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인내
의금부로 잡혀 온 조영하와 민태호는 혐의를 부정했다. 상소를 주도한 소두 김생과 폭동을 주도한 주모자 박생의 대질신문이 이뤄지자, 이들은 배후를 거론했다.
"민태호가 제게 유생들을 모아 광화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유림이 우리의 뒤를 따르리라 하였습니다."
"조영하가 제게 무리를 모아 천주교도들을 공격하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법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청국과 함께 법국과 일전을 벌일 수 있다 하였습니다."
조영하와 민태호는 어처구니없어 하며 외쳤다.
"네 이놈들, 내가 언제 그랬느냐? 나는 네놈들을 본 적도 없다!"
"네놈들의 죄를 줄여 보려고 애먼 사람을 모함하느냐?"
종1품 고관인 조영하와 민태호에게 고문이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심리적 압박이 가해졌다. 그들이 받는 혐의가 가문 전체로 퍼질 수 있었다.
김생과 박생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진술했다. 언제 어디서, 조영하와 민태호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는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진술이었다.
진술을 듣고 있던 조영하가 마침내 폭발했다.
"그래, 내가 그랬다!"
순간 이재면의 눈이 번뜩였다.
"뭐라?"
"내가 대원군을 몰아내려 했다. 이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오? 그래, 내가 했소. 유생들을 선동해 혼란을 일으키려 했고, 천주교도들을 공격해 서양과의 관계를 악화하고, 법국과의 전쟁을 도발하려 했소. 그리하여 청국과 결탁해 대원군을 몰아내고, 성상께 정권을 돌려드리려 했소이다. 됐소?"
민태호가 당황해서 외쳤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혀, 형판 대감. 나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내 따님이 세자빈이신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부디 대원군께 제 충심을 전해 주십시오!"
조영하는 민태호를 향해 벌컥 화를 냈다.
"대감, 정신 차리시오! 우리가 뭐라고 하든 대원군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 셈이오. 아니, 대비전과 세자궁까지 끌어드리려는 거겠지. 여흥 민문에 이어 풍양 조문까지 박살을 내겠다는 거요. 외척은 씨를 말리겠다는 거지."
"어허, 말을 삼가라! 어찌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가!"
이재면의 제지에도 조영하는 멈추지 않았다.
"대원군의 폭거를 사대부가 언제까지 지켜만 보고 있을 것 같소? 중궁전도 모자라 대비전과 세자궁까지 핍박하려 들다니. 대국에서도 용납하지 않을 거요. 책봉을 대국에서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완화군이 아무리 이중당과 친해도, 이는 대청 황제의 권위를 침해하는 일이오!"
"그만, 그만! 죄인이 자복하였으니, 금일의 심문은 여기까지 하겠다. 죄인에게 재갈을 물려라!"
입에 재갈이 물리자, 조영하는 분노로 몸을 비틀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조정의 원로이자 왕실의 외척이 폭동을 조종하다니. 엄히 처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재면의 보고를 받은 대원군이 혀를 끌끌 찼다.
"아버님, 조영하가 자복했다고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게 아닙니다. 대비전에서 반발이 크지 않겠습니까?"
대원군이 벌컥 화를 냈다.
"이미 폭동의 하수인이 배후를 실토했고, 주모자가 자복했다. 나라를 뒤집어엎으려고 한 자들인데, 대비전의 반발이 뭐가 대수냐!"
"그, 그렇습니다만 처벌을 강행하면 사대부의 여론이 좋지 못할 것 같습니다."
대원군은 이재면을 흘겨보았다.
"쯧, 너는 내 뜻을 그리도 모르겠느냐? 바로 그 사대부들에게 본보기를 주려고 하는 것이다. 놈들이 짖어대는 건 자유이나, 감히 조정에 저항한다면 어찌 되는지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 그렇군요."
"그리고 외척은 이제 조정에서 사라져야 한다. 다시는 외척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게 할 것이야."
이선은 일부러 옥사와 거리를 두고 본래의 업무에 충실했다. 그의 주된 업무는 외교와 국방이었다.
기무처에서의 업무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기무처 관료들은 옥사에 대해 일절 언급하길 꺼려했다.
이선은 호조 참판 어윤중의 보고를 받았다. 어윤중은 재정 전문가인 동시에 서북경략사를 지내며 북방 문제의 전문가였고, 청불전쟁이 일어난 후 북방 국경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요동의 청군이 전쟁에 대비하고 있기는 하나, 프랑스가 요동까지 침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내 생각도 그와 같습니다."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만. 소생이 변경에서 살펴보니, 두만강 너머 조선 백성이 거주하는 월경지의 귀속을 놓고 이견이 분분합니다. 우리 백성들은 두만 이북, 토문 이남을 조선 영토로 간주합니다. 시생의 생각으로는,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상류가 분명합니다. 청국과 논의하여 국경을 새로이 획정해야 합니다."
어윤중은 두만강 이북, 이른바 '간도(間島)'가 조선 영토라고 확신했다. 그의 생각에 백두산정계비에 정해진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상류였고, 간도는 조선 영토로 귀속되어야 했다.
"나도 새로이 논의할 필요는 있다고 여깁니다. 토문강이 어디인지는 양국 간에 이견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 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백성은 우리 조선 사람들이니까.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이선은 영토 확장의 필요성은 공감했지만, 지금은 청과 국경 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니라 생각했다.
"국경 획정이 명분과 외교적 논리로만 통할 리가 없습니다. 힘의 논리가 작용할 뿐이지요. 지금은 청의 국력이 조선을 압도하니, 우리가 뭐라 한들 저들이 들을 리가 없습니다."
"군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무역 장정을 논의하면서 느낀 바인데, 청국도 이익이 걸린 문제는 결코 조선에 양보하지 않으려 합니다."
조청 무역 장정의 협상을 담당했던 어윤중은, 청국 관료들의 고압적인 태도에 환멸을 느낄 때가 많았다. 무역 장정 이후 어윤중은 친청파에서 반청파로 돌아섰다.
"지금은 힘을 축적하며, 국경 논의에 대비해 두만강 너머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도록 합시다. 특히 조선 백성들을 확실히 보호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은 제국주의 시대. 영토 문제는 힘의 논리다. 러시아가 광활한 연해주를 청으로부터 할양받을 수 있었던 건, 힘의 논리가 작용된 덕이다. 청이 아무리 상처 입은 맹수라고 해도, 아직은 맹수다. 때를 기다리자. 서둘렀다가 모든 걸 망칠 수 있다.'
이선은 지금은 인내하며 힘을 키워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이선은 기무처를 나와 외무아문에 들렀다. 묄렌도르프가 이선에게 다가와 말했다.
"청국 상무위원 진수당이 대감을 뵙기를 청합니다."
'하필 간도 문제를 논의한 후에 찾아오다니, 공교롭군.'
"무슨 목적인 것 같습니까?"
"제게 말하기를 꺼리더군요. 오직 군 대감에게 말씀드리겠답니다."
본래 이홍장의 막료였던 묄렌도르프와 진수당은 친분이 있었지만, 묄렌도르프가 조선에 더 충성의 뜻을 보이면서 점차 거리가 멀어졌다.
"그럼 만나보지요."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완화군 대감."
"오랜만입니다, 진 대인. 그간 격조했습니다."
한성 주재 상무위원 진수당. 실제 역사라면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이 강해지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숭례문 앞에다 '조선은 청국의 속방'이라고 공공연히 붙여 조선인의 분노를 살 정도였다.
하지만 바뀐 역사에서는 그저 주 조선 청국 대사 노릇을 하는 외교관이었다.
"요새 법국과의 전쟁이 지속하면서 정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진수당이 일부러 거드름을 피우는 걸 눈치챈 이선이 답했다.
"아아, 승전을 거두셨다지요. 대청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오만한 서양 오랑캐는 이번에 중화의 힘을 똑똑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조선의 군신도 대청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선은 외교적 수사를 활용했다.
"암요. 대청과 조선은 한 집안과 같은 사이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의 건승을 기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이선은 진수당의 어투가 신경에 거슬렸지만, 꾹 참았다.
'지금은 인내할 때다.'
"오늘은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아아, 이런. 그걸 말씀드려야지요."
진수당이 모자를 쓰다듬었다.
"조선의 유생들이 천주교도들을 습격해서 문제가 발생했다지요?"
"예에. 이미 모두 잡혔습니다. 사소한 소요이니 대국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중추부사 조영하가 배후로 잡혔다고 하니 의외입니다. 조영하는 북양대신과의 친분이 깊지요. 이중당께서 조선에 수교를 권유했을 때, 실무를 맡았던 이가 조영하 아니겠습니까? 근데 조영하가 이제 와서 반 서양 선동을 배후에서 획책했다는 건 믿기지가 않는군요."
이선은 대략 짐작이 갔다. 조영하는 이홍장과 양무파 관료들, 특히 진수당과 친분이 두터웠다.
"사람 일이라는 건 알 수가 없지요. 조영하는 청국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천진 교안을 흉내 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조선의 순친왕이 되고 싶었던가 보지요."
"도저히 믿기가 어렵군요. 조영하에게 그런 야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함을 받은 게 아닌지?
이선은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대인, 이는 조선 내부의 일입니다. 대국에서 조선 내부의 일까지 관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나는 조선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당께 보고할 책무가 있습니다. 나로선 조영하가 반역을 꾀했다는 걸 믿기가 어려운데, 중당도 다르지 않으실 겁니다."
진수당의 말은 묘한 압박처럼 들렸다. 이선은 논리를 들어 말했다.
"모든 건 정치입니다, 정치. 대원군께서는 과거에 순친왕과 비슷한 입장이었지만, 지금의 대원군은 공친왕 전하와 같습니다. 청국에 총리아문이 있다면 조선에는 기무처가 있지요. 대원군과 기무처 당상은 조선의 양무 정책을 총괄합니다. 그러니 권력을 잃은 자들이 기무처를 실각시키기 위해 무슨 수든 못 쓰겠습니까? 조영하는 천진교안에서 선례를 찾은 게 분명합니다."
이선은 힘을 주어 쐐기를 박았다.
"대원군과 저, 기무처는 대청의 양무를 모범으로 삼고 있습니다. 기무처가 무너지면 조선의 양무도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그, 그야 그렇지요."
"조선은 대청을 지키는 동쪽 울타리가 되겠다고 제가 중당께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때의 초심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제가 대감의 저의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조선은 비록 법국과 수교를 하였습니다만, 아직 비준은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대청이 법국과의 전쟁이 심화되어 서해까지 확산된다면, 조선 역시 좌시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선은 청과 프랑스의 전쟁을 명분 삼아, 최대한 빨리 군대를 양성하고 개혁을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조선은 신속히 군대를 양성해 대청에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경장이 멈춰서는 아니 됩니다. 중당께 그리 전해 주십시오."
이선의 논리적인 달변에, 진수당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중당께 그리 전해드리지요. 그럼 완화군도 국태공께 전해 주십시오. 조영하의 죄상이 무거워도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 조영하가 죽으면 중당의 상심이 크실 겁니다."
"예, 대인의 뜻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대원군께서도 대인의 뜻을 고려하실 겁니다."
진수당은 조선의 옥사를 명분으로 삼아 내정에 한 번 간섭해 보려다가, 본전도 찾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이선은 퇴궐하기 전 대조전에 들렸다. 사흘에 한번 씩은 대조전에 들려 인사를 하고 중전과 환담을 나누었다.
"완화군 입시옵니다."
대조전의 문이 열리자마자, 소년과 소녀가 이선의 앞에 엎드렸다.
"군 대감, 아버님을 살려주시옵소서! 아버님은 감히 역모를 꾀할 분이 아니시옵니다!"
바로 세자와 세자빈이었다. 세자빈은 울먹이다시피 했다.
"이 나라의 국본께서 함부로 무릎을 꿇으시면 안 됩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형님, 부디 빙장(聘丈)을 구명해주시옵소서."
세자의 간곡한 청에, 이선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은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이신 백부님의 소관이십니다. 제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최종 결정권이 할아버님께 있다는 건 궁궐에 있는 저도 압니다. 오직 형님만이 할아버님을 설득하실 수 있으십니다."
이어서 중전이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완화군, 놀랐다면 용서하십시오. 세자빈의 처지가 너무 딱해 내가 불렀습니다. 세자와 세자빈이 구명을 호소할 곳은 완화군 밖에 없습니다."
"중전마마, 이 일은 진실로 제 소관이 아니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말씀은 드려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자는 내 아들이요, 군도 내 아들입니다. 형이 아우를 도와주십시오."
"저도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세자빈이 끝내 눈물을 흘렸다. 이선은 정말로 세자빈의 처지가 딱했으나, 개인적 감정과 정치적 입장은 달랐다.
'대원군이 외척 숙청을 향해 칼을 빼 들었는데, 여기서 멈추면 이도 저도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