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13화 (113/812)

112

적의 존재

1884년 동아시아를 둘러싸고 열강들은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청불전쟁은 동양 정세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함대가 북경까지 공격한다든가, 일본이 프랑스에 합류해서 청국에 선전포고한다든가 하는 풍설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는 자연히 조선의 운명에도 연결이 되었다. 동양에서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갖고 있는 조선은 필연적으로 국제 정세의 변화에 영향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무렵, 베트남과 중국 해안 일대는 전쟁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10월 2일, 청-베트남 국경 인근의 랑선(Lang Son)에서 프랑스의 통킹 원정군 3000여 명과 청의 광서(廣西) 주둔군 6000여 명이 충돌했다.

2주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10월 15일 프랑스군의 승리로 전투는 종결되었다.

청군은 상당한 손실을 보고 진영을 버리고 후퇴했다. 해상에 이어 육지에서도 프랑스군이 우세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바다에서 반전이 발생했다. 랑선 전투가 시작된 날, 대만의 단수이(淡水)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 동양 함대의 포격에 이어, 10월 8일 해병대의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단수이 요새의 청군을 지휘하던 대만 순무 유명전(劉銘傳)은 프랑스군의 상륙을 저지했고, 프랑스군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유명전이 프랑스군의 피해를 전사 300명 이상으로 과장해서 보고하자, 북경의 조정은 첫 승전보에 뛸 듯이 기뻐했다.

"대청의 위대한 승리다!"

"바다를 지키는 마조(媽祖) 여신의 가호가 있었다!"

"역시 결사 항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싸우면 이기는 법이다!"

청 조정은 승전에 도취했다. 잇달은 패배로 떨어졌던 사기는 다시 올랐다.

"이홍장이 프랑스와 맺었던 천진 협정을 완전히 폐기할 때까지, 이 전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청은 영국을 통해 프랑스에 평화 조건으로 천진 협정의 폐기, 즉 베트남에 대한 보호 철회, 배상금 철회, 베트남 북부 3성의 청군 주둔을 요구했다.

협상안을 전달 받은 영국 외무부는 중재를 포기했다.

"이건 완전히 승자의 요구요. 청 조정은 이미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착각하고 있소."

당연히 프랑스는 그런 조건의 협상에 응할 리가 없었다. 더욱이 전사한 프랑스 병사들의 수급이 효수되어 훼손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프랑스는 격노하여 복수를 다짐했다.

청 조정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전쟁이 조속히 종결될 가능성은 사라졌다.

양측 모두 베트남에 추가 파병을 결정하고, 전쟁 지속을 천명한 것이다.

청불전쟁의 소식이 새로 설립된 천진-인천 전신을 통해 빠르게 조선으로 전달되었다. 청국을 통해 들어오는 소식이니만큼, 당연히 청군이 일방적으로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으로 전해졌다.

조선에서 이 소식에 고무된 이들이 적잖았다.

"이 얼마 만에 동양이 거둔 승리인가?"

"중화의 힘을 서양 오랑캐에게 똑똑히 보여 줬으면 하는군!"

조선이 막 프랑스와 수교를 했다곤 하지만, 대부분의 조정 관리들은 청의 승리를 기원했다.

조선 사대부가 중국에 대해 오랫동안 가졌던 특별한 감정과 서양 열강에 대한 반감은 자연스럽게 친청적인 기류를 형성했다. 과거의 조선 사대부는 청을 오랑캐인 만주족의 나라로 여겼지만, 청의 중국 지배가 길어지니 지금은 중화 국가로 받아들였다.

이선과 소수의 개화파들만이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청의 대승? 그럴 리가 있나.'

이선은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청군의 현실상 프랑스를 상대로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을 리가 없으리라 확신했다. 역사의 흐름을 아는 이선으로선, 결국 프랑스가 이 전쟁에서 이기리라 생각했다.

"유구 문제로 청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이, 프랑스와 연합하여 청을 공격하려 한다는 풍설이 있습니다."

도쿄 주재 대리공사를 지낸 후, 일본 정계에 발이 넓은 김옥균이 소문을 전했다.

"헛소문이오. 일본은 언젠가 청과 일전을 벌이고 싶어 하겠으나, 지금은 그럴 수준이 안 된다는 걸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김옥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만약 일본이 정말 청을 공격하려 한다면, 기습적으로 공격하지 이런 식으로 소문이 파다하게 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도 소문이 퍼진다면 이유가 있겠지. 일본은 전쟁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 청을 압박하려는 것이오. 청이 일본과 단독으로 싸운다면 모를까, 프랑스를 상대하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일본이 개입한다면 크게 위태롭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일본이 원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임오년 이후 상실했던 대조선 영향력을 이번 기회에 회복하고 싶은 거겠지. 임오년 이후 지금까지 일본이 너무 잠잠해서 이상할 정도였소. 분명히 뭔가 수를 쓰려고 들 거요."

'역사대로라면 갑신정변이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지.'

이선은 김옥균과 개화당 지도부를 쳐다보았다. 이들은 이제 확실히 이선의 사람들이었다.

"일본으로 휴가를 떠난 다케조에 공사가 곧 조선으로 귀임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접촉을 취해보겠습니다."

현재 조선의 상주 외교관은 일본 전권공사 다케조에, 미국 전권공사 푸트, 영국 총영사 애스턴, 독일 부영사 부들러였다.

"음, 다케조에는 고균이 잘 상대해 보시오. 다케조에는 천진 영사를 지내며 이홍장과 절친한 관계를 맺게 되어 조선 공사로 부임하게 된 것으로 추정하오. 즉, 지금까지 일본은 청을 존중하는 입장이었지. 하지만 일본 정부의 시책이 바뀌었다면 뭔가 행보를 보일 것이오."

"예, 알겠습니다."

'러시아의 베베르도 곧 조선으로 귀임할 예정이니, 본격적으로 그 일을 추진해 봐야겠군.'

이선은 청불전쟁의 격화를 자신의 구상을 현실로 옮길 생각이었다.

청의 프랑스 '격파' 소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기 시작했다. 일부 인사들에게 상당히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한 것이다.

"청국이 법국 오랑캐를 무찔렀다고 하오."

"과연 대국이로군. 그렇다면 우리도 양이(攘夷)에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소?"

"암. 양이(洋夷)에게 굴복하는 조정의 애송이들을 향해 중화의 도리를 똑똑히 보여 줘야지."

"관아에서 움직일 가능성은 없겠소?"

"예전에 서원 있던 시절에, 절에 들어가 땡중들에게 쓴맛 좀 보여줬기로서니 관아에서 제지한 적 있었소? 이번도 다르지 않을 것이오."

"좋소, 그럼 각자 일가친척과 노비들을 동원합시다."

천주교 성소(聖所). 조불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이후, 종교의 자유가 비공식적이나마 승인됐다. 이제 아무도 천주교도들을 박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은 이제 공공연히 일요일마다 성소에 모여 예배를 올렸다.

신임 조선 대교구 주교로 임명된 장 블랑(백규삼)은, 수교 직후 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난처했다. 그는 신자들에게 절대 중립을 요구했다.

"우리는 세속의 문제에 관여하지 맙시다. 결코, 프랑스의 승리를 기원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블랑은 이선의 부탁대로, 가급적 조선의 법도와 마찰을 빚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수교 직후 환의에 들떠 있는 신자들의 열광을 잠재우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블랑과 신자들의 노력에도, 그들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불편한 시선은, 갑자기 폭력적인 실체가 되어 나타났다.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aeli et terrae. Et in Iesum Christum, Filium eius unicum, Dominum nostrum, 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두건을 쓰고 몽둥이를 들고 나타난 일단의 무리들이 미사가 진행 중인 성소로 난입했다.

"서양 오랑캐가 뭐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조선의 강상을 어지럽히는 천주쟁이들아! 어딜 감히 공공연히 나대고 있느냐?"

"허, 이것 봐라. 남녀가 유별하거늘, 한데 모여 대체 무슨 작당을 벌이고 있는 것이냐?"

"음탕한 천주쟁이 놈들! 징벌을 받을 것이다!"

이들은 다짜고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퍽! 퍼억!

"으윽!"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천주님의 성소에서 이 무슨 폭력 행위란 말입니까? 우리는 조선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블랑 신부가 유창한 조선어로 말했다.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몽둥이가 날라 들어왔다.

"이 양이 놈부터 벌하라!"

"신부님!"

신자들이 몸으로 막았지만, 몽둥이세례가 쏟아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네놈들이 법국의 앞잡이인 걸 모를 성싶으냐? 중국이 법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조선 또한 힘을 보태 법국의 앞잡이들을 쓸어버려야 하느니라!"

"조선과 법국은 엄연히 조약을 맺은 수교국이오! 중국이 법국과 전쟁을 하는 게 조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조선은 중화의 일원이거늘, 제후국이 상국의 치욕을 그냥 두고 보고 있으란 말이냐!"

"서양 오랑캐와 내통한 사학 교도들은 엄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으윽!"

"꺄아악!"

"아, 아파!"

비무장한 신자들을 향해 폭력이 쏟아졌다. 천주교 신자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여 있었는데, 설령 여자와 아이라고 해서 폭력에 자비가 없었다.

"으으, 조선 조정이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흥, 네놈들이 완화군을 믿고 이렇게 나대는 것이렷다?"

"완화군은 바른말 하는 선비들을 두들겨 패놨지. 이제 사학쟁이 편까지 들어 조선의 강상을 지키려 하는 이들을 처벌하려 한다면, 그거야말로 완화군이 네놈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헛소리 마시오!"

"당신들의 성현이 언제 백성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라고 했소?"

"이놈들이, 그렇게 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나!"

"더욱 쳐라!"

폭력은 더욱 심하게 쏟아졌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이가 속출했다. 그제야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단속에 나섰다.

"죽이지는 마라. 문제가 복잡해질 수도 있으니. 우리의 힘을 똑똑히 보여준 것으로 충분하다."

"으으……."

모든 사람이 신음을 흘리며 쓰러지고, 성소를 완전히 파괴한 후에야 무장 세력은 떠났다.

이선은 며칠 후에 보고를 받았다. 블랑은 조불 사전 편찬에 도움을 주고 있어, 이선과 가끔 만나곤 했다. 그런데 블랑이 중상을 입은 몸으로 움직여 박해 소식을 전한 것이다.

"저희들은 조선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희를 박해하는 것입니까? 부디 저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이선은 분노했다. 기독교도를 보호하지 않으면 수호통상조약 위반이 되어 서양의 항의를 받는 건 차치하고, 비무장의 사람들을 상대로 치졸하게 보복하는 자칭 유학자들의 행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 반드시 그자들을 찾아내어 엄히 처벌하겠소이다."

이선은 기무처에서 논의하기 전, 대원군을 먼저 찾아갔다.

"이건 조정의 방침에 대한 도전입니다. 분명히 광화문에서 거적 깔고 시위하던 자들과 한패일 것입니다. 마땅히 발본색원하여 엄벌해야 합니다."

대원군은 역설적인 느낌을 받았다. 한때 천주교도를 무자비하게 박해했던 그가, 지금은 보호하는 위치가 된 것이다.

"흠,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천주교도들을 보호하려고 유생들을 체포한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유림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저들이 조선과 서양과의 조약을 엎으려고, 혹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도발하려고, 일부러 이런 짓을 꾸몄을 가능성도 있다면요?"

이선의 말에 대원군이 반응을 보였다.

"그게 정말이냐?"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그렇게 몰아가면 됩니다. 버젓이 삼흉오적을 운운하는 자들인데, 어떤 흉측한 계략을 꾸미지 못하겠습니까?"

"내가 일전에 말했었지? 경장을 이루려면 반드시 적이 있어야 한다고."

대원군이 냉소를 흘렸다.

"청국과 법국이 전쟁을 하고 있는 비상 상황이니, 적당한 분위기를 만드는 건 일도 아니라고 했지. 기다리던 끝에, 마침내 적의 실체가 드러나는구나."

대원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나라에 변란을 일으키려고 한 자들은 엄히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기무처로 가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