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99화 (99/812)

98

교육의 힘

이선이 보빙 사절단의 일정을 마쳤다고 선언하자, 사절단은 귀국을 준비했다.

이선 이하 7인만 귀국하고, 김학우를 페테르부르크에 남겨두기로 했다.

"유길준 군이 미국에서 학업을 시작한 것처럼, 김군도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학문을 익히도록 하게."

페테르부르크에 조선의 공식 외교관을 배치할 때까지, 러시아어가 유창한 김학우를 유학생 명목으로 상주시킬 생각이었다.

"필요하다면 비공식 사절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있을 걸세. 당분간 블라디보스토크의 최재형 군을 통해서 연락하지. 앞으로 유럽과 조선 사이에 전신선이 연결되면 바로 연락할 수 있을 것이고."

"알겠습니다."

"그래, 어떤 공부를 해 보고 싶나?"

"전신에 관심이 있습니다."

마침 김학우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모스부호를 비롯한 전신(電信)이라, 페테르부르크에서 전신기술을 익히기로 했다.

사대부 출신이라면 '천한' 기술을 익히려 들지 않겠지만, 함경도 중인 출신인 김학우는 기술을 익히려 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좋은 생각이네. 앞으로 조선을 진보로 이끌어나갈 건 과학기술이야. 특히 전신은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니 더욱 중요하지."

전신은 세계를 직통으로 연결한 근대의 기술혁명이었다. 앞으로 '지구촌 시대'를 여는 첫 단추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익혀보고 싶습니다."

"전신은 특성상 한문보다 알파벳이나 국문으로 치는 게 훨씬 쉽네. 그대가 모스부호에도 관심이 있으니, 국문 전신 부호에 관해서도 연구해 보게. 많이 배우고 연구하게. 그대가 돌아오면 조선 최고의 전신 권위자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날을 기대하지."

이선의 격려에 김학우가 고개를 조아렸다.

"군 대감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선은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기로 한 유길준과 러시아에서 전신 기술을 익히기로 한 김학우를 시작으로, 앞으로 각 분야에 걸쳐 서양에 유학생을 파견할 복안이었다.

귀국을 준비 중인 이선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군 대감을 뵙고 싶다는 조선 여인이 있습니다."

"여기 페테르부르크에 조선 여인이 있다고? 설마!"

이선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장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외모나 말씨나 틀림없는 조선 사람입니다."

"어서 들어오시라 하게."

장무영의 안내를 받아 이선을 만나러 온 여인은 정말로 조선 사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이선은 놀랐다.

"조선의 왕자님입니까?"

"그렇습니다. 조선 사람인가요?"

"지금은 러시아 국적이지만, 조선에서 태어났습니다. 함경도 태생입니다."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알렉산드라 세묘노바(Aleksandra Semyonova)라고 합니다."

"조선 이름은요?"

순간 여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그게 저는 7살 이후로 러시아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이선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하는데, 안영흠이 옆에서 속삭였다.

"함경도 태생으로 연해주에 이주했으면 분명 빈농의 여식이었을 겁니다. 그런 집에서 어린 딸에게 이름을 붙여 줬겠습니까?"

이선은 비로소 이해했다. 조선에서, 더군다나 시골에서 여성 인권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여인은 러시아 가정에 입양된 이후에야 비로소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터였다.

"반갑습니다, 세묘노바 양. 페테르부르크에는 어떻게 오시게 됐죠?"

이선이 정중한 어조로 말하자,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과 같은 고귀하신 분이 제게 말씀을 높이시니 황송합니다."

"여긴 러시아인데, 조선의 신분제를 적용할 것 없지요. 편하게 이야기합시다."

이선이 다과를 권하면서 이야기를 청하자, 알렉산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조선에서의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첫 기억은 가족들과 함께 두만강을 넘는 거였어요. 엄청나게 추운 겨울이었죠."

알렉산드라는 1869년, 이른바 '기해년 흉년' 시기에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했다.

하지만 이듬해 전염병으로 부모가 죽고, 7살의 아이는 고아가 됐다. 이렇게 고아가 된 조선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를 딱하게 여긴 러시아 관리들이 입양했는데, 알렉산드라는 그중에서도 가장 운이 좋았다. 연해주 군정 지사 크로운 제독의 부관, 세묘노프 대령에게 입양된 것이다.

세묘노프는 알렉산드라를 교육했고, 그녀가 학업에서 우수한 성취를 보이자 당시로는 드문 결정을 했다. 페테르부르크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여성, 그것도 극동 출신 동양인 여성이 고등 교육을 받는 건 극도로 드문 일이었다.

이선은 알렉산드라의 인생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선인 고아가, 러시아 가정에 입양돼서, 페테르부르크에까지 유학 왔다고? 최재형 같은 사람이 또 있었네. 그럼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 아닌가? 왜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을까?'

나름 이 시대 역사에 정통한다고 해도, 이런 개인의 일까지는 모두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현재 저는 바실리예프 사범여학교에 재학 중입니다. 왕자님에 관한 소식은 진작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황제 폐하를 구한 공로자시라고. 우리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큰 자랑인지 모릅니다. 진작 찾아 뵙고 싶었지만, 기숙학교라 방학이 돼서야 찾아뵐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더 기쁘군요.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힘들었을 터인데. 세묘노바 양이야말로 동포들의 귀감이 될 만합니다."

이선의 치하에 알렉산드라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저야 운이 좋았죠. 양부모님 덕분에……."

"분명 운이 좋았지만, 그 이상은 실력입니다. 세묘노바 양이 지금까지 노력을 해왔으니까 이 자리에 있는 거죠."

알렉산드라는 이선의 격려가 진심으로 기쁜 듯이 밝게 웃었다. 이선도 기분이 좋았다.

"학업은 힘들지 않습니까? 학비는 괜찮은가요?"

"장학금을 받고 있습니다. 생활비는 양부모님께 너무 신세를 질 수 없어서, 가정교사 일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자세군요. 사범여학교 학생이라면 진로는 교사인가요?"

"예, 졸업하면 초등교사 자격증이 주어집니다."

이선은 알렉산드라가 얼마나 노력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녀가 꼭 필요한 인재라고 느껴졌다.

"내가 극동 전권 위원으로 재임하면서, 학교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남녀 구분 없이 취학연령의 아이들은 학교를 보내게 했지요.

"예, 저도 이야기 들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고 계세요."

"위정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지금 학생 수와 비교해 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조선인 교사를 막 양성하고 있는데, 시일이 걸리겠죠. 세묘노바 양은 혹시 연해주의 조선인 학교에서 근무할 생각이 있습니까?"

아무리 러시아인이 되었다지만, 알렉산드라는 본질에서 조선인이었다. 매우 드문 조선 여성 엘리트로서 그녀 역시 강한 의무감을 갖추고 있었다.

"저 역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포들을 위해 제 지식과 경험을 쓰고 싶습니다."

"역시, 훌륭한 자세입니다. 진정 동포의 귀감이 될 겁니다. 신분 고하와 성별에 관계 없이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면, 교육을 통해 해방이 이뤄질 겁니다. 나를 도와 연해주 조선인 사회를 이끄는 표트르 최, 최재형 군은 노비의 아들입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번듯이 성공했지요. 그게 바로 교육의 힘입니다."

이선은 장차 조선에서 국민교육을 할 생각이었고, 연해주에서 먼저 첫발을 떼었다. 연해주 고려인 사회는 특성상 조선 사회의 하층민이 다수였지만, 이들이 근대식 교육을 통해 입신양명을 이뤄내어 모범이 되길 희망했다.

'노비 출신이든 여성이든, 얼마든지 재능과 노력 여하에 따라 엘리트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 노비의 아들 표트르 최와 고아 여성 알렉산드라가 새 시대의 상징이 되겠지.'

"교육의 힘으로, 우리 동포들 사이에서 세묘노바 양과 같은 성공담이 더욱 많아지겠지요. 앞으로 기대가 됩니다."

이선이 서양식으로 악수를 청하자, 알렉산드라는 황공한 듯이 손을 잡았다.

"왕자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뜻밖의 만남에 이선은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본 느낌이었다.

여성 교육이라고 하니까, 이선은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

이선은 마린스키 황실극장 공연에 초청을 받았다. 은근히 이선의 파트너를 희망하는 수많은 러시아 귀족 영애들을 제치고, 마르가리타에게 파트너를 청했다.

"제, 제가 가도 될까요?"

이선의 파트너 초대에 마르가리타는 기쁘면서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러시아 황족과 고위 귀족들이 오는 자리에 자신이 껴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내 파트너를 내가 고른다는 데 괜찮죠."

"저, 제 가문도 유서 깊은 가문이에요! 500년 전에, 제 선조가 독일기사단의 침략으로부터 폴란드 국왕의 목숨을 구하는 공을 세웠어요. 왕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기사 작위와 방패와 단검이 새겨진 문장을 내렸죠. 그게 바로 우리 가문의 뿌리랍니다."

마르가리타는 자랑스럽게 방패와 단검이 새겨진 가문의 문장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가문이 러시아 귀족들에게 밀릴 것이 없다는 자부심에, 이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오, 비슷하군요. 500년 전 우리 가문의 선조께서는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했지요. 그리고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답니다. 그 왕조가 500년째 내려오고 있지요."

"와, 정말 유서 깊은 왕조네요."

마르가리타는 이선이 새삼 왕자라는 것이 놀라운 듯 말했다.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근데 이대로 가다간 망할 판이야. 망하지 않게 하려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노력한다.'

이선은 사절단과 함께 황실극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특이한 복색을 한 조선 사절단 못지않게, 이선이 대동한 파트너에게도 쏠렸다. 그들이 아는 페테르부르크 귀족사회의 인물이 아닌 만큼, 그들의 시선은 묘했다.

마르가리타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당혹스러워했다.

"아무래도 제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나 봐요."

"뭐, 신경 쓰지 마세요. 난 저런 시선 굉장히 익숙하니까. 동양인이 흔치 않으니까 어딜 가든 시선 집중이죠."

이선은 처음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이야, 어서 오게, 공작. 어서 오십시오, 사절단 여러분. 어서 오시오, 마드모아젤."

니콜라이가 웃으면서 이선과 사절단, 마르가리타를 환영했다. 마르가리타가 압제자라고 여기는 러시아 황실을 좋아할 리 만무했지만, 자신을 환영하는 대공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주최자인 대공이 환영하는데, 더 이상의 뒷말은 없었다.

러시아의 자랑, 마린스키 황립 극단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햐, 이걸 직접 볼 수 있을 줄이야. 이 시대에 온 보람이 있군.'

러시아의 대음악가, 표트르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발레 '백조의 호수'. 이선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공연을 보았지만, 그의 곁에 있던 사절단의 표정은 점차 충격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이선을 포함한 관객들은 열렬히 박수를 보냈지만, 사절단은 굳어 있었다.

"군 대감, 이게 대체 뭡니까?"

"아, 사전 설명을 했어야 했나. 발레라는 것인데……."

"아니, 어떻게 젊은 여인네가 헐벗고 나와서 저렇게 깡충거리면서 다리를 올리고 다닙니까?"

"뿐입니까? 사내가 여인을 들었다 놨다 하고! 가련한 여인을 희롱하는 걸 좋다고 보는 러시아 귀족들은 군자가 아니라 짐승들이로군요."

"……."

뉴욕에서 뮤지컬을, 파리에서 오페라를 보면서 감탄했던 사절단이지만, 발레에는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러고 보니 1896년에 민영환이 러시아에서 발레를 처음 보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던가. 조선 사대부들에겐 용납이 안 되는 모양이구만.'

"그렇게 보면 안 되고, 이건 러시아의 아주 고급스러운 귀족 문화입니다. 황실에서 직접 후원하는 거라고. 황태손의 반응을 보면 모르겠습니까?"

발레 매니아인 니콜라이는 열렬히 환호성을 보내며 좋아했다.

그래도 사절단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서양에 대해 긍정적인 개화파라 할 지라도, 유교 교육을 받은 사대부에게 발레는 이해할 수 없는 문화였다.

그나마 개중에서 가장 적응이 빠른 서광범이 말했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아름다웠습니다."

"그래, 그게 자연스러운 감정이지요. 여러분은 다시 외교관으로 서양에 나갈 기회가 많을 겁니다. 서양의 고급 문화에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요. 앞으로 배워 나갑시다."

비로소 상황을 이해한 마르가리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 분들, 충격이 컸나 보네요."

"문화 차이죠. 동양에는 이런 문화가 없으니까."

"이해가 돼요. 서양인들도 동양에 편견이 많으니까요. 왕자님 덕에 서양인들이 동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을 거예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다른 문명을 이해하려면, 서로 알아야 해요. 그래서 지금 조선은 서양에 대해 많이 익히고 있죠."

"저도 조선에 관해 알고 싶어졌어요."

"호오."

이선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마르가리타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그, 제, 제 사촌이 조선에 있으니까요! 그래서 언젠가 조선에 가보고 싶어졌어요."

얼굴이 빨개진 마르가리타를 보면서, 이선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얀코프스키 가문의 일원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특히 얀코프스카 양은 열렬히 환영하지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일단 학업부터 마쳐야 갈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중요한 건 공부니까요. "

마르가리타의 다짐에 이선이 웃었다. 그는 학구열에 불타는 여인이 좋았다.

"물론 그래야죠. 얀코프스카 양은 민족을 위해 일하는 인재가 되길 바라니까. 열심히 공부해요. 나는 교육에 국가의 미래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선은 진심으로 교육의 힘을 믿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