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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王道)
중전은 더욱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세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비마마께서도 상심이 크시어 몸져누우셨습니다. 대비마마께옵서는 주상의 어머니이자, 왕실의 큰 어른이십니다. 완화군도 주상께서 대비전을 얼마나 극진히 모시는지 아시지요?"
중전의 말처럼, 임금은 조대비를 극진히 받들었다. 대원군과의 관계가 악화된 이후, 임금은 법적인 어머니인 조대비에게 더욱 효성을 보였다. 자신의 법적 부모는 익종(효명세자)과 조대비이며, 대원군은 사사로운 관계에 불과함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정녕 대원군께서는 대비전을 절망에 빠트리려 하십니까? 그러면 주상과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중전은 의외로 영민했다. 그리고 진지했다.
"나는 정치에 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왕실에 들어온 이상, 모든 일은 정치와 직결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중전의 자리에 앉게 되었으니, 내 책임을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왕실이 결코 골육상쟁을 빚으면 아니 됩니다. 나는 왕실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중전은 남편인 임금, 법적 시어머니인 조대비, 실질적 시아버지인 대원군, 법적 아들인 세자와 완화군 사이에 껴서 관계를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했다.
임금과 조대비 앞에서는 이선의 능력과 충심을 조심스럽게 칭찬하고, 이선 앞에서는 자식에 대한 임금의 애정을 전했다.
중전이 불화하는 왕실을 중재하려고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이선도 알고 있었다.
'왕실은 평범한 가족일 수가 없지. 단순한 아비와 자식의 문제가 아니니까.'
그래도 이선은 중전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냉랭하기 짝이 없는 왕실의 관계에, 부드러운 윤활유 역할을 하는 건 오직 중전뿐이었다.
현명한 태도에 바른 예의범절, 빼어난 미모와 부드러운 화술은 사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대원군이 간택한 중전이라고 처음에는 꺼리던 임금도 새 중전의 품성은 칭찬할 정도였다.
"부디 완화군이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중전의 간곡한 호소에, 세자와 세자빈도 다시 청원했다.
"형님께서 구명해 주십시오."
"군 대감만이 아버님을 구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힘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전이 크게 기뻐하며 이선의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완화군. 군의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대원군을 찾아갔다.
"할아버님, 소손이옵니다."
"왔느냐?"
대원군은 서류를 읽느라 건성으로 답했다.
"오늘 진수당이 외아문으로 찾아왔습니다."
대원군은 그제야 이선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로?"
이선이 진수당과의 대화를 설명하자, 대원군이 냉소를 흘렸다.
"무례한 되놈 같으니. 외교 문제는 그렇다 쳐도, 내정에까지 간섭하려고 해? 네가 대처 잘했다."
"하지만 조영하가 북양 대신 이홍장을 비롯해 청의 관료들과 친분이 두터운 건 사실입니다."
"이홍장과의 친분으로 치면 네가 더 깊지 않으냐?"
"그야 그렇습니다만, 대비전에서도 상심이 큰 모양입니다. 오늘 중궁전에도 다녀왔습니다."
이선은 대조전에서 있었던 일도 설명했다.
"대비께서 병석에 누우셨다고? 얼마 전까지 건강하지 않으셨나. 아무래도 나한테 시위를 하시는구먼. 조카 죽는 꼴은 못 보겠다. 이건가."
한때 대원군과 조대비, 조영하는 안동 김문을 타도하기 위해 뭉친 동지였다. 하지만 조영하가 대원군의 실각에 가담한 이래, 대원군은 여흥 민문 못지않게 풍양 조문도 적으로 생각했다.
"대비전과 빈궁(嬪宮)을 생각하면, 조영하와 민태호에 대한 과중한 처벌은 피해야 할 듯싶습니다."
"바로 그 대비전과 빈궁 때문에 조영하와 민태호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원군이 외척을 제거한다는 본심을 드러내자, 이선이 물었다.
"정녕 그들이 이 사건의 배후가 맞사옵니까?"
"너는 네 백부의 심문이 미덥지 않으냐?"
"그런 게 아니오라……."
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미덥지 않다는 뜻이군."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송구하옵니다."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고, 몰라도 되는 일이 있다. 내 너와 거의 모든 사실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는 네가 몰라도 될 듯싶다."
"제가 우려하는 건, 진짜 배후가 따로 있을 경우의 문제입니다. 진범을 놔두고 가짜 배후를 잡아내면, 언젠가 진범이 준동할 우려가 있지 않겠습니까?"
대원군이 껄껄 웃었다.
"하하, 그건 걱정할 일이 되지 못한다. 이번에 일을 벌인 놈들은 피라미에 불과하다. 피라미 몇 마리의 준동으로 월척을 낚았으니 괜찮은 낚시였지."
순간 이선의 머리에 번뜩 지나가는 게 있었다.
'설마……. 유생들이 난동을 벌이도록 배후에서 조종한 게 대원군이란 말인가?'
이선은 설마 싶어서 대원군을 쳐다보았다.
'대원군은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다. 그러고 보니 사건이 터진 후에도 너무 냉정했어. 언제나 개혁에는 적이 필요하다고 했었지.'
이선은 그동안 대원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대원군은 늘 막후공작에 능란했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유생들을 선동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테지. 그게 사실이라면, 놈들은 꼭두각시처럼 놀아난 것이다. 철저하게 이용만 당하고.'
이선은 눈앞의 노인이 무섭게 느껴졌다.
'대원군이 적이 아니라 내 할아버지이자 한배를 탄 동지라서 다행이다.'
이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관없다는 듯, 눈앞의 대원군은 냉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선은 자신의 의혹을 굳이 입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매우 꺼려지는 일이었다.
'조영하와 민태호가 진범이 아니라면 굳이 죽여야 할 필요까지 있는가?'
이선은 자신의 의사를 대신해 중전의 중재를 전했다.
"조영하와 민태호의 죄가 무겁더라도, 살려주는 게 왕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일 성싶습니다."
대원군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중전이 벌써 정치에 개입하려는가? 내가 폐비 민씨의 사례를 경계하라고 그렇게 권했거늘."
"아닙니다. 중전께서는 왕실의 융화를 위해 노력 중이십니다."
이선이 중전 말을 인용하며 변호하자, 대원군이 갑자기 껄껄 웃었다.
"네가 중궁전을 변호하게 되다니, 세상이 바뀌긴 바뀌었구나. 폐비가 있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폐비와 달리 중전께서는 어진 분이십니다. 중궁전의 중재가 소손이나 할아버님께 나쁠 게 없습니다. 언제까지 성상이나 대비전과 척을 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이 할아비는 주상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대원군은 새삼스레 회한에 찼다.
"하지만 너는 다르지. 완화군, 너는 내 전철(前轍)을 밟을 것 없다. 부자간의 불화를 겪지 말아라."
대원군의 목소리가 작아서, 이선에게 들릴락 말락 했다.
"뭐라고 하셨는지요, 할아버님?"
대원군은 씁쓸하게 웃다가, 웃음을 거두었다.
"별말 아니었다. 아무튼, 어차피 옥사를 확대할 생각은 없었다. 외척을 조정에서 제거하고, 조정의 방침에 대항하는 사대부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준 것으로 충분하다."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다만 조영하와 민태호는 네가 앞장서 구명해서 용서한 것으로 하자. 그럼 여론은 조정의 준엄함을 두려워하면서도, 완화군의 관대함을 칭송하지 않겠느냐?"
'굿 캅, 배드 캅(good cop, bad cop)의 역할로 나누자는 것인가?'
대원군이 채찍을 휘두르면, 이선이 당근을 내주는 역할이었다.
"악명은 모두 이 늙은이가 짊어질 터이니, 명예는 모두 네가 누리도록 하여라."
"할아버님?"
대원군 이하응은 권력욕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70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명색이 군주인 아들과도 권력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이하응의 권력욕은 조선의 부국강병과 왕권의 존엄을 위한 일이었다.
이하응이 보기에 아들은 그 책무를 다하기에 미덥지 못했다. 조선을 위해선 자신이 계속 권력을 잡고 있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아들과 끊임없는 갈등을 빚었다.
완화군 이선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후, 대원군은 비로소 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후계자를 찾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하응이 추구하는 세상과 이선이 추구하는 세상은 달랐다. 이하응이 추구하는 세상이 군주를 중심으로 중세적 이상이 이뤄지는 왕조 국가라면, 이선이 추구하는 세상은 국민을 중심으로 근대적 이상이 이뤄지는 국민국가였다.
그렇기에 이선은 대원군과 영원히 같은 배를 타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대원군의 생각은 점차 변화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이선의 급진성을 어린아이의 철모른 조급함이라 여겼었지만, 어린 나이에도 열강의 지도자들과도 당당히 외교 하고 조선을 위해 분투하는 손자를 보고 점차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아들 이재황을 처음 보위에 올렸을 때의 그 기분을 다시 느끼는 것 같았다. 아들에 대한 실망이 컸던 만큼, 손자에 대한 기대와 믿음은 더욱 커졌다.
'이 녀석은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을 보고 있다.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상을. 나와 녀석 사이에는 50년이란 세월이 있지만, 녀석이 보는 세상은 수백 년 뒤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머지않아 죽겠지만, 녀석은 수십 년을 더 일하겠지. 장차 조선을 어디로 이끄는지 모르지만, 그 가능성에 걸어 봐도 되지 않겠는가? 부족한 점은 내가 보완해 주면 되는 것이다.'
"나는 평생 패도(覇道)만을 걸었다. 인제 와서 길을 바꾸기엔 너무 늦었지. 하지만 너는 다르다. 너는 왕도(王道)만을 걷기를 바란다."
대원군의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왕도는 임금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의미한다. 인덕(仁德)을 근본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도리로, 유교적 이상이 구현되는 길이었다. 또한,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한 쉬운 방법을 의미하기도 했다.
대원군은, 이선이 왕도를 걷기를 바랐다.
옥사(獄事)의 결론이 내려졌다. 조영하와 민태호에게 역모죄는 적용되지 않고, 선동과 소요의 혐의만이 적용되었다.
"죄인들은 어리석은 자들을 선동하여 조정의 정략을 무너트리려 했으니 그 죄가 무겁다. 참해야 마땅하나, 왕실의 지친인 점을 고려하여 특별히 죄를 한 등급 감한다. 죄인 민태호는 함경도 갑산에, 죄인 조영하는 전라도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한다."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극변(極邊)으로의 위리안치는 무거운 벌이지만, 혐의에 비하면 관대한 처벌이었다.
삼수갑산은 유배지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가장 험준한 지역이었고, 흑산도는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었다. 특히 흑산도는 얼마 전 최익현(崔益鉉)이 3년간 유배된 곳이었다.
'조영하가 민씨와 손잡고 최익현을 내세워 대원군을 실각시켰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군.'
광화문 시위와 천주교 성소 폭동을 주도한 자들에게도 처벌이 내려졌다.
"죄인들은 소요를 일으켜 사회를 어지럽히려 했으니 그 죄가 무겁다. 하지만 죄를 자복하였으니 특별히 형벌을 감한다. 함경도 종성과 전라도 제주에 충군(充軍)하여 군역을 하며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향촌의 지배층인 양반이라고 거들먹거리다가, 나라의 북쪽과 남쪽 끝에서 최하급 사병으로 군역을 맡게 된 것이다. 그들은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아무도 들어줄 사람은 없을 터였다.
'어차피 징병제를 실시하면 양반들도 군대 보낼 생각이니까, 미리 체험한다고 생각해라.'
조정, 아니 대원군의 단호한 조치에, 사대부들은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또다시 조정의 방침에 저항한다면, 똑같은 꼴이 되리라는 경고였다.
"대원군……. 언제까지 그 세도가 계속되나 두고 보자고."
"그 늙은이도 환갑을 넘겼는데 언젠가는 죽겠지. 유생을 탄압하는 권력자가 역사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는지 두고 보세."
하지만 불평불만은 있을지언정, 공공연한 저항은 사라졌다. 대원군이 바라던 바였다.
"저들이 관대한 처벌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완화군이 힘써 중재해준 덕이라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완화군."
중전에 이어 세자도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덕분에 빈궁도 한시름 놓았습니다."
"저는 그저 제 의견을 개진한 것뿐이고, 건의하신 건 대원군이시고, 최종 재가를 하신 건 성상이십니다."
중전은 이선이 겸손히 공을 돌린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로 이선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된 것이라 믿고 기뻐했다.
"대비마마께서도 손자의 효성을 기쁘게 여기실 겁니다. 나 역시 완화군의 관대함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황공하옵니다."
"왕실에 완화군이 있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만약 완화군이 없었더라면……."
주상과 대원군의 사이가 더 험악해졌을지도 모르지요.
중전은 그 말은 입속으로 삼켜버렸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그저 나라와 왕실에 충성을 다하고자 할 뿐입니다."
이선은 머리를 조아리며 겸손히 말했다. 중전은 그를 신뢰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선의 처신은 왕도를 걷는 사람의 말이었다.
대원군의 권유처럼, 이선은 철저하게 왕도를 걸을 생각이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필요하다면, 길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