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
이선은 미국의 대자본가, J.P 모건이 브라노벨에 투자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모건은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이 세계 석유 시장을 독점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브라노벨이 굳건히 버텨주기를 바랍니다."
브라노벨로서는 크게 환영할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유럽 시장으로 사업 확장에 맞춰 거액의 자본금이 필요했는데 잘 됐습니다."
"나는 중개인일 뿐이니까, 구체적인 협의는 파리에 있는 모건의 대리인과 직접 나눠 보시지요."
"파리에 있는 제 아우, 알프레드에게 전하겠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이라고 하니까, 이선은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남작님, 이제 다른 주제로 이야기해 보죠. 일전에 말하길, 내가 조선에 돌아가면 신식 군대를 편성할 예정이라 하였습니다. 연해주에서 편성했던 부대를 시작으로, 조선에서도 대대적으로 신식 군대를 편성할 겁니다."
"물론 기억합니다. 3년 전에 소총 1천 정과 3년 치 탄약, 개틀링 기관총 10문, 다이너마이트와 폭약을 극동으로 운송했지요."
루트비히는 정확한 수치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이제 그보다 훨씬 많은 무기가 필요할 겁니다. 연해주에 있을 때보다 100배 많은 백성들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군대도 100배가 더 필요하겠지요."
이선이 연해주에서 1000명의 군대를 모으려 했다면, 조선에서는 10만의 군대를 편성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예, 우리 회사는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좋습니다. 노벨 가문에게 조선 군수산업의 우선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되어 기쁘군요."
이선이 악수를 청하니, 루트비히가 손을 맞잡았다.
"저도 약속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무기를 조선에 드리겠습니다."
이선은 만족스러웠다.
'노벨은 단순한 군수상이 아니라, 혁신적인 개발자지. 슬슬 노벨이 무연화약(無煙火藥)을 개발할 때가 되지 않았나? 무연화약 개발과 납품 문제로 프랑스랑 갈등을 빚고 떠나던가. 아무튼, 노벨이 조선에 무기를 공급해준다면 믿을 만하지.'
"막대한 분량을 일일이 유럽에서 생산해서 조선으로 운송하면 번거로울 터. 곧 조선에 군수 공장을 세울 예정입니다. 부지를 무상으로 넘겨줄 터이니, 전문가를 파견해 무기 생산에 돌입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이선은 당장 제식 무기의 국산화는 이루지 못해도, 장기적으로 국산화를 원했다. 최소한 탄환 정도는 자국에서 생산하길 원했다.
'열강의 회사가 아닌 스웨덴계인 노벨을 택한 이유 중 하나지.'
러시아에서도 현지화와 기술 이전을 한 노벨이었다. 조선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 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노벨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석유산업으로 전환했다지만 그 근본이 군수산업에 있는 노벨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시장에 판로를 획득한 것이었다.
더욱이 브라노벨의 사외이사로 밀착해 있는 이선이 조선의 권좌에 앉아있는 한, 앞으로 신식 군대 편성을 위해 많은 무기가 필요할 조선에 계속 공급을 할 수 있었다.
2월 15일. 조선 사절단의 알렉산드르 2세 알현이 이뤄지는 날이었다. 1882년에 체결된 조로 수호 통상 조약을 비준한 조선측 국서 전달이 이뤄지는 날이기도 했다.
특명전권공사 이선을 필두로, 종사관 홍영식, 참찬관 민영익, 참서관 서광범 등 4인의 외교관과 변수, 김학우, 안영흠, 장무영 4인의 수행원은 겨울 궁전에 입궁했다.
겨울 궁전에 온 적이 있는 안영흠과 장무영을 제외한 나머지 사절단은,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넋을 잃다시피 했다.
"과연 대국의 황궁답군요."
"지금까지 서양을 돌며 여러 곳을 봤지만, 이렇게 화려한 곳은 처음입니다."
알현이 이뤄지는 홀은 더욱 성대했다.
조선 사절단이 홀에 들어서자, 시종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조선 왕국 특명전권공사 이선 공과 사절단 일행입니다!"
육군원수 제복 차림의 알렉산드르 2세가 각료들을 대동하고 근엄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이선과 조선 사절단은 머리를 깊이 숙이며 예를 표했다.
"조선 국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러시아 제국 황제 폐하께 수호통상조약을 비준하는 국서를 바칩니다."
"고맙소."
황제는 국서를 정중히 받아들인 후, 답례를 표했다.
"이로써 러시아와 조선, 양국의 관계는 확고한 것이 되었소. 양국의 우호가 만대에 불변하길 기원하며, 곧 짐의 특명전권공사가 귀국에 상주 사절로 파견될 것이오."
현재 조선에는 미국의 특명 전권 공사와, 영국의 총영사가 들어온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상주 외교관의 격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미국과 동급인 특명 전권 공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조선에는 중대한 외교적 성과였다. 러시아가 청과 일본에 파견한 공사와 동급을 보낸다는 의미였다.
"러시아의 우의에 감사드립니다. 국왕 폐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외교적 의전에 집착하는 임금이 정말 기뻐할 일이었다.
사절단을 위한 환영 오찬이 있었다. 식사하며 의례적인 이야기가 오고 간 후, 황제가 갑자기 제안했다.
"이곳에 여러 번 온 공작과 달리, 사절단의 신사 여러분은 겨울 궁전을 아직 살펴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오. 경들에게 특별히 내부 관람을 허용할 터이니, 시종장의 안내를 따르시오."
이선은 의미를 짐작했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사절단을 내보내겠다는 의미였다.
"그동안 공작은 짐과 다과라도 같이 합시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면서 할 이야기가 많소."
"폐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사절단 일행은 겨울궁전 관람을 위해 떠나고, 이선은 별실에서 황제와 마주 앉았다.
황제의 곁에는 아우이자 해군원수인 콘스탄틴 대공, 내무대신 로리스-멜리코프 백작, 외무대신 기르스 남작, 육군대신 밀류틴 백작이 대동했다.
'정부의 핵심인사들만 있군. 아무래도 여기서 뭔가 중대한 이야기가 있겠구만.'
이선은 인사들의 면면을 보며, 황제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공작, 먼저 축하를 해야 할 성싶군. 조선에 돌아가서 반역자들을 몰아내고, 국가를 정상화한 것을 축하하오."
황제의 축하에 이선이 겸손히 답했다.
"감사합니다. 모두 폐하의 배려가 있었던 덕입니다."
"물론 짐의 배려가 있었지. 짐의 명으로 편성한 고려대대가 아니었더라면, 공작이 권좌에 오르지 못했을 테니까."
황제는 의례적인 말이나 외교적 수사를 걷어치우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폐하의 은혜에는 늘 감사합니다만, 선후 관계가 좀 다릅니다. 반역자들을 몰아낼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실정에 실망한 백성들의 민심이 폭발한 덕이었습니다. 또한, 제 할아버님께서 왕명을 받들어 민심을 어루만지고 개혁을 이뤘기에 국가가 정상화되었습니다."
할 말은 다 하는 이선이었다.
"그래서 고려대대가 한 일이 없다?"
"아닙니다. 고려대대는 그 이후에, 나라를 지키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있습니다. 고려대대는 조선 군제개혁의 상징입니다."
"결국 고려대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않소? 권력을 장악하고 지키는 건 군대가 핵심이오. 공작의 권좌를 보호하는 건 고려대대요."
"오해입니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모든 명령은 군주로부터 나옵니다. 저는 그저 왕명을 집행하는 최고 각료회의(기무처)의 일원일 뿐이지요."
"하지만 조선의 외교정책은 공작이 이끌고 있지 않은가?"
"조선은 아직 서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서양 경험이 있는 제가 왕명을 받들어 외교정책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외교정책을 하면서, 러시아를 따돌리려고 하는 것이오? 미국 군함을 타고 미국 자본을 끌어들이며, 독일 외교 고문을 채용해 독일인들을 데려오고, 더욱이 영국 장군을 군사 고문관을 데려올 예정이지. 러시아는 귀국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있소."
"약소국의 외교는 강대국보다 더욱 험난합니다. 러시아가 소외된다고 느낀다면 제 불찰입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주독립과 세력 균형을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을 뿐입니다."
이선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외부의 압력을 받으며 국가를 개혁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처음 제위에 올라 대개혁을 추진했을 때, 얼마나 많은 난관이 있었습니까? 강대국인 러시아조차도 그러한데, 약소국인 조선은 더욱 험난합니다."
이선은 알렉산드르 2세의 성과인 대개혁을 언급했다.
"하지만 폐하께서 대개혁을 이루시어 러시아를 반석에 올려놓았듯, 조선도 같은 길을 걷고자 합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이선을 보고, 황제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좋소. 정말 외교관다운 말이야. 공작은 정말 외교관으로서 탁월한 자질을 갖추고 있소."
"과찬이십니다."
"니콜라이로부터 이야기는 전해 들었소. 영국이 조선 영토에 욕심을 갖고 있다고?"
"거문도, 즉 포트 해밀턴입니다. 그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점령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명분은 러시아의 남하로부터 조선을 보호한다는 것이지만, 러시아를 봉쇄할 목적이지요."
"해밀턴의 점령은 늘 염려하던 바이지. 영국이 조선해협을 동양의 보스포루스로 만들고 싶나 보군."
보스포루스는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콘스탄티노플 인근의 해협으로, 영국에 의한 해협 봉쇄로 러시아 흑해함대는 지중해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영국과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놓고 거대한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은 바로 알렉산드르 2세 재위기에 격화되었다.
제일 먼저 오스만 제국과 발칸, 흑해와 지중해를 놓고 시작되었다. 하지만 크림전쟁으로 러시아의 남하가 막히자, 알렉산드르 2세는 중앙아시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1860년대에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영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식민지인 인도 방위에 비상이 걸렸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괴뢰국으로 삼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했다.
1870년대에는 전선이 동아시아까지 확장되었다. 러시아가 청국령 신강, 몽골, 만주, 심지어 조선에까지 흑심을 보인다는 소문이 퍼짐에 따라,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를 봉쇄할 계획을 세웠다.
"짐이 예전부터 늘 하는 말인데. 러시아는 오스만이든, 아프가니스탄이든, 청나라든 그리고 조선이든. 본래의 국토를 침해할 생각이 추호도 없소. 짐이 조선에 뭔가를 요구한 적이 있었소?"
"전혀 없었습니다, 폐하."
"그렇소. 하지만 영국이 전 세계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흑색선전을 반복하니 어쩔 수가 없군. 만약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운운하며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면, 우리도 부득이하게 극동으로 군대를 파견하지 않을 수가 없소."
이선은 긴장했다. 그런 일만은 피해야 했다.
'조선이 두 열강이 벌이는 대리전의 무대가 될 순 없다.'
"폐하. 그래서 그런 일이 없도록, 조선은 영국이 보기에 러시아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국 장군을 군사고문관으로 데려오는 이유지요."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지. 조선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든, 영국이 원하면 강행하는 거요."
물론 황제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영국이라는 열강이 원한다면 약소국 조선은 거스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약소국에게도 약소국의 대응책이 있지.'
이선은 머리를 굴려 자신의 논리를 가다듬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하면, 두 가지 안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첫째는,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하여, 불가리아 대공국을 대하는 것과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겁니다."
황제와 각료의 표정은 순간 놀라움으로 변했다. 이선의 말은 뜻밖이었다. 불가리아는 명목상 오스만 제국 아래 자치국이나 실질적인 독립국으로,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친러 국가였다.
"조선은 러시아가 보호해 주길 원하오?"
"동양 평화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지금의 동양 평화를 흔들 나라는 일본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만, 공격성을 잠재울 수 있는 나라는 러시아뿐이니까요."
"일리가 있는 말이군."
"저와 조선 왕실은 러시아의 호의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러시아는 대국이고, 발칸을 해방시켰습니다. 작은 조선을 탐낼 리가 있겠습니까?"
말은 그럴싸하게 해도, 이건 이선이 절대로 원치 않는 해결책이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일이지만, 결국에는 절대 택하지 못한다.'
이선은 러시아가 택하지 못할 방법이라는 걸 알고 던진 제안이었다.
이미 불가리아 문제를 놓고 러시아는 영국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대립 중이었다.
영국은 오스만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를 끌어들여 불가리아를 압박했다. 열강의 압박에 불가리아도 점차 친러 정책을 포기할 분위기였다.
"러시아에 대한 조선의 신뢰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나, 그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소. 이는 주변국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조선은 스스로 자강을 이뤄내야 하오."
황제의 완곡한 거부 의사에, 이선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러시아의 지척인 불가리아에서도 뜻을 관철하지 못하는데. 조선을 보호국으로 받아들여 청, 일본, 영국을 모두 자극할 리가 있나.'
이선은 본래 자신이 하고 싶었던 제안을 던졌다.
"그렇다면 두 번째 안이 있습니다. 열강의 보증 하에,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드는 국제조약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벨기에처럼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