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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波蘭)
비스마르크와 회견을 마치고, 독일과 모종의 합의를 마친 조선 사절단은 베를린을 떠났다. 목적지는 러시아였다.
베를린에서 포젠(Posen)을 거쳐 국경을 넘자, 기차가 러시아식 광궤로 변경되었다.
달력도 갑자기 2월에서 1월로 변경되었다. 러시아는 그레고리력보다 12일 느린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었으므로, 아직 1월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 음력을 쓰는 조선인들에게는, 갑신년 정월이었다.
"이거 어떤 달력을 써야 할지 모르겠군요."
"다 쓰면 되지 않겠소?"
사절단의 일지를 작성하고 있는 서기관 서광범은 동시에 3개의 달력을 함께 적어야 했다.
"이선 공작이십니까? 바르샤바까지 정중히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미 사절단이 도착하리라 연락이 닿은 듯, 러시아 국경 관리가 거수경례하며 정중히 이선을 맞이했다.
"감사합니다. 수고가 많습니다."
사절단을 태운 열차는 옛 폴란드 왕국의 수도,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옛 폴란드 왕국의 잔해 위에는, 러시아령 프리비슬린스키 주(Privislinsky krai)가 존재했다. 1867년부터 폴란드는 군정 체제였고, 군인 출신의 총독이 통치했다.
사절단이 바르샤바 역에 도착하니, 폴란드 총독 요시프 구르코(Iosif Gurko) 육군대장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러시아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총독의 환영에 이선은 정중히 답례했다.
"황제 폐하께서 하명하시길, 공작을 페테르부르크까지 잘 모시라 하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황실 열차를 제공하셨습니다. 특별열차를 준비하는 동안, 바르샤바에서 편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황제 폐하와 총독 각하의 후의에 어떻게 다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편히 지내시면 됩니다. 내일 저녁에 환영 만찬이 있을 예정이니 그때 뵙지요."
그동안 방문했던 다른 유럽 국가하고는 확연히 다른 예우였다.
"과연 아라사에서는 군 대감을 특별히 여기나 봅니다."
"아라사 황제를 구한 생명의 은인인데 오죽하겠습니까."
민영익과 홍영식의 감탄에, 안영흠과 장무영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공로도 상당했다.
"여기서부턴 대감에 대한 예우가 확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아라사에서는 영웅이나 다름없지요."
"글쎄, 파란(波蘭, 폴란드)은 아라사 다른 지역하고는 달라서 어떨지 모르겠군……. 조선과 중국이 다른 나라인 것처럼, 여기도 얼마 전까지 아라사와는 다른 나라였소."
역사적 맥락을 아는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1795년,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개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나폴레옹에 의해 잠시 부활했지만, 1815년 빈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폴란드 분할이 확정되었다.
폴란드 입헌왕국을 허용하되, 러시아 황제는 동군연합(同君聯合)으로 폴란드 국왕을 겸임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제 몫을 챙겨갔다.
알렉산드르 1세 시대에는 헌법과 폴란드의 자치가 허용됐지만,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전제군주 니콜라이 1세는 폴란드에서도 헌법을 무시하고 통치를 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폴란드인들은 차르를 폴란드 국왕에서 폐위시키고 봉기를 일으켰다. 이른바 1830년 11월 봉기다.
11월 봉기는 러시아에 의해 진압되었고, 니콜라이 1세는 헌법을 폐지하고 동군연합을 해체했다. 차르는 재위기간 동안 철저한 철권통치를 했다.
개혁 군주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하면서, 유화정책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폴란드인들을 만족시키는 조치는 못 되었다. 특히, 대개혁의 일환으로 징병제를 새로 도입하여 폴란드에도 적용하자, 폴란드인의 분노가 폭발했다.
다시 폴란드는 봉기를 일으켜 독립전쟁에 들어갔다. 1863년 1월 봉기였다. 1년 넘게 치열하게 진행된 봉기는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러시아 정부는 반복되는 폴란드의 독립투쟁에 격분했고, 폴란드 왕국 자체를 폐지하고 러시아의 일개 주로 편입시켰다. 군정이 실시되었고, 강력한 러시아화 정책과 함께 산업화가 추진되었다.
폴란드인 대부분은 현실적인 무력 격차를 체감하고, 러시아의 통치에 순응했지만, 일부는 테러로 전환했다. 차르에 대한 거듭된 암살 음모는 러시아 혁명가들과 연합한 폴란드 혁명가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이선이 막았던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음모 역시, 러시아 혁명조직에 가담한 폴란드인이 실행범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에서는 신의 대리인이자 개혁 군주이지만, 폴란드에서는 침략자이자 압제자.'
이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폴란드인의 시선이 모호하리라는 걸 짐작했다.
바르샤바 옛 왕궁, 즉 지금의 총독관저에서 조선 사절단의 환영 만찬이 있었다.
총독은 이선을 러시아 공작의 신분에 준하여 예우하라는 황명을 따라, 귀빈으로 예우했다.
"조선 사절단과 이선 공이 러시아 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자, 모두들 건배합시다. 러시아 제국과 새로이 수교하게 된 극동의 이웃 나라 조선과 이선 공을 위하여!"
"건배!"
총독의 건배사에 일제히 술잔이 올랐다.
"러시아 제국은 6년 전,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해방하였습니다. 본관 역시 황제 폐하의 군인으로서 적과 싸웠습니다."
구르코 대장은 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영웅으로, 얼마 전에 폴란드 총독으로 부임했다.
"러시아는 이렇듯 약소민족의 보호자입니다. 러시아는 새로 수교를 맺게 된 이웃 나라를 존중하며,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려 드는 국가에 단호히 맞서 싸울 것입니다."
총독의 말은 자화자찬인 동시에, 다분히 경쟁자 영국을 겨냥한 말이었다.
이선은 속으로 냉소했다.
'누가 들으면 정말로 러시아가 약소민족의 보호자인 줄 알겠군. 청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선 러시아가 필요하지만, 진심으로 너희의 선의를 믿는 건 아니라고.'
러시아의 압제를 받는 폴란드인이 듣기에는 더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폴란드에선 총독이 군권과 행정권을 모두 쥔 왕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만찬장에 모인 폴란드 귀족과 자본가들은 신임 총독의 눈치를 보았다.
"감히 황제 폐하를 해하려한 반역자의 무리 중에 폴란드인이 여럿 끼어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황제 폐하에 대한 폴란드인의 충성이 물거품이 될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이선 공작이 이를 막아냈고, 이는 황제 폐하와 러시아 제국, 폴란드인 모두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공작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결국 이 자리에 모인 폴란드 귀족들은 차르의 통치에 순응하는, '친러파'들이었다.
"감사합니다, 공작! 공작께서 러시아와 폴란드를 모두 구원하셨습니다."
폴란드 귀족들이 일제히 이선에게 감사 표시를 하며 몰려드니, 이선이 오히려 일일이 답하기가 난처할 지경이었다.
'하긴,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했으면 폴란드에 더 철권 통치를 실시할 터이니, 감사받을 일인가……?'
알렉산드르 2세는 채찍만 휘두른 게 아니었다. 교묘하게 당근도 제시했다. 폴란드에서는 러시아보다 더욱 유리한 조건으로 농노해방을 단행해, 폴란드 농민들에게 '아버지 차르'의 신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건 진정한 애민 정신이 아니라, 봉기 주도층인 폴란드 귀족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함이었다.
귀족과 자본가에게도 당근이 주어졌다. 알렉산드르 2세 재위기에 폴란드는 급격히 산업화하였고, 특히 바르샤바와 우치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공업 도시로 성장했다. 러시아와 폴란드 간에 관세도 철폐되어, 폴란드 자본가들은 방대한 러시아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토지 귀족들은 자본가로 전환했고, 막대한 부를 안겨주는 러시아 시장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은 러시아에서 독립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다.
'농노제 폐지와 공업화로 인한 토지 귀족의 자본가 전환이라. 농업 국가인 조선도 이런 식으로 연착륙을 해야 하는데. 토지개혁으로 자영농을 육성하고, 기존의 지주들은 상업 자본으로 전환해서 부를 축적하면 국가와 모든 계층에 좋은 일이지. 폴란드가 러시아 시장에 진출하는 것처럼, 조선도 중국 시장에 안정적으로 진출하면…….'
이선이 구상하는 경제개혁도 폴란드의 사례와 유사했다. 이선은 사절단에게 프로이센 개혁에 이어,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에 관해서도 연구하라고 명을 내려 두었다.
"이제 러시아와 폴란드는 한 몸입니다. 과거에는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이었으나, 지금은 황제 폐하의 은혜에 참회하고 제국을 위해 일하는 폴란드인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선 공작을 도와, 고려인 부대를 편성해 마적을 격파하고 변경을 안정시킨 얀코프스키가 있습니다. 지금은 신생 조선군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고려대대의 기병 지휘관, 미하우 얀코프스키는 본래 1월 봉기에 가담하여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던 정치범이었다.
"판(Pan) 얀코프스키는 나와 함께 고려인 부대를 이끌고 마적과 싸웠고, 내가 조선으로 돌아간 후에도 군대의 지휘에 힘쓰고 있습니다. 조선의 공로자라고 할 만합니다."
총독의 소개에 이선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좌중도 기뻐했다.
"폴란드인이 멀리 극동에서까지 활약한다니 뿌듯합니다."
"이게 다 이선 공작 덕분이지요. 그래서 공작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총독의 손짓에, 한 여인이 꽃다발을 들고 나왔다.
순간 좌중의 시선은 모두 여인에게 집중되었다. 소녀티가 남은 갸름한 얼굴에 단정하게 땋은 금발, 크고 푸른 눈을 가진 첫눈에 봐도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파니(Pani, 귀족 여성의 경칭) 얀코프스카. 얀코프스키 가문의 여식이지요. 이 자리에 올만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공작께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하여 일부러 초청했습니다."
"신의 가호로, 황제 폐하를 구하시고, 반역자였던 제 오라비가 러시아 제국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해주신 공작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인은 고개를 숙이며 이선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제국의 가장 동쪽에 있는 조선의 왕자와 가장 서쪽에 있는 폴란드의 숙녀가, 러시아 제국이라는 공통분모로 한 자리에 섰습니다. 이 얼마나 보기 좋은 광경입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박수를 보냅시다."
총독의 말에 일제히 박수가 쏟아졌다.
'시바,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선은 여인의 미모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가다가도,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다. 총독은 노골적으로 자신을 다민족국가 러시아 제국의 프로파간다로 활용했다.
'조선 왕자가 러시아 황제를 구했다. 그 덕으로 러시아 내에서 고려인의 사회적 지위도 올라갔고, 조선 왕자도 고국으로 돌아가서 권좌에 오를 수 있었다. 반역자로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던 정치범도 지금은 잘살고 있다. 그러니 어떤 민족이든, 러시아에 충성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 뭐 이런 걸 보여주고 싶은 거지?'
더 불쾌한 건, 조선을 러시아령 폴란드와 한 데 묶어서, 마치 러시아 제국에 속한 나라인 것처럼 말했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나라에 맞서 싸우겠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나와 고려인들이 차르에게 충성맹세 했던 걸 잊지 마라, 그건가? 근데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내 개인의 문제지, 조선의 문제는 아니지.'
이선은 분명 러시아 국적을 갖고 러시아 귀족으로 예우 받았지만, 조선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선은 불쾌감을 느꼈지만, 꾹 참고 시선을 묘령의 여인에게 돌렸다. 그녀는 오히려 이 상황의 피해자였다.
"얀코프스카 양은 미하우 얀코프스키와 어떤 관계지요?"
"미하우는 제 사촌 오라비가 됩니다."
"아, 그렇군요. 같이 일했지만, 가족 이야기는 잘 한 적이 없어서. 이런 미인 여동생이 있다면 진작 말을 해주지, 하하."
이선의 농담에, 여인은 순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해요. 저는 1863년 이후에 태어나서, 미하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말하자면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촌 오빠와 성이 같다는 이유로 이 자리에 불려 나온 것이었다.
"얀코프스키 가문은 반역죄로 귀족 작위를 박탈당했지만, 얼마 전에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사면하시고 작위를 돌려주었습니다. 덕택에 얀코프스카 양도 귀족 여식들만 들어갈 수 있는 페테르부르크 스몰니 여학원에 입학할 수 있게 됐지요."
"모두 황제 폐하와 총독 각하의 배려 덕입니다."
여인은 감사를 표했지만, 표정과 어조가 어딘가 어색했다.
"공작님께도 감사드려야지요. 공작님이 미하우 얀코프스키를 발탁한 덕이니까."
"감사합니다, 공작님."
엎드려 절 받기 같은 기분이었지만, 이선은 정중히 답례했다.
"별말씀을요. 그는 내 동료입니다."
"페테르부르크에 언제 가십니까?"
"이번에 입학 허가를 받아서, 곧 떠날 예정입니다."
"그럼 우리와 같이 가시지요. 우리도 페테르부르크로 갈 예정이었거든요. 괜찮겠지요, 총독 각하?"
이선은 러시아 군인과 관리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는 여인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순간 보호본능이 생겼다.
"하지만 황실 열차에 아무나 태울 수는……."
총독이 난색을 보였다.
"판 얀코프스키는 내 동료니까, 동료의 가족을 예우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합니다. 이해해주시지요."
기차에 한 자리 더 제공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총독은 황제의 총아인 이선의 뜻을 따르기로 택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