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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왕
"어서 오십시오, 각하. 미합중국 국무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사절단의 우선 과제는 근대적 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는 유능한 교관과 고문관의 파견이었다. 그건 이선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유능한 서양인 고문, 특히 해외 이권에 거의 초연해 보이는 듯한 미국 국적의 고문들은 조선이 원하는 인재상이었다.
'동양 정세에 개입하지 않는 나라 출신, 즉 미국이나 독일인 고문관이 열강의 의심을 덜 받겠지.'
"조선 사절단은 미국에 머물면서, 더없는 환대를 받으며 기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귀국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선은 매우 호의적으로 서두를 뗐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대통령께서 명하신 바대로, 조선 사절단이 미국에서 좋은 추억을 갖고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서양 문명의 발전된 모습을 보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공감했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개혁이 필요합니다. 미국처럼 부강한 국가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많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이선의 말에 프릴링하이젠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서양의 부와 강력함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것. 보빙사를 미국에 초대한 중요한 이유였다.
"앞으로 귀국의 개혁에 미합중국이 도울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국무장관은 외교적으로 한 말이었지만, 이선은 놓치지 않았다.
"역시 미국은 공명정대한 나라답군요. 그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근대식 학교를 만들고 이끌어나갈 미국인 교사와, 행정에 전문적인 조언을 맡을 고문관, 군대를 훈련시킬 군사교관의 파견이 필요합니다."
"음, 그렇군요."
미국 정부도 조선에 고문관을 파견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용의가 있었기에, 국무장관은 잠시 생각한 후에 답했다.
"미국인 교사나 고문관 파견은 귀국 정부에서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만 군사교관 파견은 타국의 오해를 살 여지가 있으니만큼, 좀 더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선도 거기까진 바라지 않았다.
'군사교관은 역시 독일에서 데려오는 게 제일 낫지.'
"그렇다면 영어와 각종 근대학문을 가르칠 교사와 각종 행정개혁을 도울 고문관 파견을 정식으로 요청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미합중국 정부는 귀국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국무장관으로부터 긍정적인 검토를 해보겠다는 답변을 받은 후, 이선은 다음 목표를 설정했다.
"아시겠지만, 개혁을 하려면 많은 자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조선은 정치적 변혁을 겪은 직후라, 재정이 많이 열악합니다. 혹시 귀국 정부에서 차관을 구하거나, 자본 시장에서 공채를 구할 수 있을지요?"
"으음……."
프릴링하우젠은 고문관 파견에 긍정적인 의사를 보인 것과 달리, 차관 제공에는 난색을 보였다.
"차관은 본인의 소관이 아닙니다. 일단 대통령께 보고하고, 재무부와 검토를 한 후에 답변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아직 일정은 여유로우니만큼, 천천히 답을 주십시오. 그럼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미국 정부의 답변을 기다리는 사이, 이선은 미국실업계에 활로를 뚫어보려고 했다.
자본가, 특히 뉴욕과 동부의 자본가들은 미국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들이 조선 투자에 긍정적이라면 공채를 구할 수 있었다.
사절단이 각지를 시찰하면서 뉴욕의 거물 실업가들이 많이 찾아왔고, 특히 '프레이저&컴퍼니'의 사장 에버렛 프레이저(Everett Frazer)는 사절단의 가이드를 자처하며 매일 같이 밀착했다.
중국 및 일본과 무역을 하는 프레이저는, 새로운 시장인 조선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프레이저는 개인적으로도 돈을 써 가며 사절단을 칙사 대접했다.
"원하신다면, 제가 조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하, 그거 고마운 말이군요."
"철도, 전기, 전신, 무엇이든 조선에 도입하고 싶다면 제가 알선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상인이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 리는 없었다. 이선은 웃음을 거두었다.
"그 대가로 선생은 조선 정부의 중개인이 되어 각종 혜택을 누리고?"
"그건 각하의 호의에 달린 일 아니겠습니까."
이선은 표정을 풀었다.
"정직한 중개인이라면 믿고 맡겨 볼 만하지요."
"저를 믿어 주십시오. 다년간의 동아시아 무역을 통해 신뢰를 쌓아오고, 동양에 대한 이해도 높다고 자부합니다."
이선도 프레이저의 평판이 괜찮다는 걸 조사해서 알고 있었다.
"좋습니다. 철도, 전신, 전기, 모두 중요합니다. 문제는 자본이지요. 이 모든 건 자본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미국에서 투자를 이끌어보려고 하는데, 선생이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이선은 조선 공사 푸트와 일본 공사 빙험이 쓴 소개장을 보여주었다.
"이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현지에 주재하는 공사의 소개장이니, 믿을만하다는 보증은 될 겁니다."
"가능하면 미국 산업계의 거물들을 만나보고 싶은데."
"누굴 원하십니까?"
"많지요. 예를 들어 석유의 록펠러, 철강의 카네기, 자본의 J.P.모건, 전기의 에디슨……."
이선이 말한 건 정말로 전국 단위의 거물급 인사들이라, 뉴욕의 거물 실업가인 프레이저도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일단 에디슨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굉장히 모험을 즐기는 사업가고, 실제로 그가 조선에 관해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호오, 그래요?"
"뮤지컬 엑셀시오르를 기억하시지요? 그 뮤지컬의 전기 시설을 담당한 게 바로 에디슨입니다. 조선 사절단이 뮤지컬을 굉장히 감명 깊게 보았다는 기사를 읽고, 에디슨도 동양 시장에 진출 가능한지 궁금해한다더군요."
'내 그럴 줄 알았다. 어쩐지 전기 회사 PPL 같더니만.'
이선은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번 만나 보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자리를 주선해보지요."
에디슨은 바로 이 무렵 미국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1879년 백열전구 시연에 성공하고, 1880년에 특허를 받으면서 에디슨 기계 공장(Edison Machine Works)의 주가는 한창 상승 중이었다.
사실 발명가라기보다는 사업가적 기질이 더 강한 에디슨은 새로운 동양 시장의 등장에 굉장한 흥미를 갖고 있었다.
"명성이 자자한 조선의 왕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는 에디슨 선생을 뵙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머나먼 조선에서도 저를 알아준다니 더욱 영광입니다."
'발명왕으로 후대의 한국까지 명성이 자자하지. 위인전으로 보던 에디슨을 직접 보니 기분이 미묘하군.'
워낙 에디슨의 업적이 과장되어 한국에 소개되었기에, 이선우의 어린 시절에도 에디슨 위인전은 필독서였다.
"그만큼 전기가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조선에서 전기등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미국에서 여러분은 전기등이 가스나 등유보다 더 싸고 더 나은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에디슨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20세기는 전기의 시대라고 믿는 이선으로선 확신을 갖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실험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도달한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이선의 말처럼, 단순히 전기뿐만 아니라 조선이 향후 나아가야 할 길은 '서양 문명이 도달한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왕자께서는 정말로 현명하십니다. 제가 전구를 개발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실험을 하다 실패를 겪었지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니,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실패를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전기부터 시작하지요. 선생은 조선에서 전기 사업을 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까?"
이선이 단도직입으로 물으니, 에디슨도 직설적으로 답했다.
"물론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당장은 어렵겠고, 조선으로 돌아간 후에 정식으로 초빙을 하지요. 일단 궁궐부터 전등을 설치해야 할 듯합니다."
꼭 국가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밤에 일하는 걸 좋아하는 이선으로선 전기가 꼭 필요했다.
"그렇다면 필요한 설비와 전문가를 파견해 드리겠습니다."
전문가라는 말에, 이선은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혹시 귀사의 엔지니어 중에, 크로아티아계 오스트리아인이 있습니까?"
에디슨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엔지니어라면 제가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 워낙 다양한 사람이 있습니다만, 크로아티아인은 없습니다."
"아, 그런가요? 이름은 니콜라 테슬라라고 하는데."
에디슨은 더 고민해보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비서에게 지사의 직원 명부를 가져오라고 했다.
"우리 회사는 유럽에도 지사가 있습니다. 파리에 있지요. 거기엔 다수의 유럽인 기사를 고용하고 있습니다."
에디슨은 T 항목에서 찾는 데 성공했다.
"Tesla, Nikola. 있군요. 말씀하신 대로 오스트리아 제국령 크로아티아 출신입니다."
"호오, 지금 파리에 있군요."
불세출의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는, 1882년부터 에디슨 회사의 유럽 지사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테슬라는 1884년 6월 미국으로 이민을 와 에디슨과 함께 일하게 된다.
"그런데 왕자께서는 대체 어떻게 이 사람을 아십니까?"
에디슨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법한 것이 테슬라는 아직 무명의 전기 기술자였다.
"아, 이야기하자면 긴데. 조선에 입국한 독일인 기술자의 지인이라더군요. 오스트리아에서 함께 공부했다던가? 내가 유럽에 가는 길이라고 하니 안부를 전해달라는군요. 귀사에서 일한다고 들어서 물었습니다."
물론 그럴 사실 같은 건 없지만, 에디슨은 그럴 법한 일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테슬라는 파리 지사에서 근무 중인 게 맞습니다."
"이왕이면 엔지니어를 파견할 때, 이 테슬라라는 사람을 초빙해도 좋겠군요. 마침 조선에 친구가 있으니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음, 그렇다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왕자께서 파리에 가실 때 직접 한번 만나 보십시오. 계약이 성사되면 정식으로 파견하겠습니다."
아직까지 테슬라의 능력을 모르는 에디슨은 흔쾌히 수락했다.
갑작스러운 수요의 폭증으로 본사의 엔지니어도 부족한 상황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지사의 직원을 데려가고 싶다니 에디슨으로선 나쁘지 않다 싶었다. 에디슨은 조선 왕자의 환심을 사는 게 더 중요했다.
이선은 에디슨이 사업적 성공을 갈망한다는 걸 간파하고, 원하는 바를 던져 주었다.
"향후 10년간, 조선에서의 전기 사업에 대한 전권을 귀사에 맡기고 싶습니다. 궁궐부터 시작해서, 관청과 학교, 일반 민가에 이르기까지. 귀사는 1500만 인구가 사는 새로운 시장을 독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에디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사를 표했다. 아직 조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그로선 1천 5백만의 인구를 가진 시장을 독점한다니 기쁠 따름이었다.
"여기엔 조건이 있습니다. 조선에 국립 기술학교를 세울 생각인데, 향후 10년간 조선인 기술자를 양성해서 기술을 이전할 것."
"음, 그건……."
에디슨 자신도 다른 이의 기술을 가져다 쓴 전적이 많아서, 기술 이전에 난감해 했다. 그러자 이선이 손을 내저었다.
"물론 핵심 기술을 이전하라는 게 아니지요. 관리에 필요한 엔지니어를 양성하면 됩니다. 영원히 미국에서 데려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아, 그런 의미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려야지요."
에디슨은 표정을 풀었다.
"자, 그러면 문제는 자금인데."
"네, 좋은 조건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전기를 비롯해서 각종 근대화 사업을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한데, 문제는 조선이 지금 매우 가난합니다. 내가 여기에 온 중요한 목적이 바로 미국 정부에 차관을 요청하고, 자본 시장에서 공채를 구하는 것입니다."
한껏 기대가 부풀어 오른 에디슨은 내심 실망스러웠다.
"물론 귀국의 사정을 고려해 저렴하게 해드릴 순 있습니다만……."
"아니, 그런 말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최고의 대우를 해야지요. 내 말은 가격을 깎아달라는 게 아니라, 투자를 알선해달라는 겁니다."
"저는 투자를 받아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이지, 투자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 요청에 쉽게 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시금 난색을 드러는 에디슨을 향해, 이선은 순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귀사는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대자본가의 투자를 받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을 제게 소개해주십시오."
바로 이선이 에디슨을 방문한 또 다른 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