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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國民國家)
이선의 외무부 방문이 전혀 소득이 없진 않았다. 외교라는 건 단숨에 모든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조선이 프랑스와의 조속한 수교를 원한다는 뜻을 전달하고, 동양에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청과 전쟁이 임박한 프랑스를 장차 외교의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탐색해 봤지.'
프랑스 제국주의가 인도차이나에서 벌이고 있는 침략은 같은 동양인으로서 이선도 분개할 일이었지만, 당장 조선의 앞날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또한 해외 자본의 투자는 지출은 많은데 수입이 별로 없는 조선 재정을 생각하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금융업이 발달하고 해외 투자에 적극적인 프랑스는 괜찮은 파트너지.'
걸림돌이 있다면, 가톨릭 전교 문제와 청나라와의 전쟁 문제였다.
'전교 문제는 대원군을 설득하고 사대부들의 입을 막으면 어떻게든 가능하지. 문제는 청나라와 교전상태에 들어서면, 명목상 조공국인 조선이 프랑스와 수교하기 어렵지. 어떻게든 선전포고 이전에 수교를 맺어야겠다.'
역사대로라면 1884년 8월에 정식으로 양국이 선전포고하며 전쟁이 시작된다. 이선은 그전에 프랑스와의 수교를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이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청나라와 아무런 협의 없이 프랑스와 수교를 논의했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역시 유럽의 문화 수도는 파리지요. 그래서 먼저 구경 좀 해 봤습니다."
파리는 러시아에서 왔을 당시부터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라, 이선은 포크의 가이드로 이뤄지는 파리 여행을 매우 즐겁게 참여했다.
특히 루브르 박물관은 다양한 의미에서 지적 자극을 주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기를 다룬 대형 그림들이 사절단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 세기를 거치며, 나폴레옹은 이미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야망 있는 서양인들의 영웅이었고, '~의 나폴레옹'이란 표현은 이제 식상할 정도였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하고 이끈 자코뱅들은 유럽 좌파들의 이상이었다.
꼭 한 세기 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고, 불과 13년 전에는 파리 코뮌의 형태로 일어나기도 했다.
당대 프랑스는 노동자들의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제3공화국의 중추를 장악한 부르주아지의 전성기였다.
제3공화국은 노동계급과 빈민을 배제한 부르주아지 중심의 금권 정치였지만, 전제국가에서만 살다 온 사람들에게선 국민의 보통선거가 이뤄지는 프랑스는 미국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이상처럼 느껴졌다.
파리는 자유와 평등의 수도처럼 여겨졌고, 유럽 망명자들의 거점이었다.
또한, 프랑스는 세계 최초로 국민개병과 국민교육, 보통선거를 실시한 나라였다. 19세기에 보다 효율적으로 근대적 제도를 운용하는 건 프로이센, 즉 독일이지만, 그 시초는 프랑스였다.
이선은 프랑스 교육부의 안내를 받아 학교 시찰을 했다.
제3공화국은 바로 이 시기, 1880년대 초반에 전국적인 국민교육을 확립시켰고, 이는 쥘 페리 내각의 중요한 업적이었다. 출신과 성별을 막론하고, 모든 아동은 반드시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국민교육을 받아야 했다.
대개 중간 계급 출신의, 사범학교를 졸업한 교사들은 열성적인 공화주의 지지자였고, 검은색 정장 차림의 교사들은 '공화국의 검은 기병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공화국의 검은 기병대는 프랑스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전국 곳곳의 학생들에게 전파했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와 평등, 우애의 혁명 정신을 기반으로 한, 나눠질 수 없는 프랑스 민족의 공화국입니다. 여러분의 고향이 어디든, 출신이 무엇이든, 여러분은 프랑스 민족의 일원이며,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학생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교사들을 보며, 이선은 느낀 바가 있었다.
제3공화국에서 교사들의 적은, 전통적으로 교육을 독점해왔던 가톨릭교회와 사제들이었다. 교사들의 목표는 '신과 교회'에 대한 아이들의 충성심을, '프랑스 공화국'으로 바꿔놓는 것이었다.
1870년대만 해도 왕당파와 공화파의 힘은 비등했고, 왕정복고 음모도 있었다. 하지만 1880년대 국민교육의 확립 이후 공화국은 흔들리지 않았다.
국민교육을 받은 세대는 확고한 공화국 지지자들이었고, 이들은 어김없이 공화국을 위해 의무를 수행했다.
프랑스는 독일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국민개병을 실시했고, 대부분 청년이 2년간의 의무복무를 수행했다. 군대 역시 학교 못지않은, 중요한 국민 통합의 장이었다.
'결국 교육은 헤게모니를 관철하는 장이다. 조선의 개혁이 완성되려면 국민교육을 실행하고 장악해야 해. 사대부들에게 독점된 교육을 모든 국민에게 열어야 한다.'
이선이 추구하는 근대화가 전 국가적 지지를 받으려면, 새로운 국민이 창출되어야 했다. 근대적 국민은 학교의 책상과 군대의 막사에서 창출되었다.
'유교적 신분 질서와 구시대의 이해관계에 얽힌 사회로는 절대 이뤄낼 수 없지. 국민교육과 국민개병. 이 두 가지만큼은 확실히 실시해야 한다. 그런 후에야 양반 상놈의 구별도 사라질 거고, 조선 국민이라는 단일한 균일체를 만들 수 있다.'
김옥균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일본은 아시아의 영국이 되려 하니, 조선을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자'는 주장이 지리적 위치에 근거한 피상적인 구상이었다면, 이선은 꽤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원했다.
영국식 근대화는 산업혁명이 중심이었기에 농본사회인 조선에선 한계가 있었고, 독일식 근대화는 후발 국가가 채택할만한 좋은 모델로, 일본이 채택한 길이자 이선도 고려하고 있는 모델이었다.
하지만 이는 철저한 위로부터의 근대화라 철저히 지배계급 중심이었고, 그 과정도 파행적이었다.
'군국주의 독일과 일본의 결말이 어땠는지 보면 알지.'
프랑스는, 최초의 근대적 국민국가(Nation State)였다. 프랑스식 근대화는 혁명 정신에 입각하여 자영농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참정권을 부여하여, 자발적인 국민 동원 체제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단 조선은 가장 하층의 백성까지 국왕을 떠받드는 만큼 군주를 중심으로 한 일군만민의 시대를 열어야지. 내가 왕위계승권이 있는 왕족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하고.'
이선은 국민교육과 국민개병, 토지개혁과 참정권 부여라는 대개혁을 통해 민중의 지지를 얻어내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하고 싶었다.
결국 이선과 조선 사절단의 서양 시찰은, 그 과정을 확인해가고 기초를 조선에 접목해나가려는 시도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선을 따라온 이들은 개혁의 필요성에 절대적으로 공감했다.
이선은 시찰을 마치면 꼭 사절단의 일원들과 자유로운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의견을 내길 주저하던 이들도, 시찰이 진행될수록 점차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예컨대 중인으로 벼슬도 없던 변수는 양반 관료들 앞에서 의견을 드러내길 꺼려했지만, 왕자인 이선이 솔선수범해서 의견을 경청하니 누가 감히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그 결과 신분과 무관하게 자유롭게 토론의 장이 열렸다.
"조선에 돌아가면 할 일이 너무나 많군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홍영식이 혀를 내둘렀다.
"중요한 일부터 먼저 시작합시다. 자주독립의 기초를 마련하고, 재정을 확립하며, 국민교육과 국민개병의 실시를 목표로 해야지요."
이선의 말에 민영익이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반발이 엄청날 터인데……. 사대부들은 절대로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을 것입니다."
"민 공, 임오년 여름을 기억하지요?"
순간 민영익은 움찔했다. 그때 중전이 쫓겨나고, 민씨 세도가 무너졌으며, 그 자신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영원히 잊으면 안 됩니다. 백성들은 더 이상 속지 않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급료가 13개월 밀려도 참을 수 있었겠지.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까. 나라에서 말하면 백성은 복종해야 했지. 하지만 이젠 다릅니다. 그들은 봉기로 정권을 한 번 교체한 경험이 있어요. 순순히 복종하지 않습니다."
임오군란은 단순히 군인들의 소요사태로 끝나지 않고, 정권교체와 개혁으로 이어졌다. 이는 백성들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었다.
"프랑스가 왜 국민의 힘이 강한지 압니까? 그들은 군주의 목을 쳤습니다. 그 후에도 3명의 군주를 끌어내렸습니다. 물론 동양 기준에서 볼 때 패역무도한 난신적자지요. 하지만 폭발적인 국민의 힘이 있었기에, 프랑스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선진 열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루이 16세의 목을 자르고,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를 몰아냈으며, 1870년에는 나폴레옹 3세를 퇴위시켰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는 보통선거에 기반한 민주공화국을 확립했다.
비록 독일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을지라도, 세계 무대에서 손꼽히는 열강이었다.
"프랑스 지배자들도 국민의 무서움을 압니다. 프랑스 국민은 언제든지 프랑스 지배자의 목을 자를 준비가 되어있어요. 그래서 프랑스 지배자들은 국민의 관심과 분노를 외부로 돌리려 합니다."
페리는 교육장관과 외무장관, 총리를 역임하며 의무교육, 여성 교육, 무상교육, 세속교육을 진작시켰을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와 노동자 권익을 옹호한 진보적인 공화주의자였다.
'하지만 페리의 진보적 정책이 프랑스 국경 안에서만 머문다는 게 아쉽군. 아니, 어쩔 수 없는 전형적인 19세기 서양 정치가지.'
대외적으로 페리 정부는 철저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1884년 초, 페리는 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 침략을 정당화하며, 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 우리는 열등한 종족을 문명화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는 우월한 문명의 의무입니다.
1880년대 초, 프랑스는 튀니지를 합병하고, 마다가스카르를 정복하고, 베트남을 침략했다. 독립의식이 강한 베트남인들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고, 이는 더 큰 전쟁으로 비화하였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는 끊임없이 팽창하길 희망했다. 국가의 영광이 곧 국민의 영광으로 여겨지는 시대였다.
"정말 더러운 책략이군요. 같은 동양인으로서, 안남(베트남)인들의 저항에 더 공감됩니다."
이선의 설명에 서광범이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더러운 책략이오. 여러분도 봐서 알겠지만, 서양인들은 우리를 상당히 환대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아직 서양에서 미지의 존재고, 그만큼 쓸모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청국 사절단도, 일본 사절단도, 안남 사절단도, 처음에는 서양에서 환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용가치가 사라지면, 바로 총을 겨누기 시작했지요. 그들은 웃으면서 총을 준비합니다. 우리는 서양인들의 호의 뒤에 숨어 있는 비수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선은 조선에서 가장 친서양주의자라고 할 수 있었지만, 서양에 대해 전혀 환상이 없었다.
"하지만 척사파들처럼, 서양인을 배제해선 안 됩니다. 배제하면 오히려 당할 뿐입니다. 그들의 전략을 배워야 합니다. 그게 내가 여러분과 서양까지 함께 온 이유입니다. 우리 역시, 단일한 국민을 창출하고, 강력한 힘을 키워, 그들의 관심과 분노를 해외에 투사시켜야 합니다. 이미 일본은 그렇게 하고 있지요."
이선은 좌중을 쳐다보았다.
"여러분은 개화를 지지하는 인물들이고, 일본에 대해 우호적이지요. 이해합니다. 일본은 유신을 선포한지 15년 만에 이미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 역시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노력을 필요로 했고, 백성의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그 희생의 대가로 추진하는 게 바로 대외 침략이지요. 일본은 먼저 북해도와 유구를 합병했습니다. 자, 지도를 봅시다. 그다음은 누가 될까요?"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변수가 애매한 어조로 말했다.
"유구 다음은 대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만 역시 일본의 중요한 목표지요. 일본 정부의 중요 파벌인 사쓰마 번과 해군은 대만을 원합니다. 하지만 진짜 일본의 핵심 중추, 조슈 번과 육군은 대륙 진출을 원하오. 즉, 조선이 첫 번째 목표란 말이지요."
이선은 일부러 충격을 주기 위해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멀리는 임진년의 전쟁도 있지만, 결국 그게 근대 국가의 본질입니다. 근대 국가가 단일한 국민을 창출하여 의무를 강요하고, 그 의무의 대가로 권리를 줘야 합니다. 토지를 국민에게 나눠주거나, 투표권을 줘서 정치경제적인 불만을 달래야 합니다. 하지만 지배층이 그러기 싫다면?"
점차 심각해지는 표정의 좌중을 바라보며, 이선은 단언하듯이 말했다.
"결국, 대외 침략이지. 그게 바로 제국주의 국가가 걷는 길이고, 일본도 이를 답습하려고 하오. 이 시대는 먹느냐 먹히느냐, 약육강식의 시대입니다. 조선이 살아남으려면, 열강의 더러운 책략을 눈치채고, 우리 또한 국민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이 시대에,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