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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불 수호 통상 조약
보빙사절단의 복명을 마치고, 이선은 즉시 통리 교섭 통상사무 아문 독판(외무아문)직으로 돌아왔다. 외무아문 독판인 이선은 조선의 외교를 총괄하게 되었다.
그동안 독판 직을 대행하던 수(首)협판 김홍집과 협판 묄렌도르프, 협판 김옥균이 이선의 보좌관이 되었다. 실무진인 참의와 주사에는 서광범과 변수 등 보빙사로 다녀온 개화당 인사들이 맡게 되었다. 조선에 이들만 한 외국 전문가가 없었다.
"그동안 노고가 많았습니다. 자, 그럼 해야 할 일을 조속히 시작해 봅시다."
가장 먼저 이뤄진 일은 이탈리아와의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이었다. 이선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주청 이탈리아 공사 데 루카(F.de.Luca)가 조선으로 들어와, 수협판 김홍집과 협상을 거의 마친 상황이었다.
조선과 이탈리아 사이에는 특별한 이의가 없었으므로, 조미조약에 근거하여 신속히 체결되었다. 6월 26일, 조이 수호 통상 조약이 반포되었다.
'이탈리아는 역시 수월하군. 문제는 그다음인데…….'
이선이 조선에 귀국하고 얼마 뒤, 주일 프랑스 공사 시엔키에비치(J.A.Sienkiewicz)가 인천으로 입국하여 협상을 개시했다.
원래 주청 프랑스 공사 쥘 파르노트르(Jules Patenôtre)가 협상의 전권으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베트남 문제를 놓고 청과 논의가 길어져서 시엔키에비치가 대신 온 것이었다.
외아문 참의 김옥균이 직접 인천으로 가서 시엔키에비치를 서울로 호종했다.
"조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사. 조선은 처음이시지요?"
"예, 그렇습니다. 프랑스 공화국을 대표하여 조선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이선과 시엔키에비치는 반갑게 악수를 했다.
"혹시 공사님은 조상이 폴란드 사람 아닙니까?"
이선의 짐작에 시엔키에비치가 놀라워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쿠오바디스로 유명한 폴란드 소설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랑 성이 같으니 알지.'
"시엔키에비치란 성이 폴란드 성으로 알고 있어서, 그렇게 추측했습니다."
"이야, 동양에서 그걸 바로 알아보는 사람을 처음 보는군요. 맞습니다. 제 선조는 폴란드 귀족으로 나폴레옹 1세의 군대에 복무했습니다. 그 후로 프랑스에 정착했지요."
폴란드의 멸망 이후, 폴란드인 상당수가 프랑스로 망명한 바 있었다.
"폴란드 군인, 특히 기병들이 프랑스를 위해 다수 복무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조선군에 편입된 연해주 고려인의 기병대를 지휘한 게 바로 폴란드 사람 얀코프스키입니다."
"아, 이야기 들었습니다. 폴란드인들은 자국보다 해외에서 더 성공하는 경향이 있지요. 아무튼 반가운 이야기군요."
시엔키에비치는 내심 만족했다. 가문이나 선조에 대해 언급하는 건, 대개 귀족이나 상류층 출신인 직업 외교관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었다.
이선이 서양의 외교관습에 밝은 덕택에, 사소한 것 하나라도 협상에 유리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곧 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조선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지요. 공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전쟁을 막기 위해 외교관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시엔키에비치는 외교관답게 외교적 수사를 사용했다.
아직은 청과 프랑스 간에 협상이 이뤄지고 있었다. 외교를 전담하는 공친왕과 이홍장이 전쟁 불가론을 내세워서 조정 내부의 전쟁 여론을 잠재우려고 노력했다.
양국 간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으므로, 명목상 종주국인 청도 조선과 프랑스의 조약 체결을 문제 삼지 않았다.
'8월에 전쟁이 일어나던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조속히 협상을 마무리 지어야겠다.'
프랑스와의 협상도 대동소이했다. 다만 프랑스와의 조약이 지체된 핵심 요인, 즉 종교의 자유 문제를 놓고 협상이 지연되었다.
"종교의 자유는 이미 파리에서 각하와 공화국 외무부 간에 합의된 사항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약에 명문화하자는 데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조선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할 것이지만, 이를 명문화하기에는 조선 내에 정치적 문제가 있습니다. 비슷한 문구로 대체하지요."
시엔키에비치는 외무부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조약에 넣으라고 훈령을 받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선은 대원군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 비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되, 공개적으로는 알리지 마라. 이 문제로 사대부들이 짖어대면 긁어 부스럼이다.
이선은 대원군, 아니 조정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재의 조정은 종교 문제에 관해 실리적인 입장이었지만, 사대부들을 구태여 자극할 생각도 없었다.
"조선과 프랑스 간에 종교 문제로 전쟁을 치른 게 불과 18년 전 일입니다. 아직도 기독교와 프랑스를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질적(de Facto)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되, 법적(de Jure)으로는 잠시 미뤄두려고 합니다."
이선의 부관인 묄렌도르프도 거들었다.
"으음……."
"이 문제로 협상이 엎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다른 서양 국가들과 비교해서 수교가 2년이 지체됐는데, 더 미룰 이유가 있습니까? 귀국 입장에서도 실질적인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좋은 일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혼자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외무부에 보고해서 훈령을 기다리지요."
- 러시아와 미국은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외교와 재정에 고문관을 파견하고, 영국은 군사고문관을 파견했습니다. 공화국만 홀로 조선에서 뒤떨어져 있습니다. 특히 이대로 청과 전쟁이 일어나면 조선과의 조약은 더욱 연기될 것입니다.
조선의 외교 당국자가 서양과 기독교에 호의적인 점을 생각하면, 약속을 뒤엎지는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조속한 승인을 바랍니다.
이선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이미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와 비교해서 조약 체결이 2년이나 지체된 프랑스였다.
아무리 프랑스의 주된 관심사가 인도차이나에 있다지만, 다른 열강들과 비교해 조선과의 조약을 무한정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도 있었다.
시엔키에비치는 외무부로부터 양보하라는 훈령을 받은 후, 조약의 문건을 협상했다.
몇 번의 줄다리기 끝에 최종적으로 조불수호통상조약 최종안이 합의되었다.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은 모범이 된 조미 조약과 대동소이했지만, 특별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제1관
1. 대조선국 대군주와 대법민주국〔大法民主國〕 대통령〔大伯理璽天德〕은 양국의 인민과 피차 모두 영원히 평화롭고 화목하게 지내며, 이 나라 인민으로 저 나라에서 사는 자는 그 나라에서 본인과 가족의 재산상 이익을 적절히 보호해준다.
……
제9관
2. 법국 인민으로서 조선국에 와서 언어와 문자를 배우거나 가르치며 법률과 기술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보호하고 도와줌으로써 양국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며, 조선국 사람이 법국에 갔을 때에도 똑같이 일률적으로 우대한다.
표면적으로는 '언어와 문자를 배우거나 가르치며 법률과 기술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적어놨지만, 실질적으로 이에 해당하는 조선 내 프랑스인은 가톨릭 사제들이었다.
프랑스는 이를 선교의 자유로 받아들였고, 조선 조정에서도 서양과의 학술 교류로 받아들여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실질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조치였다. 이선은 대원군과 임금에게 차례대로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을 보고했다.
"신 이선이 삼가 아룁니다. 오늘 오시(午時)에 전권 대신 독판 교섭 통상사무 이선과 프랑스 전권 대신 시엔키에비치가 함께 외무아문에서 의정한 통상 조약에 조인합니다."
조약의 문구를 살펴보던 대원군은 만감이 교차했다. 천주교를 박해하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인 장본인인 대원군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프랑스와의 조약을 체결을 추인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조약의 추인은 오직 왕명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 오직 성상의 뜻을 따를 뿐."
대원군은 최종 추인을 임금에게 돌렸다. 사실상 임금이 하는 일이라곤 국서에 도장 찍는 거 말고는 없었지만, 모처럼 목소리를 냈다.
"제9관 2항은 실질적으로 선교를 허용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는 학문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의미로써……."
이선과 함께 온 김홍집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임금은 말을 끊었다.
"돌려 말할 것 없다. 사대부의 반발이 클 터이니 이런 항목을 넣은 것이겠지. 하지만 과인은 이를 승인한 바가 없다. 천주교를 사학으로 몰아 그 사제와 신자를 처단하고, 금령으로 엄금해온 지가 오래이다. 선대왕의 일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과인의 재위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 이를 어찌 하루에 뒤엎겠는가?"
"전하, 그때와 지금은 정세가 바뀌었으니 부득이하게……."
"과인 역시 서양과의 수교가 불가피하고, 법국이 수교의 조건으로 종교의 자유를 내거는 것도 알고 있다. 과인의 이름으로 종교의 자유를 얼마든지 허용해도 좋다. 과인은 저들의 종교에 특별히 관심이 없고, 악감정도 없다."
임금은 관대한 의사를 보이더니,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의 본질을 지적했다.
"병인년의 박해는 전적으로 대원군이 하신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대원군이 이를 뒤엎는 건 모순이 아닌가? 도대체 과인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정치는 생물이라더니, 결국 핵심은 정치 문제구만. 원래대로라면 대원군이 반대하고 고종이 지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뭐, 과인이 하는 일이라곤 어차피 도장 찍는 일이니까. 옥새라면 얼마든지 찍어주겠네. 경들이 좋을 대로 하게."
임금은 냉소적인 어조로 교지에 옥새를 찍었다. 임금이 이런 식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임오군란 이후 처음이었다. 이선과 김홍집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어전에서 물러났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7월 25일,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이 조인되었다. 이선은 조불 수호 통상 조약 체결 기념 만찬에, 조선교구 주교대리 백규삼, 장 블랑을 초대했다.
"이제 조선 왕국과 프랑스 공화국은 불행했던 과거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 진전의 장을 열었습니다."
이선은 프랑스 사절단과 건배를 나눈 다음, 블랑과 대화를 나눴다.
"신부님, 리델 주교가 보낸 편지를 받았지요?"
"예, 그렇습니다."
블랑은 리델 못지않게 유창한 조선어를 구사했다.
"신부님도 아시다시피, 프랑스와의 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는 실질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사제들이 조선의 언어와 문자를 배우고 가르치는 건 사실이지요. 나는 여러분을 학자와 동등하게 대우하겠습니다. 리델 신부가 시작했던 조선어 사전과 문법서 편찬이 계속 이뤄지길 바랍니다."
실제로 신부는 학자나 다름없기도 했으니, 사제를 학자로 분류한 이선의 판단은 정확했다.
"왕자님의 호의와 결단을 교회는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왕자님은 동양의 콘스탄티누스이십니다."
블랑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나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제 천주교단에서도 약속을 지키길 바랍니다. 결코 조선의 법률과 전통에 마찰을 빚으면 안 됩니다. 정세가 무르익으면, 종교의 자유는 법적으로도 완전히 승인될 겁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 신자들은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이 나라 조선의 평화와 번영을 기도하며, 조선을 이끄는 국왕 전하와 왕자님께 주님의 가호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블랑은 대원군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이선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불과 20년도 안 된 과거에, 천주교 신자 8000명이 학살당했으니 대원군에게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대원군의 손자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게 되었으니, 천주교인 입장에서는 콘스탄티누스의 개심과도 같은 일이었다.
블랑 신부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비공식적이나마 인정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신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이제 마침내 지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까? 형제들의 순교가 헛되지 않았군요!"
"천주님! 마침내 천주님의 뜻이 이뤄졌습니다!"
"조선의 당국자가 우리를 긍휼히 여길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천주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시다."
블랑은 먼저 신에게 감사를 돌린 후, 당부의 말을 전했다.
"대원군의 장손이자 국왕의 장자인 완화군이 교회에 호의적인 건 천만다행입니다. 앞으로 완화군이 국정을 맡게 되면 종교의 자유는 완전히 인정될 것입니다."
신자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 완화군께 천주님의 가호가 있으시길!"
"그러니 그때까지, 절대로 조선의 법률과 갈등을 빚으면 안 됩니다. 은인자중합시다. 또한, 완화군은 교회가 조선과 프랑스를 잇는 가교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는 조선을 프랑스에 소개하고, 프랑스에 조선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고자 합니다. 그 시작은 언어입니다.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가 많아지면, 자연히 교회에 대한 관심도 커질 겁니다. 이제 교회는 조선에서 개화와 진보의 상징이 되어야 합니다."
블랑은 이선과 조선판 정교 협약을 비밀리에 합의했다. 당분간 교회는 기독교 교리 그 자체보다, 서양의 문물을 전파하는 창구로서 역할을 맡아달라고 했다.
먼저 금령이 해제된 일본과 청국에서도, 교리 그 자체보다 서양에 관한 관심으로 교회에 접근하는 이들이 많았으니 교회 처지에서도 바람직한 이야기였다.
기독교가 '학문의 자유' 형식으로 금령이 해제되었다는 소문은, 또 다른 종교 집단에 전달되었다.
가장 대중적이지만, 숭유억불의 나라인 조선에서 오랫동안 탄압받아 온 불교가 재흥을 꿈꿨다.
또한, 삼남의 백성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지만, 역시 사교로 지목되어 탄압당하고 있던 동학(東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