황이 불가피하다면 공사의 재량으로 수정해도 좋다.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와 이노우에가 강경과 온건으로 나뉜 상황에서, 당시 베를린에 있던 이토가 주독 러시아 공사관을 방문해 상황을 파악했다.

이토는 전보를 보내 이노우에를 지지했고, '메이지 유신의 흑막' 이와쿠라도 내치 우선의 뜻을 밝힘에 따라 온건론으로 정해진 것이었다.

1882년 9월 9일, 오랜 줄다리기 끝에 조선과 일본 간에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일 강화 조약(朝日講和條約) 및 조일 수교 조규(朝日修交條規)의 속약(續約)

1. 조선국은 변란의 발생과 일본 관리의 죽음에 대해, 일본국에 심심한 유감의 뜻을 보낸다.

2. 일본 관리로서 피해를 본 자는 조선국이 예를 다해 장례를 치른다.

3. 조선국 왕실은 사비로 5만 엔을 지불하여 피해를 받은 일본 관리의 유족 및 부상자에게 위로의 뜻을 전한다.

4. 조선국은 호위 병력을 두어 한성 주재 외국 공사관을 보호한다.

5. 조선국은 상호주의의 원칙에 따라 일본국에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공사관을 신설, 양국 간의 외교가 끊이지 않도록 한다.

수교 조규 속약

1. 인천을 1882년 이내로 개항한다. 양화진을 개시장으로 허가한다.

2. 일본국 공사, 영사 및 직원들은 조선국 예조의 허가를 받아, 내지 여행을 할 수 있다. 이외에는 개항장을 벗어날 수 없다.

3. 1876년 수호 조규에 따른 무관세 협정을, 향후 1년 내로 새로운 무역협정으로 대체한다.

이와 같은 사항을, 향후 2개월 이내로 양국 정부의 비준을 걸쳐 일본 도쿄에서 교환한다.

대조선 개국 기원 491년 7월 27일

대일본 메이지 15년 9월 9일

조선국 전권대신 이선

조선국 전권부관 김홍집

일본국 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열악하기 짝이 없던 상황에서, 사실상 조선이 거둔 외교적 승리였다.

하나부사의 집요한 배상금 요구에도, 형식적인 유감 표시와 후한 장례를 제외하면, 조선이 내준 건 위로금 5만 엔뿐이었다.

'5만 엔이면 청은으로 3만 냥이니, 그냥 내가 사비로 내주지 뭐.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그나마도 국가의 정식 '배상금'이 아니라 조선 왕실, 이선이 개인적으로 내주는 '위로금'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조선은 배상금으로 50만 엔과 위로금 5만 엔을 내야 했고, 이는 빈약한 조선 재정에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공사관 보호를 명목으로 한 일본군의 주둔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단 한 명도, 조선 땅에 주둔할 수 없다.'

제물포 조약으로 공사관 보호를 명목 삼아 일본군의 조선 주둔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시적이라 생각했던 일본군의 주둔은 무려 1945년 8월 해방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준은 청군에게도 적용될 터였다. 청군도 일본과의 조약이 마무리되면 철수하기로 약속했다.

용산의 청군 군영은 일본군 군영으로 계승되었고, 이후에는 미군기지가 되었다. 임오군란은 전례 없는 외국군 주둔의 시작이었다.

임오군란의 국제화를 막은 이선은, 역사에서 감당 못 할 정도로 지속된 외세 개입의 고리를 시작부터 끊어 버리려 했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사죄사'로 가는 수신사를, 상주 공사관 신설로 대체하여 도쿄에 일본 주재 조선 공사관을 개설하기로 했다.

또한 일본이 강화도 조약에서 조선의 무지를 악용해 무관세로 누려왔던 특권을 폐기하고, 새로운 무역협정을 체결하기로 했다.

'관세가 조선의 최고 수입원이 될 터인데, 조선의 최대 무역국인 일본에게 무관세는 절대 용인할 수 없지. 조미 조약에 근거해서 최소 10%는 적용해야 한다.'

조선이 미국과 맺은 조약을, 이선은 계속 선례로 들이밀 생각이었다. 이미 일본뿐만 아니라, 영국도 조영 조약의 관세조건을 못 받아들이겠다고 반발했다.

군란과 무관하게 영국은 이미 조약을 비준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였고, 정권 교체를 핑계로 조약을 얼마든지 뒤엎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뭐, 당연한 수순이지. 아편까지 팔아먹는 영국 해적놈들이 자기한테 불리한 조약을 비준할 리가 있나.'

이선의 다음 외교적 패가 준비되어 있었다.

청을 지렛대로 삼아 일본을 견인한 것처럼, 러시아와 미국을 지렛대로 삼아 영국을 견인할 생각이었다.

제물포 조약 체결 직후, 조선은 청과 일본에 보내는 사신단을 편성했다.

일본 측에는 조약의 비준을 보낼 사절로, 청에는 명목상 주기적인 '사은사(謝恩使)'로 보내는 사신이었다.

"이번 일은 황제에게 아뢰는 거조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 영종정경부사 이선을 정사로 차하하고, 예조참판 김홍집을 부사로, 동부승지 어윤중을 문의관(問議官)으로 차하한다."

"삼가 어명을 받드나이다."

사은사는 명목이고, 이선은 외교적 마무리를 짓고 화급한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국행을 스스로 택한 것이었다.

"이번에 일본 공사와 의논한 조약 중에 전권대신을 파송한다는 말이 있다. 사신의 호칭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대사로 칭하여 금릉위 박영효(朴泳孝)를 차하한다. 전권부사 겸 수신부사에 홍문관 교리 김옥균을, 종사관에 규장각 대교 서광범을 차하한다."

"삼가 어명을 받드나이다."

박영효는 조선 최초로 '특명 전권 공사(envoy extraordinary and minister plenipotentiary)'라는 직함을 사용하게 되었다.

현재 조선과 대등하게 국교를 체결하고 비준하여 외교관을 파견한 나라는 일본뿐이므로, 특명 전권 공사급 외교관을 파견할 대상도 아직은 일본만이었다.

"호군 김윤식은 영선사의 임무를 다시 수행하여, 천진에 유학 가 있는 학도들을 관리하고 서양의 기계와 무기를 수입하는 걸 돕도록 하라."

"삼가 어명을 받드나이다."

명목상 종주국인 청에는 '상관(商館)'의 형태로 천진에 영사관을 설치하기로 했다. 북경이 아니라 천진으로 결정한 것은, 실질적으로 외교 정책을 총괄하는 북양 대신 이홍장의 관저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사은사와 수신사를 계기로, 개화파는 온건 시무파와 급진 변법파가 확연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당장 화급한 문제인 차관 도입과 군대 편성의 일로 각각 청과 일본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 대립은 갑신정변까지 이어지게 된다.

일단 이선은 기무처에서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형태로 이들의 갈등 요인을 미리 봉합시키고, 외교 정책의 단일화를 추진했다.

"금릉위 대감. 조선의 첫 전권 공사로 임명된 걸 축하합니다."

"이게 다 완화군 대감께서 배려해 주신 덕이지요."

철종의 부마로, 왕실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박영효는 왕의 장자인 이선에게 친밀감을 보였다.

"과연 금릉위와 고균이 정사와 부사로 임명된 건 내가 손을 쓴 덕입니다. 내가 경들을 추천한 이유를 알겠습니까?"

"개화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본과 협상을 하기 위함입니까?"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은 모두 개화당의 일원으로, 이선에게 충성을 맹세한 바 있었다.

"물론 내가 그만큼 경들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들의 행동을 관리하기 위함도 있지요. 일본에서 외교를 하는 건 좋은데, 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직 국가의 이익에만 충실할 것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개화당은 이때 일본을 방문해서 차관 도입을 논의하고, 일본과 서양의 지원을 요청한다. 이는 개화당이 정권을 잡기 위한 획책이었다.

'나를 새로운 지도자로 선택한 이상 그럴 일은 없겠지만, 경거망동 못 하게 막아야지.'

"그리고 혹여 성상께서 경들에게 밀명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김옥균이 은밀한 어조로 답했다.

"예, 공식 명령은 아니나, 사적인 밀명이었습니다."

"아마 차관을 구해 오라는 것이었겠지요?"

"역시 군 대감께서는 모르는 바가 없으시군요. 일본이나 서양으로부터 차관을 구하되, 정부가 아니라 민간에서 공채해도 좋다 하셨습니다."

김옥균의 감탄에 이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국가의 재정이 빈곤한 건 누구나 다 고민이니까. 성상의 헤아림을 짐작할 수 있지요."

'물론 다른 요인도 있겠지.'

모든 주도권을 대원군과 기무처에 빼앗긴 임금은, 김옥균과 박영효로 대표되는 신진 개화당을 끌어들여 새로운 친위 세력을 형성하려 했다.

개화당이 임금의 신임을 얻어 권력의 중심부로 진출하는 계기였다.

'하지만 이를 어쩐다? 개화당은 이미 나를 섬기기로 했거늘.'

개화당은 이선을 지도자로 선택했고, 임금이 내린 밀명도 감추지 않고 고스란히 이선에게 보고했다. 임금은 고립무원이었다.

"차관을 공채하는 건 좋은데, 지금으로선 서양과의 조약을 비준하고 일본과의 통상협정을 타결해서 관세부터 확실히 해야 합니다. 난 청국으로 가서 해관을 설치하고 관리할 서양인 전문가를 초빙할 예정입니다. 이를 시작으로 당분간 서양 고문을 재정, 외교, 군사 영역에서 쓸 생각입니다."

"서양인 전문가 초빙이라. 좋은 생각입니다만 대원군께서 받아들이실까요?"

"이미 허락을 받았습니다."

서양에 대해 우호적인 임금은 물론이고, 대원군도 의외로 선선히 허락했다.

"역시 군 대감의 혜안은 놀랍습니다. 근데 당장 급한 재정 문제는 어찌 해결합니까? 급히 차관이라도 도입하지 않으면……."

"어차피 관세를 담보로 안 걸면 차관을 빌려줄 나라도 없을 겁니다. 아니면 각종 이권을 담보로 걸라고 할 텐데 이건 내가 거절할 생각이고. 일단 급한 불은 내가 끌 생각이니, 경들은 차관 걱정하지 말고 내 서한을 전달하십시오."

이선은 준비해 두었던 편지 세 통을 박영효에게 전달했다.

"하나는 일본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하나는 원로원 의관 가쓰 가이슈에게, 하나는 신임 주청 공사 에노모토 다케아키에게."

"이들과 친교가 있으십니까, 군 대감?"

"없으니까 서한으로 전달하는 것 아니겠소."

이선은 웃으면서 답했다. 이들 3인은 상대적 온건파인 '내치파'에 속하는 인물로, '정한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또한 일본 황실과 메이지와의 관계도 가까웠다.

이들은 외교적 해결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이들이 군사적 방법론을 거부하는 건, 물론 평화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힘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서였다.

'적어도 현시점까지는. 아마 군부 강경파를 주저앉힌 것도 이들일 터. 일단 일본의 군사적 모험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은 일치하지.'

최악의 관계에서도 물밑 접촉은 있어야 했다.

이선은 강경파에게는 단호하게, 온건파와는 협상을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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