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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90화 (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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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자유

이선의 요구는, 단순히 기독교를 박해하던 국가에서 요구하는 사항이 아니었다.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작업이었다.

유럽에서도, 개신교나 정교회가 주류인 국가에서는 가톨릭 신자의 충성이 자국과 군주가 아니라 로마와 교황을 향한다는 의심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루터교회를 믿는 프로이센이 지배하지만, 통일 이후 가톨릭 신자가 대거 늘어나게 된 독일이었다. 신생 통일국가를 이끌게 된 비스마르크는, 독일 국민의 충성 대상을 베를린으로 일원화하려고 소위 '문화 투쟁(Kulturkampf)'을 벌여 가며 가톨릭교회를 탄압했다.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 역시 자국 내의 가톨릭 신자, 즉 폴란드인들의 충성심을 의심했다. 가톨릭교회 자체는 러시아의 지배에 순응했지만, 가톨릭은 폴란드인의 민족 정체성이었으므로 러시아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선의 요구는 유럽 국가들과 같은 맥락이었다.

"교회는 본래의 고유한 질서에 순응하라고 설교합니다. 당연히 조선의 신자들은 조선에 충성할 것입니다."

리델은 선선히 수락했다. 1878년, 온건 성향의 교황 레오 13세가 즉위한 이후, 가톨릭은 세속 권력과 타협적인 자세를 보였다. 더욱이 탄압받는 교회를 이끌었던 리델은 더욱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주교님이 조선의 신앙공동체를 이끄는 주교대리 백규삼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하십시오. 곧 종교의 자유는 공인될 것이며, 그 대신 모든 신자는 국가에 충성을 바칠 의무가 있다고."

리델은 이선이 지하교회를 이끄는 신부 장 블랑(Jean Blanc), 즉 백규삼(白圭三)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다는 데 놀랐다. 이는 조선에서 교회 지도부를 파악하고도 그동안 관용을 베풀었다는 의미라,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즉시 그리하겠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가톨릭을 비난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군무부(無君無父)입니다. 왜 이런 비난이 나오는지 알겠지요? 이제 '무군' 문제는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무부'인데……."

무군무부. 즉, 임금도 모르고 부모도 모른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거부하는 데 가장 강한 반감을 보였고, 이는 박해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왕자께서 어떤 비판을 하실지 잘 압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교리의 핵심입니다. 유교의 제사와 조상숭배는 우상숭배에 해당하며, 결코 우상숭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충성 문제는 선선히 받아들인 리델도, 제사 문제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제사를 우상숭배로 단정하였으니 일개 주교가 타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가톨릭의 제사 문제가 해결되는 게 1930년대 비오 12세 시대의 일이니 시대적으로 무리가 있군. 종교인들에게 정치적 융통성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압니다. 하지만 마찰을 빚을 여지를 최소화하자는 겁니다. 내가 말했듯이, 교회에서 예수를 모셔도 전혀 신경 안 씁니다. 교회의 일에 개입할 생도 없습니다. 단지 조선의 법률과 전통을 해치지 않고, 세속과 종교를 분리하길 바랍니다. 일반적인 조선인의 감정을 상할 수 있는 행위는 일체하지 말라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그러지 않으면, 종교의 자유를 승인한 이들의 정치적 입지까지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괜찮아도, 정적들이 언제든지 정치적 공세의 재료로 쓸 수 있단 말입니다."

"반드시 유념하겠습니다."

유교적 전통과의 마찰로 박해를 감내해야 했던 동양 파견 신부들은 좀 더 유연하였고, 리델도 타협의 필요성을 느꼈다.

리델도 이선처럼 합리적이고 서양에 우호적인 조선의 권력자를 처음 보았기에, 그가 조선의 권력자로 오랫동안 남아주는 게 교회에 이득이 되는 길이라 판단했다.

"가톨릭교회는 수직적이라서, 다른 교단과 달리 조직적이고 질서가 잘 잡혀있는 걸로 압니다. 내가 주교님과 합의한 사항이 반드시 지켜지길 바랍니다."

"우리 형제들은 오랫동안 숙원해 왔던 종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조선의 권력에 순응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좋습니다. 올해 안으로 종교의 자유가 공인될 것입니다."

이선이 종교 자유의 뜻을 확고히 하자, 리델은 순간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순교했던 동료 신부들, 신자들, 파괴된 신앙 공동체의 유지가 마침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아! 이 아름다운 조선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카타콤 속에서 살아왔던지, 또 얼마나 많은 박해를 겪었는지……. 주님, 당신의 거룩하신 뜻이 마침내 이뤄졌습니다!"

리델은 고개를 숙여 이선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왕자께서는 조선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요, 클로비스 대왕이십니다. 실로 신앙의 구원자이십니다!"

종교적 열정이 없는 이선으로선 리델의 열성이 부담스러웠지만, 근엄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조선의 권좌에 있는 이상, 종교와 사상의 자유는 완전히 보장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조선과 왕자님을 보호하실 겁니다."

리델은 거듭 눈물을 흘리며 축복했다.

그로선 정말로 감격스러울만 했다. 늘 조선에 돌아갈 날만 고대하다가, 중병을 앓아 끝내 프랑스로 돌아왔다.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신이 눈을 감기 전에 마침내 숙원을 이룬 것이다. 리델로서는 이선이 신이 보낸 사자(使者)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선이 비공식적으로 조선 대교구의 주교 리델을 만나 종교의 자유를 약속했다는 이야기가 프랑스 정부의 귀에 들어갔다. 프랑스로서는 이선, 아니 조선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보증으로 받아들였다.

이선과 프랑스 외무차관은 다시 비밀리에 접촉, 올해 상반기까지 수교를 맺자고 합의했다.

프랑스 전권공사가 사절단이 조선에 돌아가기로 예정된 6월경에, 인천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미 중요한 논쟁거리는 모두 합의됐으니, 수교는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선은 파리를 떠나기 전, 파리 외곽에 있는 에디슨 전기회사의 공장에 갔다.

유럽 지사의 책임자 찰스 베처러(Charles Batchelor)는 이선을 환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각하. 에디슨 사장님으로부터 오시리란 말씀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선은 모건의 투자를 받은 후, 약속대로 에디슨 전기 회사에 10년간 조선 전기사업의 독점권을 주었다. 에디슨은 크게 기뻐하며 조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나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파리 공장을 시찰하러 왔습니다."

"예,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베처러는 직접 사절단의 시찰을 안내했다.

이선은 시찰 목적도 있었지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니콜라 테슬라 씨가 이곳에 있습니까?"

"아, 예. 저희 연구원이지요."

"아마 사장님이 지사장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내 지인의 지인이라서요. 만나보고 싶습니다."

순간 베처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테슬라 씨는 지금 오스트리아 빈에 있습니다."

"아니, 왜요?"

이선의 얼굴의 황당함이 어리자, 베체러가 급히 답했다.

"아, 영원히 간 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테슬라 씨는 오스트리아 국적이지요. 여권과 비자 문제로 잠시 돌아간 겁니다. 사장님의 부름을 받고 곧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라서요. 원래 지금쯤 돌아왔어야 했는데, 서류 작업이 조금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1884년에 테슬라는 미국으로 간다. 이선의 말을 들은 에디슨은 1883년 말 테슬라를 미국 본사로 초청했고, 역사보다 몇 달 빨리 테슬라의 미국행이 결정됐다. 오히려 그 때문에 파리에 있어야할 테슬라가 빈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쳇, 엇갈렸군.'

이선은 곧 다음 방문지인 독일 베를린으로 떠날 예정이므로, 무작정 파리에서 테슬라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요. 굉장히 미래가 유망한 연구자라고 들었습니다. 꼭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 테슬라 씨는 정말 유능한 연구원이죠. 전기의 역사를 바꿀 겁니다."

누구보다 먼저 테슬라의 능력을 파악하고 추천한 베처러인지라, 에디슨에게 은밀히 최고 대우를 해주더라도 테슬라를 미국에 붙잡아 놓으라고 해두었다. 그가 보기에, 이선이 아무리 좋은 대우를 해줘도 테슬라를 조선으로 보낸다는 건 손해였다.

이선은 베처러의 속내를 모르고 있었지만, 테슬라가 당장 조선으로 오리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내가 테슬라라도, 아무리 돈 많이 줘도 절대 지금은 미지의 나라 조선으로 안 간다. 과학자에게 중요한 건 인프라니까. 더욱이 당장은 에디슨이 환대해줄 테니, 더더욱 미국을 떠나고 싶지 않을걸.'

이선이 기다리는 건 그다음이었다.

'결국, 테슬라는 에디슨과 불화를 빚고, 뛰쳐나가 자기 회사를 차리지. 급전이 필요하니 투자자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그때 조선의 왕자이자, 세계의 권력자와 자본가들과 두루 친분이 있는 이선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떠올리겠지. 그때쯤이면 조선도 어느 정도 인프라가 확보가 되어있을 거고.'

이선은 미래를 가늠했다.

"그럼 조선에 전기가 환하게 비출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하하, 에디슨 전기회사도 앞으로도 영원히 번영하길 바랍니다."

이선과 베처러는 서로 동상이몽을 하면서 악수를 했다.

1884년 1월 25일. 조선 사절단은 프랑스를 떠나, 독일 국경을 넘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불과 13년 전에 전쟁을 치렀고, 전쟁의 결과 독일 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이 탄생했다. 이들은 여전히 서로를 제1의 적국으로 여겼다.

프랑스는 독일에 치욕을 갚고, 빼앗긴 알자스-로렌을 되찾는 걸 국가적 과제로 삼았다.

당연히 독일은 프랑스의 복수심을 경계했고,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했다.

비스마르크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건, 프랑스와 러시아가 손을 잡아 독일이 양면 전쟁의 위협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동안 독일은 러시아와 동맹 관계였으나, 1878년 베를린 회의로 관계가 틀어졌다. 비스마르크는 '정직한 중재자' 노릇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독일이 배신하여 영국 편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자연히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독일은 일단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체결하여 우방을 확보했으나, 여전히 프랑스와 러시아가 최대 관심사였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심사가 유럽이 아닌 아시아로 향하길 희망했다. 프랑스가 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에서,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영국과 대립하며 식민지 확장에 집중하길 원했다.

'바로 거기에, 조선이 운신할 여지가 있지.'

수교 조약을 맺었다지만, 조선과 독일은 머나먼 나라였다. 독일이 식민지 확장에 관심이 없고, 유럽 정세에만 몰두하고 있는 1880년대 초엔 더욱 그랬다. 실제 역사에서, 독일은 조선에 영사 급 외교관만 보내고,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나마 독일이 조선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식민지 확장에 적극적인 빌헬름 2세가 즉위하여 칭다오를 식민지로 확보한 1890년대의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비스마르크가 신경 쓰고 있는 일이 워낙 많아서 조선은 관심 밖이었다. 수단 문제로 정신이 팔려있는 글래드스턴보다 더 이선을 만날 가능성이 적었다. 하지만 이선에게는 비스마르크를 만날 방법이 있었다.

'러시아를 동아시아로 끌어들인다. 이건 비스마르크고 원하는 바이고,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지.'

이선은 묄렌도르프가 독일 외무부의 지시를 받는다는 심증이 있었다. 만약 조선의 첫 번째 서양인 고문이 독일 외무부의 비밀요원이라면, 이선은 조선과 독일 간에 논의할 만한 사항이 많다고 여겼다.

조선 사절단은 기차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조선 사절단이 오리라는 전언을 받았습니다."

독일 외무부의 관리가 베를린 중앙역에서 사절단을 맞이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 사절단이 독일에 방문할 것이라 통보했고, 독일 측도 환영을 준비했다.

때마침 일본에서도 독일로 사절단을 파견한 상황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 조사를 위해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파견되었고, 독일식 군사제도를 채용한 일본군에서도 장교들을 독일로 유학 보냈다.

독일 외무부는 일본 사절단의 예에 따라 조선 사절단을 예우했다.

베를린 중심가인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푼 조선 사절단은, 독일 시찰에 나섰다.

독일에서 이선의 관심사는, 단연코 군대와 제도였다. 이른바 '프로이센 개혁'도 이선이 고려하는 주요한 근대화 모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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