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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背後)
이선은 기무처 회의에서 폭력 사태를 신랄하게 규탄했다.
"폭도들이 무장을 하고 공공연히 천주교 신자들을 습격했습니다. 이 폭도들은 단순히 천주교 신자를 공격한 게 아닙니다. 서양과의 조약을 체결하고 준수하려는 조정의 방침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천주교가 조선의 법도와 맞지 않는 법이 많으니, 일부 과격한 유림이 난동을 부린 것이겠지요."
"제공(諸公)은 청국에서 발생한 경오년 천진 교안에 관해 아실 것입니다."
이선은 청나라의 사례를 언급했다. 청에서도 개항 이후 사회에서 큰 갈등을 빚었던 건 기독교 문제였다.
1870년, 천진 교안(敎案)이라 일컫는 반(反) 기독교 운동이 폭발했다.
'서양인들이 중국인 아이들을 납치해 잡아먹는다.'
라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청국 민중의 분노는 교회에 집중되었다. 교회에서 고아들을 데려가 세례를 주고 교육하는 걸, 잡아먹으려 한다고 오해를 한 것이다.
진국서(陳國瑞)라는 자의 선동을 받아 무장한 폭도들은 교회와 프랑스 영사관을 습격했고, 프랑스 영사와 신부, 수녀 등 21명의 서양인과 40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천진 교안이 발생하자 전국적으로 반 기독교 폭동이 이어졌고, 프랑스 공사는 책임자 처벌과 사죄를 요구했다.
"문제는 이게 자연발생적인 봉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민중을 선동한 진국서의 배후에는 순친왕이 있었습니다."
순친왕은 공친왕과 더불어 동치제의 보좌를 맡은 황족이었다. 강력한 배외론자인 순친왕은 공친왕의 양무운동을 혐오했고, 1869년 모든 서양인들을 추방하고 중국의 문호를 폐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서양과의 전쟁을 의미했으므로, 공친왕과 총리아문은 당연히 무시했다. 그러자 순친왕이 배후에서 폭동을 조종했고, 천진 교안과 같은 사건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서양과의 전쟁을 기대했다.
군기처의 보수파 대신들은 순친왕의 편을 들며 폭동 주동자들을 영웅시했고, 주동자들을 체포한 직례총독 증국번은 매국노라고 비난과 욕설의 대상이 되었다.
순친왕과 보수파들의 목표는 서양 그 자체보다는 양무운동을 이끄는 공친왕과 증국번을 실각시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요구를 들어주자니 민중 폭동이 이어질 분위기고, 민중의 분노를 따르자니 프랑스와의 전쟁이 임박했다. 프랑스는 군함을 동원해 경고성 포격을 했고, 만약 이대로 사태가 진행되었다면 이미 1870년에 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발발했을 상황이었다.
이때 서태후의 자문을 받은 이홍장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 유죄 처분을 받은 살인자들은 극형에 처하되, 그 수를 최소화하여 민중의 분노를 자극하지 말라.
각국 공사관에는 이렇게 제안했다.
- 많은 수의 처형은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이는 서양의 장기적인 이익에도 좋지 못한 일이다.
이홍장의 조언을 받아 공친왕은 주모자 20여 명만 처형하고, 재발 방지와 우호 친선을 약속하는 사절단을 프랑스에 보내기로 했다. 프랑스는 이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증국번을 대신해 이홍장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사태 해결에 만족한 서태후는 이홍장을 직례총독에 임명하고, 외교를 도맡도록 했다.
폭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순친왕은 강력한 영향력을 자랑했으나, 서태후-공친왕 연합이 결국 순친왕을 몰아내고 양무운동을 유지했다.
'문제는 이후에도 교회에 불 지르고 사제와 신도들을 죽이는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는 거지. 그리고 그때마다 서양 열강은 청에 트집을 잡아 불리한 조약을 강요하고. 최종적으로는 의화단의 난과 8개국 연합군의 침공이라는 참사까지 나왔지.'
청에 비하면 조선은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기독교가 사회와 잘 융화가 되었으나, 전혀 마찰이 없는 건 아니었다.
1880년대 후반, 조선에도 서양인이 조선인 아이들을 납치해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론은 폭동 직전까지 악화하였다. 천진 교안과 같은 상황이었다.
조정에서 은밀히 조사를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유언비어를 퍼트린 배후가 있었다. 청과 결탁하여 서양을 몰아내려는 음모였다. 조정의 선제적 조치로 상황이 폭동까지 악화하진 않았다.
'악순환의 고리를 처음부터 막아야 한다.'
"나는 완화군의 지적이 정확하다고 보오. 불순한 무리가 서양과의 조약을 헤치기 위해, 청과 법국의 전쟁을 틈타 일부러 난동을 부린 것이오. 이는 곧 조정에 대한 공격이나 다름없소. 발본색원하여 뿌리 뽑을 것이오."
대원군의 말에 보수파들이 당혹스러워했다. 그들은 천주교를 격렬히 탄압했던 대원군이, 이제는 천주교의 보호자가 된 걸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대원위 합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단순한 폭동일 리가 없습니다. 청국의 순친왕처럼, 조정의 개화 정책을 흔들기 위해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배후를 밝혀내야 합니다."
김옥균을 필두로, 개화파 기무처 당상들이 동의를 표했다.
"개화 정책을 흔들려 하는 시도가 틀림없습니다."
"서양과의 조약을 헤치고 법국과의 전쟁을 도발하려 했다면, 참으로 흉측한 계략입니다."
"음. 형조와 의금부는 폭도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심문하여 배후를 똑똑히 밝혀내도록 하라!"
대원군의 추상과도 같은 엄명이 떨어졌다.
검거 열풍이 불었다. 경기도 관찰사 박영효의 지휘 아래에, 천주교 습격을 주도한 폭도들과 광화문에서 시위한 유생들이 대부분 검거되었다. 잡아 놓고 보니, 향촌 사회에서 나름으로 명망이 있는 사대부들이었다. 이들은 모조리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예전에는 천주쟁이들이 잡혀갔는데, 이제는 천주쟁이를 공격한 양반들이 잡혀가다니. 세상이 바뀌긴 바뀌었구먼."
"뭐, 천주쟁이들은 딱히 해를 끼치는 건 없잖아? 하지만 저 양반놈들은 얼마나 거들먹거리며 쥐어짰나. 꼴좋다, 퉷!"
백성들은 대개 무관심하거나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사대부들은 천주교도를 보호하기 위해 유생들을 체포했다는 사실에 들끓는 분위기였다.
"세상이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는구려. 대원군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강상을 어지럽히는 사학교도들을 징벌한 유림을 칭찬하지는 못할망정?"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오. 모두 한양으로 가서 항의합시다!"
유림이 여론전을 펼치기 전에, 이미 대원군은 빠르게 조처를 하고 있었다.
"네놈들이 혼자 일을 꾸민 건 아닐 터. 배후를 대라!"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이재면이 폭도들의 심문을 맡았다. 이재면이 누구의 지시를 받는지는 말하나 마나였다.
"배후라니? 우리는 성학을 신봉하는 유생들로,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사학교도들을 징벌하려 했을 뿐이오."
"그건 핑계에 불과한 걸 알고 있다. 네놈들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서양과의 조약을 지키지 못해 관계가 악화하고, 법국이 조선과 전쟁을 벌이길 원했던 게 아니더냐?"
"그, 그 무슨……."
엄청난 혐의에 폭도들은 입을 딱 벌렸다.
"네놈들이 경오년 천진 교안을 모범으로 삼아 폭동을 일으킨 걸 알고 있다. 조정을 전복하려 했겠지. 분명 순친왕처럼 배후가 있을 것이다."
이재면은 대원군의 충실한 거수기였고, 아버지가 총애하는 조카 이선을 지지했다.
하지만 별로 주도적으로 하는 일도 없는 자신이 유림으로부터 삼흉으로 지목되어 지탄받는다는 사실 자체에 분개하고 있었다.
"배후에 관해 바른말을 하면 살아남을 것이나, 아니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바른말? 나라를 위해 바른말을 하는 선비들을 이리 박해하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소!"
"나라를 뒤집으려 한 역적의 무리가 무슨 잔말이 많으냐? 아직 매가 부족하구나. 저놈들이 바른말을 댈 때까지 주리를 틀고 매우 쳐라!"
"으아악!"
"억, 어억……."
고문이 지속하자, 이런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이 투항하기 시작했다.
"그, 그만……."
"제발 멈춰 주십시오……."
'한심한 놈들. 조정에 맞설 용기는 없고, 기껏해야 불교나 천주교도들을 습격해서 자기만족을 하는 자칭 유생 놈들. 약한 자나 괴롭히는 이들에게 역적이라니 과분하기 짝이 없다.'
현장을 지켜보던 이선의 기분도 썩 좋지 못했다. 근대적 사법체계를 확립하려는 그에게, 이런 전근대적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선은 서양의 형법과 민법을 토대로 사법 개혁도 준비 중이었다.
'어쩔 수 없지. 결국, 본보기는 한번 보여야 하니……. 이번을 마지막으로, 앞으로는 근대적 법률에 따라서 처벌한다.'
"마, 맞습니다. 서양과의 조약을 해치기 위해 그랬습니다."
한 명이 불기 시작하자, 결국 의지가 꺾인 자들이 토설을 시작했다.
"서양인들을 모두 추방하기 위해, 법국과의 전쟁을 도발하려고 천주교도들과 법국 사제를 공격했습니다."
"그래, 역시 그랬구나. 그렇다면 네놈들의 배후는 누구냐?"
폭도들이 일제히 주모자를 쳐다보았다. 주모자는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이재면이 눈을 부라리며 주모자에게 다시 고문을 가하려 하자, 그는 황급히 입을 뗐다.
"지, 지중추부사 조영하와 좌찬성 민태호입니다! 조영하와 민태호가 배후에서 저희를 꼬드겼습니다!"
"뭣이?"
이재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참말이냐?"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조영하와 민태호가 시킨 일입니다."
조영하는 대왕대비 조씨의 조카로 풍양 조씨를 대표했다. 흥선군과 조대비 사이를 이어, 임금의 즉위에 혁혁한 기여를 했으나 척족을 몰아내려는 대원군의 강력한 의지에 결국 사이가 틀어졌다. 1873년 조영하는 중전의 오라비인 민승호와 결탁하여, 최익현을 내세워 대원군 실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민태호는 세자빈의 부친이자 세자의 장인이었다. 여흥 민씨 대부분이 숙청된 상황에서, 민태호는 세자의 장인이라는 이유로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영하와 민태호? 그럴 위인들이 아닌데?'
조영하는 친청파이기는 하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홍장의 권유를 받아 미·영·독 3개국과 수교할 때 조영하는 조약의 실무를 맡았다. 그렇기에 신정권에서도 명예직이나마 고위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민태호는 세자의 장인이라는 걸 제외하면, 특별한 능력이나 야망도 없는 자였다. 보신을 추구하는 민태호는 중전이 폐비 되고 여흥 민씨가 몰락하는 상황에도 납작 엎드려 신정권을 추종했다. 민태호의 아들이 개화당인 민영익이란 점도 생존의 이유였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세자빈의 자리 유지로 보였다.
"조영하와 민태호가 대비전과 세자빈을 끼고 조선의 순친왕이 되고 싶었나 보지. 이래서 외척의 세력을 남겨두는 게 아니었다."
이재면의 보고를 받은 대원군이 냉소를 흘렸다. 이선은 순간 직감하는 바가 있었다.
"설마 할아버님께서……."
"나는 모르는 일이다. 죄인들이 자발적으로 토설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대원군은 오리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선은 추측할 수 있었다.
'천하장안 중 하나가 의금부 옥사에 다녀갔겠군.'
이선은 추측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렇겠지요."
"죄인이 토설했으니, 배후를 뿌리 뽑아야겠지. 이보게, 형판."
"예, 아버님."
"즉시 성상께 고하고, 왕명으로 조영하와 민태호를 추포하게."
"명을 받들겠나이다."
대원군의 명에 이재면이 고개를 조아렸다.
"이놈들, 놔라! 이게 무슨 짓이냐!"
"왕명으로 죄인 조영하를 추포하니, 순순히 왕명을 받들라!"
"왕명이라고? 대원군의 명이겠지!"
조영하는 묶이면서 소리쳤다.
"이 나라의 주인은 성상이고, 왕실의 큰 어른은 대비전이시다. 대원군의 농단을 대비전이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실 것 같으냐! 으윽!"
의금부 도사가 조영하의 입을 재갈로 막아버렸다.
"이,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죄인 민태호는 순순히 왕명을 받들라."
"내가 죄인이라니? 무례한 행동은 삼가라. 세자빈께서 내 따님이니라!"
민태호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묶였다. 그저 세자빈만을 내세울 뿐이었다.
조영하와 민태호가 폭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의금부로 압송되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대원군이 외척들과 끝장을 보려고 하는군.'
이선은 개화에 반대하는 수구 세력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 개혁의 추진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폭동 의 엄벌을 주장했다.
그런데 대원군은 여기에 풍양 조씨를 대표하는 조영하와 여흥 민씨를 대표하는 민태호를 묶어서, 외척을 반(反)서양 폭동과 정권 탈취의 배후로 지목한 것이다.
'조영하는 실제 역사에서 임오군란 때 대원군의 납치를 청나라에 건의한 인물들이니, 아주 틀린 건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일을 꾸몄을까?'
이선은 확신이 없었다. 조영하는 나름 영민한 인물인데, 이런 어리석은 방식으로 정권을 뒤엎으려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보신을 획책하는 민태호는 더욱 그랬다.
조영하와 민태호의 부인에도, 의금부에서 이들의 혐의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폭동 주모자와 그 일당들이 모두 입을 맞춰 배후를 이들로 지목한 것이다.
폭도들이 휘두른 몽둥이의 유탄이 뜻밖에도 외척들을 향했다. 이들의 운명은 그야말로 경각에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