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83화 (8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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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금시대(鍍金時代)

이선의 제안은 그랜트를 흡족하게 했다.

"아주 좋소. 정말로 미국과 조선, 우리 모두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이군."

그랜트는 만족감을 표하고, 술잔을 들었다. 애주가를 넘어 알코올 중독을 의심할 정도로 그랜트는 언제나 술을 가까이했다.

"함께 축배를 들고 싶은데, 왕자는 아직 미성년이라서 못 드는 게 아쉽군요. 사절단의 다른 분들은 함께 마십시다."

사절단에게는 술이 제공되는데, 이선에게는 홍차가 주어졌다. 이선은 이의를 제기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16세인데, 조선에서는 이 나이부터 성인으로 쳐줍니다. 그러니 마셔도 됩니다."

본래 이선우는 상당한 애주가였는데, 이선의 신분으로선 술을 마시고 싶어도 나이와 체면 때문에 못 마셨다. 꾹꾹 참아오던 이선의 인내는, 자신만 술자리에서 배제되자 마침내 한계에 달했다.

"오, 그래요? 그거 잘됐구만. 그럼 마십시다."

그랜트는 이선의 잔에 직접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자, 미국과 조선의 우호를 위하여, 건배!"

"건배!"

술이 들어가고 취기가 오르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조선인 중에 영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선뿐이라, 자연스럽게 그랜트와 이선이 주로 대화를 나누었다.

"조선의 왕자와 사절단이 내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실 줄이야. 12년 전에 미국과 조선이 전쟁을 치를 때만 해도, 누가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했겠소?"

"이게 모두 신의 섭리겠지요."

이선의 말은 그랜트를 놀라게 했다.

"조선은 기독교 금지국이라고 들었소만."

"신이라는 게 꼭 기독교의 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컨대 보편적인 역사의 신을 말한 것이지요."

그랜트는 껄껄 웃었다.

"하하, 그렇구려. 그러고 보니 트웨인 씨는 우리의 종교에 꽤나 부정적이었지……."

"기독교 신앙 자체에 반대한다기보단, 기독교의 이름을 팔아 세계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비난하는 것이지요. 제국주의자들 말입니다."

트웨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해명했다. 미국은 기독교가 강한 나라라, 대놓고 무신론자를 자처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조선도 서양과 수교를 한 이상, 더는 기독교를 금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부여해야지요. 선교사의 입국도 보장할 예정입니다. 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는 것도 허용되겠지요."

조선에서 불과 10년 전까지 기독교 탄압이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선은 대단히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다. 미국과 프랑스가 수교통상의 조건으로 종교의 자유를 내걸고 있어서, 외교담당자인 이선은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다만 프랑스의 전쟁에서 이용되었듯이, 종교 문제가 전쟁의 명분이 돼서는 안 됩니다. 동양인들이 서양의 기독교를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는, 트웨인 씨의 비판대로 종교 그 자체보다는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이 될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이를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해합니다. 선교사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하게 해야지요. 그리고 미합중국 정부는 종교보다 통상무역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가 논의한 것처럼……."

"예,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을 좋아하는 겁니다."

"나도 조선과 왕자를 좋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랜트와 이선은 술잔을 부딪쳤다. 완전히 취기가 오른 그랜트는 마음에 담은 말을 술술 풀어냈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본래 우직한 군인 출신으로, 솔직한 성격에다 타인을 잘 믿는 성격의 그랜트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조선이 자주독립을 위해 부국강병을 이루려고 하는 건 아주 좋습니다. 강한 군대가 국가를 지켜낼 수 있지요. 미국만 봐도, 연방군이 약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남부 반란군 뜻대로 됐겠지. 연방은 무너졌을 겁니다."

"미국을 지켜낼 수 있었던 건 북부의 산업과 강한 군대, 링컨 대통령의 지도력과 연방의 단결 덕분이었지요. 부국강병, 뛰어난 지도자, 국민적 단결. 조선도 그렇게 나아가고 싶습니다."

"역시 젊어서 그런가, 포부가 크고 훌륭하군. 좋습니다. 다만……."

그랜트는 의외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전쟁은 하지 마시오. 나 그랜트나, 독일의 비스마르크 같은 사람들은 전쟁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이지. 하지만 공통으로 일치하는 게 있었소. 전쟁은 지옥이라는 것."

그랜트는 격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젊었을 때는 전쟁이 낭만적으로 느껴지지. 그래서 군인이 되는 거고. 하지만 무수히 많은 청년들이 죽어가는 걸 보면 절대로 전쟁이라는 걸 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될 거요. 난 분명히 승장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청년들의 시체 위에서 얻은 결과요. 다 부질없는 명성이지."

그랜트는 술병을 다 털어 넣었다.

"내가 왜 술을 못 끊는 줄 아시오? 원래 술꾼이기도 했지만, 전쟁의 기억을 술 마실 땐 잠시 잊을 수 있거든. 전직 대통령으로 각국을 방문했을 때, 국빈 예우한다고 군대의 사열 받는 게 내겐 보통 정신적 고문이 아니었소."

20세기가 전쟁으로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알고 있기에, 이선 역시 전쟁은 피하고 싶었다.

"각하께서 얼마나 심적 고민이 크셨을지 저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조선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이고, 결코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단지 조국을 침략하려는 무리에는 단호히 맞서 싸워야지요. 저는 이 격언에 공감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그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나 같은 군인이 필요한 법이지. 가장 열렬히 신식 군대의 위용을 보여주려는 건 단연 일본이더군. 내 생각에, 일본은 언젠가 전쟁을 하고 싶어 하오. 단지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오."

바로 그게 조선이 강병을 이루려는 이유였다.

"조선이 군대를 키우려는 건, 침략성을 드러내는 일본에 대한 경계가 가장 큰 요인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바랍니다."

"알겠소. 당국자들에게 주지시키도록 하리다. 일단 우리의 사업부터 먼저 번영시키고, 하하!"

"예, 좋습니다. 우리 사업의 번창을 위하여!"

이선과 그랜트는 거듭 술잔을 부딪쳤다.

다음 날, 호텔로 들어온 이선은 숙취로 엄청난 고생을 했다.

'간만에, 아니 이선으로는 처음 과음했더니만 죽겠구만…….'

이선은 온천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한가한 여유는 없었다.

이선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월스트리트에서 증권사를 하는 그랜트의 아들 율리시스 주니어와 손을 잡고 자본가들을 상대로 공채를 모으기 시작했다.

"미지의 나라, 조선에 처음 투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금은과 온갖 지하자원이 풍부한 동양의 엘도라도, 조선이 여러분에게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웅, 율리시스 그랜트와 조선에서 온 왕자님이 이를 보증합니다!"

율리시스 주니어와 동업자 퍼디낸드 워드는 그랜트의 이름을 내세워 자본을 모으기 시작했다.

워낙 국민적 영웅으로 소문이 자자한 그랜트의 이름과, 조선에서 온 왕자 이선의 이름이 결합하자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그 무렵 이류 타블로이드 언론사들은 이선의 일거수일투족을 과장해서 보도하고 있었다.

조선이라는 미지의 나라, 공화국인 미국에서 찾을 수 없는 왕자라는 신분, 잘생긴 용모에 의젓한 태도, 유창한 영어와 익숙한 서양식 예절, 미국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가 결합하여 이선이라는 인물에 상당한 환상이 씌어져 있었다.

이선의 이름은 미국에서 'Lee Sun'으로 표기되었는데, 성이 앞으로 오는 동양 문화를 모르는 이들은 '프린스 리'라고 호칭했다.

이선이 이를 바로 잡아 선이 이름이라는 걸 알려주자, 호칭이 변경되었다. 공교롭게도 Sun에는 태양의 의미가 있었으므로 말장난이 시작되었다.

- 프린스 선! 동양에서 온 고귀한 태양의 후예!

- 프린스 선샤인! 그가 미소를 지을 때마다 햇빛이 깃든다!

- 본지 단독 특종 보도! 어느새 뉴욕 생활에 익숙해진 왕자. 어딜 가나 환대를 받는 프린스 선. 뉴요커를 열망하는 동양의 왕자, 그의 뉴욕 생활을 을 따라가 보자.

'미친, 어느 나라나 타블로이드 수준은……. 손발 오그라든다.'

이선은 머리기사만 보고도 혀를 찼지만, 굳이 이런 관심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 프린스 선, 미국의 여성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다! 미국 여인에게 사랑에 빠진 동양의 왕자?

- 조선의 차기 왕자비는 미국 여인? 대체 어떤 행운의 여인이 조선의 옥좌에 오를 것인가?

"야, 이건 내가 아니라 서광범이 한 말이잖아? 그리고 뭔 옥좌 타령이야? 왜곡 보도는 정정 안 되나?"

이선은 과도한 관심을 넘어 왜곡 보도까지 이어지자 상당한 부담감을 느꼈다. 미국 언론에서는 대놓고 이선을 조선의 미래를 책임질 차기 왕위 계승자라고 소개했다.

이선은 어디까지나 계승권은 왕세자에게 있고, 자신은 왕명을 받은 전권대사로 왔음을 늘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를 차기 군주로 인식해서 예우했다.

'조선인이 영어를 못 해서 다행이다.'

누군가 미국 언론이 쏟아내는 기사를 번역해서 조선에 소개된다면, 정치적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이선은 자신이 조선의 실권자임을 감출 생각은 없었지만, 유교적 명분론에 충실한 조선의 정치 풍조를 참작하여 왕좌에 대한 욕심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그 무렵 이선에 대한 명성은 전미에 널리 퍼졌고, 최소한 워싱턴과 뉴욕에선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랜트 본인도 조선 채권에 10만 달러를 투자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선 채권이 무척 싼 값에 나왔더군. 투자하면 나중에 수십 배의 이익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데."

"너무 모험 아닌가? 여기서 조선에 대해 아는 사람 누구 있어?"

"뭐, 그 왕자가 워낙 유명하잖아."

"왕자가 유명한 거랑 투자처로 유망한 거랑 무슨 상관이야?"

"아니, 믿을 만한 정보라는 거지. 조선에 금이 그리 많다던데. 요새 금 보유고가 떨어져서 금값이 천정부지야. 조선의 금을 확보해서 유럽에다 팔면 일확천금의 기회 아닌가?"

"그건 솔깃하군. 그럼 정말 새로운 엘도라도인데. 하지만 엘도라도는 영원히 찾을 수 없으니까 엘도라지."

"모르는 소리. 그랜드 대통령도 10만 달러나 투자했다던데."

"그래? 그럼 확실한 정보인가 보군. 요새 불황이라 수익이 보증되는 곳도 별로 없는데 한번 투자해 볼까?"

"맞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지!"

'국제적 신용도가 0에 수렴하는 조선에 대해 어떻게 믿고 투자하려는 걸까……. 참, 사람은 알 수가 없어.'

갑작스러운 조선 투자 열풍에, 이를 조장한 이선 본인이 더 놀랐다.

때는 바야흐로 트웨인이 명명한 도금시대(鍍金時代, Gilded Age).

남북전쟁 직후 1865년부터, 1890년대까지 약 30년의 기간에 이르는 시기.

미국의 산업과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하여 경제성장이 절정에 오른 시대이다.

시대적 기회를 잡은 자들은 엄청난 성공을 질주했다. 후대에까지 명성이 자자한 전설적인 부자들이 바로 이때 등장했다.

석유왕 존 록펠러,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철도왕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 광산왕 마이어 구겐하임, 전기왕 토머스 에디슨, 자본왕 존 피어먼트 모건.

독점기업가의 시대, 이른바 '강도 남작(robber baron)'들의 시대였다.

독점기업으로 부를 이룬 이들은 극소수였지만, 수많은 이들이 성공을 열망했다.

발전의 뒷면에는 엄청난 거품이 끼어 있었고, 투기가 빈번히 발생했다. 조선에 대한 투자 열풍도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한창 조선에 대한 투자 열풍을 불고 있는 상황에서, 존 피어먼트 모건이 에디슨을 통해 이선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보내왔다.

"모건 씨가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왕자님의 회동 희망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거 잘됐군요. 언제 어디서 보면 된다던가요?"

"장소와 시각은 모건 씨가 정할 것이고……. 다만 수행원 없이 왕자님 혼자서만 오시라더군요."

"의전상 문제는 그렇다 쳐도, 경호상의 문제가 있어서 나는 수행원 없이 다니기가 어려운데. 그럼 에디슨 씨가 함께 갑니까?"

"왕자님의 안전은 모건 씨가 완전히 보장하셨습니다. 저는 중개인 역할만 합니다. 모건 씨의 말을 전하는 것뿐이니, 이해해주십시오."

'전직 대통령인 그랜트보다 더 빡빡하게 구는군. 이 시대의 미국은 정치인들 위에서 자본가가 군림한다더니, 소문이 틀리지 않는군.'

이선은 모건의 일방적인 요구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도 흥미가 동했으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뭐, 좋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 드리지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만나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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