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11화 (11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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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흉오적(三凶五賊)

"알다시피 조선은 유교 국가요. 세도정치를 거쳐도, 결국 군주가 권력을 행사하는 형태였소. 왕정복고의 형식인 명치유신처럼 가면, 조선에서는 전제군주제로 귀결될 거요. 그러니 궁정 정치로 해결할 일이 아니오. 유럽처럼 제도적 뒷받침을 통해 군권을 제한하고, 정권을 창출해야 하오."

이선의 설명에 김옥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경솔하게 생각만 앞섰던 모양입니다."

"나 역시 하루라도 빨리 본격적인 개화를 추진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고균과 생각이 같소. 다만 너무 서두르려다가 대사를 그르칠 수가 있소. 작금의 조선에서 극단적인 권력 투쟁을 부릴 여유가 없으니. 약간 돌아가더라도 확실한 길을 택합시다."

김옥균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도 우려를 표했다.

"개화를 완고히 반대할 이들은 어찌하시렵니까? 이들의 저항이 날로 거세질 것입니다."

"어차피 권력 가진 자들 중에 대놓고 저항하는 자는 없소. 소위 사대부들, 그중에서도 지방 향반들이나 짖어대고 말겠지. 그래서 중추원을 개설해서 공의를 대표하는 자문기관으로 둘 생각인 거요."

"그렇다면 중추원이 반대 세력의 온상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통제해야지. 의관은 우리를 지지할 사대부로 채워야겠지. 중추원은 대원군께 맡길 생각이오."

이선은 중추원이 '공의(公議)'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정부 시책을 지지하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대원군께서 여론을 통제하는 능력은 탁월하시지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다만……."

김옥균이 목소리를 낮췄다.

"저뿐만 아니라 개화당 동지들은 모두, 보수파들을 조정에서 밀어내고 군 대감과 개화당이 요직을 맡아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은 일치합니다. 차후에 보수파 관료들을 모두 중추원 의관으로 보내서 명예롭게 은퇴시키는 방법도 좋지 않겠습니까?"

"중추원의 설립 목표 중 하나지."

이선이 씩 웃자, 김옥균도 따라 웃었다.

"하하, 과연 대감이십니다. 하루라도 빨리 중추원을 설립할 준비를 해야겠군요."

"때가 되면 그리해야겠지요. 중추원 관제뿐만 아니라 정치제도 전반에 대대적인 변화를 줄 생각이오. 올해가 가기 전에 기무처에서 논의할 계획이니, 고균이 개화당의 힘을 모아 주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생과 개화당 동지들은 군 대감과 조선의 경장을 위하여 늘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김옥균은 이선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조선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열망은 이선이나 김옥균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선이 급진파인 김옥균보다도 훨씬 강했다.

'장차 국민국가로 나아가려면, 개혁을 확실하게 해 나가야 해. 고종을 내세워 어설프게 타협하는 형태로는 어림도 없다. 힘과 명분이 충분히 축적되면, 그때 칼을 뽑아 든다. 그전에는 함부로 칼을 휘둘러선 안 되지.'

군제 개혁에 이어 재정 개혁이 반포 이후 전국적인 시행에 돌입했다.

어명을 받아 파견된 관리들이 교지를 전국 방방곡곡에 붙이고, 개혁을 진행했다.

"환곡을 폐지한다! 앞으로 환곡은 오직 구휼의 목적으로만 사용된다. 각 지방의 수령은 결코 사사로이 환곡을 사용해선 안 된다. 앞으로 세금은 토지세와 호구세만 받는다. 수령은 결코 무명잡세를 다시 만들면 안 된다. 이를 어기는 자는 엄히 처벌받을 것이다."

제일 먼저 환곡이 폐지되고, 온갖 잡다한 무명잡세가 폐지되었다. 가을 추수철을 맞아 소식을 전해 들은 백성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환곡이 영원히 없어진다고? 이제 더 이상 환곡 가지고 사또와 아전놈들이 장난치지 못하겠군!"

"아아, 봄만 되면 환곡이랍시고 강제로 뜯어가는 꼴을 다신 안 봐도 되겠군."

"앞으로는 별 거지 같은 세금들도 안 낸다고 하네. 땅과 사람으로만 세금을 받는다고 하더라고."

"오오! 나라가 늘 백성들 괴롭히는 일만 하다가, 임오년 이후로는 백성을 위한 일을 하는구먼."

"이게 다 세상이 한번 뒤집힌 덕이지."

"토지와 호구 조사를 실시한다. 이는 정확한 조세를 위한 일이니, 각 민호는 성실히 조사에 응하도록 하라."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를 시작으로, 지역별로 토지와 호구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선은 3년마다 호구 조사를 실시, 매 가호에서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에 따라서 가족과 노비를 기록한 '호구 단자'(戶口單子)를 소속 군현의 수령에게 제출하였다.

1882년에 진행했던 호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의 총 호구수(戶口數)가 179만 3,922호이고, 인구수는 남녀 합하여 671만 7,453명이었다.

하지만 일부만 호구 조사에 응했으므로, 이는 부정확한 통계였다. 실제로는 그보다 1000만 명은 더 많으리라는 추정이 있었다.

백성들은 호구에 오르기를 싫어했다. 세금과 부역 등 온갖 잡다한 의무만 주어지고, 권리라고는 없으니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호구(戶口) 조사? 거기에 응하면 그야말로 호구(虎口) 아닌감?"

"완전 호구 되는 거지."

"어허, 모르는 소리. 이번에 나라에서 세금을 크게 경감해 주지 않았나. 그 대신 정확한 호구를 확인해야 한다는군. 앞으로 호구에 오르면 나라로부터 이런저런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데."

"혜택이라니?"

"나도 몰라. 그렇다고 하더라고. 아무튼 부호는 세금을 더 걷고 우리 같은 가난뱅이들은 덜 걷는다고 하니 손해는 아니지."

"여태껏 이만큼 백성을 신경써준 조정이 있었나? 나라에서 선정을 베풀면 마땅히 우리도 따라야지."

"맞아, 나라가 곧 하늘인데."

예년과 다르게, 백성들은 호구조사에 순순히 응했다.

기무처는 전국적으로 집계하여 1885년에 발표할 인구조사는 2배 이상 늘어나리라 기대했다.

인구가 곧 국력의 기반인 시대에, 정확한 인구의 확보는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중대한 행보였다.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개혁에 반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온갖 꼼수로 사복을 채워오던 지방 수령들과 아전들이 가장 먼저 불만을 터뜨렸다.

"아니, 지금껏 오랫동안 누려오던 권리를 갑자기 빼앗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온갖 세금은 다 없애고, 그나마 다 호조로 싣고 간다니. 대체 우리는 뭘 먹고 살라는 건가?"

"이럴 거면 당장이라도 사또 자리 때려치우는 게 낫겠군."

수령들 사이에서 연명으로 개혁의 시행을 늦춰달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백성들을 위한 개혁을 대놓고 반대한다고 할 수는 없으니, 행정의 미비를 들어 미뤄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소를 받은 기무처는 단호했다.

"그만두고 싶으면 당장이라도 그만두면 된다. 상소 올린 자들을 모조리 체직(遞職)하라."

대원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반대하는 자들을 모두 경질했다.

총대를 멘 자들이 모조리 경질되자, 그 단호한 조처에 수령들은 입을 다물었다.

"조정에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자! 스스로 물러납시다!"

수령을 못 하겠다고 그만두는 자들이 속출했으나, 그건 오히려 이선이 바라던 바였다.

"교체하기 전에 알아서 물러나 준다니 더 고맙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이선은 소장파 관료들을 지방관으로 보내 개혁을 시행하게 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푸시오. 그대들이 지방 행정에서 경험을 쌓아 돌아오면, 고과(考課)에 따라 중앙에서 요직에 발탁할 것이오."

"성심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경기도 관찰사로 임명된 박영효를 필두로, 지방 행정의 대대적인 혁신이 시작되었다.

인적자원을 조정의 뜻대로 교체할 수 있는 수령들과 달리, 향촌 사회를 주름잡고 있는 양반 지주들은 변화에 저항했다. 특히 양전 사업으로 토지조사가 시작되자 반발이 터져 나왔다.

"큰일 났소. 은결(隱結)을 다 찾아내서 세금을 물린다는군."

"호조 참판 어윤중, 지주들에게서 세금 걷지 못해 안달 난 그 지독한 작자라면 그러고도 남지."

"이건 시작에 불과하오. 일설에 따르면, 기무처를 주도하는 완화군과 개화파 애송이들이 지주들 토지를 다 뺏으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에이, 설마 그러려고?"

"왕토사상(王土思想)을 내세워 국유화한다는 거지. 양전은 그걸 위한 사전 작업이라 이거요."

좌중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미쳤나? 이 나라 조선의 땅을 전부 다 나라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조정에 완화군을 막을 사람이 그렇게 없단 말이오?"

"완화군의 뒤에는 대원군이 있소. 대원군, 그 무지막지한 노인네가 전국에 있는 서원 다 박살 낸 거 기억하지요? 토지 몰수도 못할 것도 없지."

"서원 철폐까진 참아도 토지몰수는 못 참지. 들고 일어납시다! 상경해서 우리 힘을 보여주자 이거요!"

강경파의 선창에, 대부분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막상 움직이자니 조정의 힘이 두려웠다.

"아니, 아직 시작도 안 한 일을 소문만 믿고 움직이자고?"

"미리 선수를 쳐서 그딴 일은 못 하게 막아야지."

"그럼 대체 뭘 명분으로 내세워 막자는 거요?"

"요새 천주쟁이들이 제 세상 만난 것처럼 돌아다니는 거 봤지요? 공공연히 천주 야소 외쳐도 관아에서 봐줍디다."

"뭐, 대원군 물러나고 사학 탄압은 중단된 거 아니었소?"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번에 법국과 수교하면서 천주교 전교를 허용했다는 거요. 아니, 500년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도 아니고 천주쟁이들을 용인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절대 안 되지!"

"알겠소. 그럼 그걸 명분으로 삼으면 되겠군."

"좋소. 힘을 모아봅시다."

갑신년 8월 15일(1884년 10월 3일).

추석을 맞이하여 한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개혁 조치가 잇달아 시행되면서 도성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찼다.

도성에 들어온 한 무리의 유생들이, 광화문 앞에 거적을 깔고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한양 인근인 경기도에서 온 유생들이었다.

"전하! 신등은 비록 벼슬은 없으나, 나라의 일이 걱정되어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조정 관료란 자들이 개화라는 명목으로 양이들과 손을 잡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사학까지 용인하려 합니다. 무군무부의 이단을 용인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더욱이 법국 오랑캐는 불과 20년 전에도 조선을 침범했던 양이입니다. 지금도 안남을 침범하고, 중국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어찌 이런 침략자들의 비위를 맞춰 주려고 사학을 용인한단 말입니까?"

천주교 용인을 규탄하던 유생들은, 비난의 방향을 기무처로 돌렸다.

"이 모든 일은 기무처에서 꾸몄다고 들었습니다. 나라의 군주가 계시거늘, 어찌하여 기무처가 모든 일을 다 한단 말입니까?"

"특히 완화군 이선은 서양인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소두(疏頭)의 강경 발언에 유생들도 놀랐다.

"이봐, 강약 조절해야지. 완화군이 실세인데 대놓고 그리 말하면 어쩌나?"

"흥, 선비가 돼서 어찌 권력의 눈치나 보란 말인가?"

하지만 소두는 이왕 엎질러진 물,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선은 성상의 장자로, 사사로이 외국으로 도주한 것만으로도 이미 큰 죄입니다. 조선을 위협하는 북방의 아라사로 가서, 그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이선이 아라사 황제와 어떤 밀약을 맺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양이에게 저리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미, 미쳤나! 입 좀 다물게 해!"

유생들이 소두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바로 이선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 어지간히 나를 미워하는군."

멀찌감치 시위를 지켜보던 이선의 말에, 김옥균이 답했다.

"요새 사대부들 사이에서 삼강오륜을 지키려면 삼흉오적(三凶五賊)을 몰아내야 한다는 말이 돈다더군요."

"삼흉오적? 그게 누구요?"

"오적이란, 김홍집, 어윤중, 홍영식, 박영효, 그리고 저를 일컫습니다."

"개화 정책을 대표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거로군. 그럼 삼흉은?"

김옥균이 말하기를 꺼리자, 이선이 다시 물었다.

"개의치 말고 말하시오. 아마 한 사람은 나겠지?"

"송구합니다. 이하응, 이재면, 이선을 군주의 권위를 빼앗고 기만하는 삼흉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극렬한 비난에도, 이선은 화를 내기는커녕 차갑게 웃었다.

'개혁을 향해 전진하면, 반동 세력의 반발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

"왕의 생부와 형과 아들더러 삼흉이라. 이 정도면 그따위 소문을 내는 자들은 역적으로 규정해도 되겠군."

"그러하옵니다. 발본색원해야지요. 광화문 앞에 모인 저자들부터 체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자들이야 그저 불빛에 달려드는 불나방들이지. 뒤에서 조종하는 자들을 잡아야 할 것이오."

이선은 냉소를 지었다.

"뭐, 그래도 본보기는 보여야겠지. 어디, 저들에게 그만한 기개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군. 선비로서 죽을지언정 할 말은 해야겠지?"

이선은 시위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김옥균이 뒤따르고, 장무영이 급히 칼을 잡고 그의 곁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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