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89화 (89/812)

88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프랑스에서의 일정은 길지 않았다. 이선과 조선에 관심이 생긴 프랑스 자본가들과 몇 번의 회견을 가진 정도였다.

프랑스만의 특이사항이 있다면, 파리 외방전교회(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s Paris, MEP)에서 회견을 요청했다는 점이었다. 조선 대교구는 파리 외방전교회 관할이었고, 이로 인해 조선에 파견된 신부들은 모두 프랑스인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한 신부 3인, 1866년 병인박해로 순교한 신부 9인이 모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이었다.

대원군과 가톨릭의 악연을 생각하면, 이선과 외방전교회의 회견은 썩 반갑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외방전교회는 적극적으로 이선과의 회견을 원했다. 이들로서는 서양에 우호적인 소문의 '조선 왕자'가 선교를 허용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충분했다.

"아직 전교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군 대감께서 천주교 사제를 만나면 정치적 부담이 있지 않을까요?"

홍영식의 우려는 타당했다. 사대부들의 비난은 그렇다 쳐도, 집정자인 대원군이 탐탁지 않게 여길 가능성을 걱정했다.

"대원위께서도 서양과의 수교를 결정한 이상, 서양이 요구하는 종교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일단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들어나 보지요."

이선은 무조건 외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제3공화국과 가톨릭교회는 국내에서 사회적 헤게모니를 두고 대립했지만, 해외에서는 이해관계를 같이했다.

엄밀히 말하면, 성직자인 외방전교회는 바티칸에 충성할지언정, 세속 정부의 영향력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 입장에서 이들은 모두 프랑스인이었고, 프랑스 신부의 순교는 언제나 프랑스 정부에게 좋은 대외 침략의 명분이 되었다.

'병인양요가 그랬고, 베트남과 청에 대한 전쟁 명분도 그랬지.'

이선은 종파를 막론하고, 기독교를 박해해서 서양 열강의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서양에 우호적인 인식을 심어줄 창구로 기독교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조선의 왕자께서 회견 요청을 받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벽안의 프랑스인 신부는 뜻밖에도 조선어가 매우 유창했다. 이선은 그가 조선에서 살았음을 직감했다.

"아무래도 신부님은 조선에서 오래 살았을 것 같군요."

"맞습니다. 조선 이름은 이복명이라고 합니다."

신부는 조선 이름을 댔지만, 이선은 그가 누군지 알았다.

"뉘신지 알지요. 펠릭스 리델 주교."

"예, 세속의 이름은 펠릭스 리델입니다."

그는 바로 조선 대교구 6대 교구장, 펠릭스 클레르 리델(Felix Clair Ridel), 혹은 이복명(李福明)이었다.

"한양에서의 감옥생활로 많이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주님의 가호와 조선 정부의 관용으로, 다행히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조선 정부가 관용을 베풀었지요. 신부는 단순히 사교(邪敎)를 전파한 죄가 아니라, 프랑스 함대를 끌어들여 조선을 침략한 외환(外患)의 죄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선은 일부러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제 본의가 아니게 프랑스와 조선의 전쟁으로 비화된 점은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제이고, 평화적인 해결책을 원했습니다. 조선 정부가 우리 형제들을 학살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 역시······."

"요컨대, 내 할아버님과 조선 정부의 책임이다?"

리델은 당혹스러워하며 사과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1861년에 조선으로 입국한 리델은, 1866년 병인박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3인의 신부 중 한 사람이었다.

리델은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병인박해를 알렸고, 프랑스는 이를 명분 삼아 조선을 침략한다. 이렇게 시작된 사건이 병인양요였다.

병인양요 이후 중국에 머물던 리델은 1869년 조선 대교구의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877년에 다시 조선으로 잠입해 포교 활동을 펼쳤으나, 4개월 만에 발각되어 포도청에 투옥되었다.

리델은 동료 신부들처럼 순교를 각오했으나, 조선 조정의 태도가 변해 있었다. 대원군 퇴진 이후 친정을 한 임금은 박해를 이어나갈 생각이 없었고, 일본과의 수교 직후 시점이라 더욱 그랬다.

프랑스 또한 재빠르게 주청 프랑스 공사가 구명 활동을 했고, 청나라의 권유를 받은 조선 조정은 리델을 석방했다. 리델은 5개월간 감옥살이를 한 후 추방되었다. 리델은 조선에서 잡히고도 사형당하지 않은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아닙니다. 신부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박해받는 형제들을 구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프랑스 군대에 호소한 방법은 틀렸습니다. 그로 인해 조선과 프랑스는 외교 수립 이전부터 전쟁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송구할 따름입니다. 제 어리석음의 소치입니다."

이선이 거듭 힐난조로 말하는데도, 리델은 저자세로 나왔다. 그로선 조선에 있는 동료 신부와 신자들을 위해서라도, 조선의 권력자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불행한 역사는 끝났습니다. 1871년 전쟁을 벌였던 미국과 수교를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은 이미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이선은 어조를 긍정적으로 전환했다. 어두웠던 리델의 표정도 밝아졌다.

"조선이 전쟁을 벌인 당사자인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은 이미 망했고, 조선은 프랑스 공화국에 대해서 아무런 유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프랑스와의 수교는 지체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리델은 선선히 답했다.

"종교 문제겠지요."

"정확합니다. 조선 정부는 서양 각국과 수교를 했지만, 기독교 선교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수교의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속의 일은 잘 알지 못하지만, 종교의 자유는 조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속을 잘 모른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리델의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이선은 기독교에 대해 딱히 호오(好惡)의 감정이 없었다. 단지 서양과의 관계를 위해 기독교를 이용할 생각이었고, 사상과 종교의 자유는 근대 국가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양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만약 조선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면, 신부님은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리델로서는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말이었다.

"저는 조선을 떠나면서 맹세했습니다. 부디 언젠가 조선 정부가 우리에게 입국을 허락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하며, 그런 날이 오면 나는 반갑게 다시 달려오겠다고."

"조선 정부는 수천 명의 신도와 9명의 사제를 처형하고, 신부님도 감옥생활을 했는데도, 원한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조선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아서, 불평할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감사할 뿐이고, 또 조선 정부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에게 베풀어 주신 호의로 저는 천만 번 더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드니, 이토록 아름다운 나라와 저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이 나라 백성들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회한이 더욱 커질 뿐입니다."

'참 신기하군.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들어가서 선교하고, 목숨까지 바치고, 그 나라에 평생의 애정을 보낸다는 것. 사상과 종교의 힘이란 참 놀라워.'

이선은 리델이 조선의 권력자에게 아부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직감했다.

"조선에 대한 신부님의 애정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군요."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신부님은 일본에서 조선어 사전과 문법서를 편찬한 거로 압니다. 이를 조선과 유럽에서 출판하도록 했으면 합니다."

"그런 일이라면, 저로선 더없이 바라던 바입니다."

조선에서 추방된 후, 리델은 만주와 일본에서 후학을 위해 조선어 연구에 힘썼고, 그 결과 1880년 사전인 『한불사전(Dictionnaire Coréen-Français)』을, 1881년 문법서인 『한어문전(Grammaire Coréenne)』을 편찬했다.

엄밀히 말하면 1874년 러시아에서 노한 사전이 출판되었으니, 서양 최초는 아니었다. 고려인의 존재로 인해 러시아는 진작 사전 편찬의 필요성을 갖고 출판한 것이었다. 이선도 러시아에서 이미 조선어 사전이 있는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문법서는 틀림없이 최초였고, 당시 조선어를 할 줄 아는 극소수의 서양인들 중에서도, 가장 조선어에 능통한 사람은 단연코 리델이었다.

"지금 조선에 서양 언어 교과서는 하나도 없습니다. 청국이나 일본에서 들여온 책으로 공부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도 조선어 교재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요."

이 단계에서 외국어 공부를 한다는 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외국어 전문가를 양성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조선과 서양이 서로를 이해하려면, 먼저 서로의 언어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부님의 책은 매우 중요합니다. 조선인은 사전을 통해 프랑스어를 공부할 수 있고, 서양인도 마찬가지로 문법서를 통해 조선어를 공부할 수 있습니다."

이선의 말에 리델은 진심으로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저는 왕자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우리 사제들이 가장 먼저 조선어를 배운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조선인에게 다가가려면 언어를 알아야 하고, 언어를 모른 채로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앞으로 언문(言文, 한글)을 공용 문자로 채택할 예정입니다. 나는 프랑스처럼, 국가 차원에서 표준어를 정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체계적인 사전과 문법서가 아직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도 신부님의 책은 중요한 참고서가 될 겁니다."

중앙집권적 전통이 강한 프랑스는, 파리와 일 드 프랑스(Ile de France) 지방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를 대혁명 직후부터 전국에 보급했고, 곧 프랑스어는 곧 프랑스 민족을 상징했다.

프랑스 학사원, 즉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는 프랑스어 연구와 보급을 이끌었고, 세계 표준어 정책의 원조라 할 수 있었다.

'조선에 장점이 있다면, 프랑스 이상으로 오래된 중앙집권 전통과 단일한 공동체다. 하지만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문자가 다르다는 건 국민국가 건설에 좋지 못한 현상이지.'

이선은 한문을 대체해서 한글을 국문으로 격상시킬 계획이었다.

'양반들의 저항이 있겠지만, 훈민정음도 명백히 선대왕의 업적인데 뭐 어쩔 거야?'

공용 문자는 쉬워야 했다. 그래야 국민교육에 유용하고, 문맹률이 격감하며, 새로운 지식 계층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참으로 좋은 생각입니다. 저는 조선에 이렇게 배우기 쉽고도 사용이 편리한, 훌륭한 문자를 놔두고 왜 중국의 문자를 이용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전도 언문으로 만들었습니다."

리델은 한문도 할 줄 알았지만,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주로 서민 계층이었으므로 주로 한글을 썼다. 한불사전은 한글 단어와 프랑스어를 대치시켜, 한글 공부에도 이용될 수 있는 책이었다.

"그거야, 예전에 유럽 귀족과 사제들이 자국 언어 대신에 라틴어를 쓴 이유와 같지요. 멀리 갈 것 없이, 지금도 러시아 귀족들은 주로 프랑스어를 씁니다. 어디든 귀하신 분들께서는 천한 것들과 구별짓기를 원하지요."

이선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옛 유럽 귀족들, 현 러시아 귀족과 조선 양반의 심성은 비슷한 측면이 상당했다.

"아, 그리 말씀하시니 이해가 됩니다."

"지금도 교회에서는 라틴어를 쓰지 않습니까? 사실 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예배에 왜 라틴어를 쓰는지 의문이지만……. 과연 몇 명이나 이해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개신교는 현지화에 능하더군요. 그들은 중국과 일본에서 현지 언어로 예배를 진행합니다."

1963년의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므로, 어느 나라에서도 모든 예배는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그건 교회의 오랜 전통인지라……."

"뭐, 난 교회의 일에 개입할 생각은 없습니다. 조선의 법률과 전통을 해치지 않고, 세속과 종교를 분리하길 바랍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신의 것은 신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Render unto Caesar, the things that are Caesar's)."

조선의 왕자가 뜻밖에도 성경의 말을 인용하니, 리델은 정말 놀란 듯했다.

"성경을 읽어 보셨습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워낙 유명한 경구라서 외우고 있습니다."

핵심은 프랑스식 세속주의였다. 이선은 모든 종교를 국가에 종속시킬 생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차이가 없었다.

"나는 성균관과 서원에서 공자를 모시든, 사찰에서 부처를 모시든 신경 안 씁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예수를 모셔도 상관없습니다. 올해 안에, 종교의 자유가 반포될 것입니다. 모든 신자는 종교의 자유를 얻을 것이고, 선교도 허용될 겁니다."

이선은 이 자리에서 기독교 공인을 비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리델은 감격하여 외쳤다.

"왕자께서는 조선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이십니다!"

이선은 자신과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비교하는 건 과하다 싶었지만, 은유로 받아들였다.

'뭐, 무너져 가는 나라를 살리고, 개혁하려고 하는 점에서 같군.'

"단, 모든 종교의 신자는 조선에 충성해야 합니다. 가톨릭 신자의 충성 대상은 로마와 교황이 아니라, 한양과 임금이어야 합니다. 그 어떠한 정치적 개입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신부님, 아니 조선 대교구를 이끄는 주교님은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신의 것은 신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