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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금융 황제, 존 피어먼트 모건과의 회동은 모처에서 예정되었다.
19세기 뉴욕 기준에선 가장 높은 건물이라 할 수 있는 마천루의 최상층이었다.
21세기에 세계적인 마천루에 올라섰던 경험이 있는 이선에게 그저 하품이 나올 높이였지만, 그래도 뉴욕 전경을 조망하기에 좋았다.
"어서 오십시오."
깐깐하게 생긴 중년의 사내가 이선을 맞이했다. 바로 그가 J.P 모건이었다.
"반갑습니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모건 회장님을 만나서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화제의 조선 왕자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지요."
이선과 모건은 호의적인 태도로 첫인사를 나눴지만, 모건은 그 순간부터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었다.
"에디슨 씨로부터 이야기 들었습니다. 내가 조선에 투자하길 원하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는 가능성 없는 사안엔 투자하지 않습니다."
딱 잘라서 말하는 모건에게, 이선은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반대로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은 모험적인 투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지 않았습니까? 가치가 종이 수준으로 떨어진, 패전 직후의 프랑스 국채를 헐값에 사들여 엄청난 이익을 남겼지요. 당장은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프랑스의 잠재력을 봤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 직후,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 프랑스가 극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 파산 지경에 놓이자 외국 자본가들도 서둘러 철수했고, 프랑스 국채는 5분의 1 수준의 헐값에 판매되었다.
모건은 바로 이때 오히려 프랑스 국채를 대거 사들였고, 예상보다 빠르게 프랑스는 배상금을 해결하고 경제가 정상 궤도로 올라왔다. 파리는 다시 유럽 금융의 중심지로 돌아왔고, 그 결과 모건은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건 프랑스니까 그렇지요. 예나 지금이나 프랑스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열강입니다. 특히 유럽의 곡창이라고 할 정도로, 농업 생산량이 압도적이죠. 패전 직후에도 잉여 생산량을 해외에 수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나라는 단기간 흔들릴 수 있어도,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프랑스에 투자한 거지요."
모건은 여전히 냉정했다.
"그에 비하면 조선은? 미지의 나라지요. 미지의 나라라는 걸 내세워 오히려 투자를 끌어모으고 있고,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정부의 평가가 더 믿을만한 것 같습니다. 국무부의 차관 제공을 재무부가 거절했지요."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가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모르는 말씀. 작년도 미국 정부는 1억 달러의 재정 흑자를 봤습니다. 그럼 왜 거절했을까요? 재무부가 거절한 이유야, 당연히 조선에 대한 경제적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갚을 능력이 되는지 믿음이 없지요. 근데 그런 조언은 누가 했을까요? 바로 은행가들입니다."
1883년 당시에 미국은 연방은행이나 중앙은행이 없었다. 당시 미국은 대형은행들이 재무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일정 부분 보유하고, 이를 기준으로 신용공여가 이뤄졌다. 미국 정부 역시 민간 은행을 대상으로 세수를 예탁하고 인출하고 돈을 빌리는 구조였다.
미국 정부가 차관을 제공하려면 결국 대형 은행들과 차입 및 보증을 협상해야 하는데, 은행들이 너무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하여 거절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리를 빌려 제가 설득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저는 자본주의 경제에 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경제사 공부는 간략히 했습니다. 1873년 오스트리아 주식시장의 붕괴 이래 세계 자본주의는 장기불황이지요."
1873년, 향후 대불황(Great Depression)으로 불리게 될 장기 불황이 시작되었다. 1860년대의 세계적인 투자 과열 거품은 1870년대에 꺼져버렸다.
1873년 빈 주식시장의 붕괴를 시작으로, 유럽 각국에 연쇄적으로 도산이 확산하였고,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쳐 세계 각국이 장기 불황의 늪에 빠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미국에서는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회장님 같은 대형 자본가가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술의 혁신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회장님이 투자한 에디슨의 전기지요. 전기는 분명 새로운 세기를 대표하는 핵심 발명품이 될 겁니다."
역설적으로 대불황의 기간, 2차 산업혁명이 진행되었다. 화학·전기·석유·철강 산업이 기술의 혁신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자본 집중과 기업 합동이 이뤄졌고, 미국에서는 자본과 철도의 모건과 철강의 카네기, 석유의 록펠러로 대표되는 '트러스트', 즉 독점기업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모건은 대불황의 명백한 성공자, 시대의 총아였다.
"멀리 동양에서 온 어린 왕자가, 세계 경제에 관해 그 정도로 알고 있다면 분명 대단한 일입니다. 근데 그게 왜 조선으로의 투자로 이어져야 합니까?"
"여기서부터가 중요한 포인트지요."
이선은 미리 준비해온 설명을 이어나갔다.
"지금 10년 넘게 디플레이션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장기 불황의 여파이기도 하지만, 1870년대 이후 열강이 모두 금본위제로 전환한 것과 연관이 있지요. 지금 각국의 금 보유고가 고갈되는 위기입니다. 금 보유고 부족이 디플레이션을 낳고, 디플레이션이 경기 불황을 낳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죠. 이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면 미국도 근시일 내로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즉, 금을 많이 보유한 자가 앞으로의 시장에서 유리해질 겁니다."
실제로, 1882년부터 미국은 디플레이션에 따른 공황의 위기를 우려하고 있었다. 유럽 각국이 미국으로부터 금을 대거 사들였고, 1882년부터 2년 사이에 1억 5000만 달러 상당의 금이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금 보유고의 부족은 만성적인 공황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흥미로운 분석인데, 그럼 왕자께서 하는 이야기의 전제 조건은 당연히 조선에 금광이 많다는 결론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조선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금광이 많이 있습니다."
이선은 열심히 약을 팔기 시작했지만, 모건은 여전히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그걸 이유로 투자가들을 끌어모은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왜 여태 개발하지 않은 금광이 많은 겁니까?"
"당연히 기술 미비와 화폐경제의 미발달과 같은 이유와 관련되어 있지요. 엄밀히 말하면, 지금까지 금광을 개발할 이유가 딱히 없었습니다. 여기엔 역사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역사적인 이유?"
"조선과 중국은 사대-조공 관계에 있지요. 약 400년 전 조선 건국 초에, 중국은 조선에 금과 은의 조공을 요구했습니다. 조선은 당연히 조공을 바치기 싫었으므로, 금은이 없다고 중국에 알렸습니다. 중국은 조공품에서 금은을 빼줬지요. 그 이후로 조선의 금광과 은광 개발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선은 모건이나 서양인이 당연히 조선이나 동양의 역사에 대해 무지할 거로 생각하고, 역사적 사실에 양념을 적당히 쳤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과 수교통상을 시작한 이상, 국부의 확보는 필연입니다. 제일 먼저 필요한 건 금광 개발입니다. 조선 북부에는 매장량이 엄청난 금광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아직 기술이 부족해 발전이 지체되어 있습니다. 미국은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를 겪으면서 금광 기술이 상당히 발전했다고 들었습니다. 조선의 금과 미국의 기술. 양국이 협력하면 엄청나게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이선이 예를 든 건 평안도의 운산 금광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미국 회사에 채굴권이 넘어간 바로 그 금광이었다.
이선은 이번에도 미국 자본의 힘을 빌릴 생각이었지만, 헐값에 채굴권을 넘긴 임금과 중전 민씨의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으로?"
"조선에서는 금광이 모두 국유지입니다. 향후 국립 광공업 회사를 설립할 생각인데, 미국 자본이 주주로 참가하는 거지요."
"그럼 소유권과 채굴권은 모두 조선이 갖고, 미국 자본은 거기에서 나오는 이윤의 일부만 갖는다?"
"그래도 상당한 이윤이 나올 거라 예측 가능합니다."
모건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좋습니다. 왕자께서 이렇게까지 열심히 나를, 아니 미국 자본을 설득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조선의 부강과 근대화를 위해서지요."
"조선은 전제 군주국이라 들었습니다. 왕자께서는 장차 조선 전체를 소유할 수도 있는데, 미국에 와서 이렇게까지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글쎄요. 아마 나에 대한 소문은 들으셨겠지만, 나는 러시아 황제 폐하와 특별한 관계입니다. 혼자 잘먹고 잘살려면 굳이 러시아에서 조선으로 돌아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내게는 조선 왕족으로서 해야 할 의무가 있기에 돌아온 것입니다. 나는 내 동포가 자주독립국에서 잘 살길 원합니다."
이선의 말은 단순히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그가 조선으로 돌아와 가시밭길을 자처한 이유였다.
"내가 돈을 투자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게 무엇일 것 같습니까?"
모건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이선은 아리송했다.
"회장님은 가능성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유망한지의 가능성?"
"그것도 중요하지만, 꼭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인품입니다."
"인품이요?"
"돈이나 담보보다 우선이죠. 돈은 인품을 살 수 없고……. 내가 신뢰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본주의 세계에 존재하는 어떠한 채권을 가지고도 내게서 돈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가의 상징인 모건으로선 의외의 말이었다.
"러시아 황제나 청나라 대신, 미국에 와서도 그랜드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말을 듣고, 왕자께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습니다. 과연 만나보니 어느 정도 알 것 같군요. 왕자께서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명하고, 의무감에서 비롯된 인품도 훌륭합니다."
뜻밖에도 모건이 칭찬을 쏟아내니, 이선은 겸손히 답했다.
"과찬이십니다."
"나도 유럽에서 많은 왕족과 귀족을 보았습니다만, 왕족으로 타고난 이가 겸손하기는 쉽지 않죠. 근데 왕자께서는 보기 드물게 예의 바르고 겸손하십니다. 동양적 예의인가요?"
"사실 동양의 기준에서 보면, 나는 왕족이고 회장님은 상인이니, 상인을 낮추어 보는 문화가 있는 동양에선 이렇게 독대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는 시대의 변화에 익숙합니다. 앞으로는 타고난 혈통이 아니라, 자본을 가진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겁니다. 이 나라처럼 말이지요."
이선은 빙긋 웃으면서 어느 구절을 인용했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에서 아주 혁명적인 역할을 해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지배권을 획득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목가적 관계를 파괴했다. 부르주아지는 사람을 타고난 상전들에게 얽매여 놓고 있던 온갖 봉건적 속박을 가차 없이 토막 내 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에는 노골적인 이해관계와 냉혹한 현금 계산 외에는 아무런 관계도 남지 않게 되었다……."
순간 모건이 무릎을 쳤다.
"그거, 독일 사회주의자가 쓴 선언문 아닙니까? 이름이 뭐였더라……. 아, 카를 마르크스. 나도 읽어 봤습니다. 나는 대학을 독일에서 유학했기 때문에 늘 독일 철학에는 관심이 있지요. 특히 노동 문제는 자본가 입장에서도 언제나 중요한 문제라서……. 사회주의자들의 문건도 읽어 볼 필요가 있지요."
모건은 씩 웃었다.
"근데 그 구절은 부르주아가 듣기에는 좋은 구절입니다만, 왕족이 듣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구절 아닌가요?"
"왕족이 부르주아 하지 말란 법도 없지요. 지금 조선에 필요한 건 봉건적 속박을 끝장내고, 목가적인 농촌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과 부르주아지의 육성입니다."
모건은 처음으로 감탄을 표했다.
"전통적인 왕조의 기반을 스스로 무너트리는 것 아닙니까?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겠다니, 대단합니다."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기득권을 내려놔야지요."
"좋습니다. 리스크를 감내하는 것, 그게 바로 투자지요."
모건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조선이 아니라 왕자에게 투자하고 싶습니다. 왕자는 매우 유망한 투자대상입니다. 조선의 권력자, 러시아 황제와의 특수한 관계, 노벨 석유회사의 이사. 모두 매력적인 조건이지요. 사업적인 이유부터 먼저 따져보겠습니다."
모건은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아시겠지만, 나는 스탠다드 오일의 록펠러 씨와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합니다. 내가 카네기나 에디슨에게 투자하는 걸 자신의 석유 산업을 방해한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뭐, 분명 전기가 등유를 대체하게 될 테니까 경계할 만하죠. 그런데 나는 언제나 산업의 혁신을 추구해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기술혁신을 추구하는 노벨 형제는 석유 산업의 새로운 총아가 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내게 노벨 형제를 소개해주십시오."
"그야 물론입니다. 노벨 씨도 투자자가 필요하니, 좋아할 겁니다."
"그리고 나는 러시아 투자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나는 미국 철도의 상당수를 보유하고 있지요. 하지만 미국의 철도 붐은 끝났습니다. 그럼 그다음은 어디냐? 내가 보기에 러시아입니다."
"유럽 러시아도 아직 철도가 부족하지만, 광활한 시베리아에 횡단철도를 놓는다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대동맥이 되겠지요. 실제로 황제께서도 매우 관심이 많은 사업입니다."
"그러니 러시아 당국자와도 인맥을 트면 좋겠지요. 제가 왕자께 투자하려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모건은 이윽고 세 번째 손가락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