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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임(歸任)
1884년 10월 30일,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가 초대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 겸 총영사로 귀임하자 조야의 관심이 그에게 쏠리게 되었다.
베베르는 재작년에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작년 가을에 조선에 돌아와 비준서를 교환했다. 그러다 올해 5월, 여름휴가를 명목으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외교관으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일본 공사 다케조에와 같은 날에 한양에 입경한 베베르는 러시아 공사관에 여장을 풀었다. 이선은 자연히 베베르를 방문하게 되었다. 작년 여름에 보빙사를 떠났던 이선은 베베르와 계속 엇갈리는 바람에 2년 만에 만날 수 있었다.
"카를 이바노비치, 조선에 다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조선에 주재하는 첫 러시아 공사가 되니 기분이 어떠십니까?"
"조선인의 환대 덕에 아주 좋습니다. 앞으로 만족스럽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와 조선 사이에는 중요한 과제가 산적해 있지요. 그러니 각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도와드려야지요. 피곤하실 텐데 오자마자 중대한 질문을 드려 송구합니다만, 조선 중립화 안에 관한 러시아 정부의 훈령을 받으신 바 있습니까?"
핵심을 찌르는 이선의 질문에 베베르 또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받았습니다. 애초에 페테르부르크로 간 목적이 그거였으니까요."
올해 초, 이선이 러시아 측에 조선을 보호 혹은 중립으로 두자고 제안하자, 조선에 있는 베베르가 페테르부르크로 소환되었다. 현지 외교관의 의견을 참고하기 위함이었다.
이어 여름에는 묄렌도르프가 휴가를 명목으로 천진에 가서, 러시아 태평양함대 사령관 크로운 제독과 공사관 무관 시네우르 대령을 만나고 왔다.
1884년 내내,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는 은밀히 외교가 진행되었다. 이 날도, 이선과 베베르는 한참 동안 밀담을 나누었다.
다음 날, 베베르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국서와 선물을 들고 창덕궁에서 임금을 알현했다.
이 자리에는 외무독판 이선 이하 외아문 관리들이 함께 있었다.
"국왕 전하, 외신(外臣) 베베르가 러시아 제국 황제 폐하의 국서를 받들어 삼가 전하를 뵙습니다."
오랫동안 청나라에서 외교관 활동을 하며, 동양의 예법에 밝은 베베르가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조선에 다시 돌아온 것을 환영하오.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소. 이제 한성에 계속 주재하게 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의 국서를 삼가 바칩니다."
임금은 묄렌도르프가 한문으로 번역해서 전달한 국서를 주의 깊게 읽더니, 천천히 베베르에게 말을 걸었다.
"아라사 황제 폐하의 국서에 감사드리오. 과인은 폐하의 건강을 축원하고 귀국의 태평성세를 기원하는 바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외신이 대신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국서 봉정식이 마친 후, 임금은 묄렌도르프와 이선을 따로 불러 베베르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외아문 관리들이 물러나자, 임금의 말은 묄렌도르프를 거쳐 전달되었다. 통역은 혹여 듣는 자가 있더라도 이해하지 못하도록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다.
"과인은 러시아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친애하며,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길 희망하오. 우리는 서구 열강 중 미국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미국보다 더 강력한 이웃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더욱 높이 평가하고 있소.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조선에 보내준 것에 대해 러시아 정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임금은 러시아가 영국이나 독일과 같은 영사급 외교관이 아니라, 미국처럼 공사급 외교관을 보낸 것에 크게 만족해하고 있었다.
이는 곧 미국과 러시아가 조선을 청국이나 일본과 동급인 '자주독립국'으로 여긴다고 생각했다.
"황공하옵니다."
"공사의 주재 자체가 러시아 정부가 조선을 잊지 않고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므로, 이것만으로 나와 조선 백성들은 한 시름을 놓게 되었소."
약 30여 분간 계속된 대화에서 임금은 베베르가 황송해할 정도로 러시아에 대해 호의적이다 못해 극찬을 거듭했다. 하지만 실제적인 외교 문제에 관해선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다.
"향후 조선을 위하여 러시아가 많은 일을 해 주기 바라며, 양국의 우호가 만대에 걸쳐 지속되길 희망하길 바라겠소."
"감사합니다. 저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조선에 아주 우호적인 자세로 열성을 다할 생각입니다."
"고맙소. 공사가 있어 주어 아주 마음이 든든하오."
임금은 베베르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동양식 예법과 한문에 능통한 개인적 요인도 있었지만, 러시아가 조선에 대해 보이는 우호적 태도가 가장 흡족했다.
알현을 마친 후, 묄렌도르프가 베베르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국왕 전하께서도 우리의 방책을 지지하고 계십니다. 다만 조선이 독자적으로 중립을 선언하면, 청과 대립하는 모양새가 될까 봐 조심스럽게 여기시지요."
"조선은 전제군주국이지요. 모든 결정권은 왕명에 있으니, 국왕의 동의가 꼭 필요합니다. 국왕 전하의 재가 없이 러시아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때가 되면 전하께서도 최종 재가를 내리실 겁니다."
이선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전하께서 결정을 내리기 편하시도록, 우리 세 사람이 적절한 때를 논의하도록 하지요. 아니, 부들러 부영사까지 넷이 논의해야겠군요."
이선과 비스마르크의 회담 결과로, 독일이 제일 먼저 조선의 중립을 제안하기로 했다. 그 역할은 조선 주재 독일 총영사 쳄부시(Zembsch) 혹은 부영사 부들러(Budler)가 제안할 예정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곧 자리를 마련해 보지요."
조선과 독일, 러시아 사이를 놓는 가교 구실은 묄렌도르프가 수행했다. 그는 이홍장이 보낸 사람이지만, 이제는 완전히 조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관료였다.
"나는 계속 푸트 공사, 애스턴 총영사와 접촉을 하겠습니다."
조선이 실질적인 중립을 지키려면 미국과 영국의 동의도 필요한 일이었다. 이선은 김옥균과 함께 미국 공사관과 영국 총영사관도 자주 방문하여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교성이 좋고 화술이 빼어난 김옥균은 이선의 대리인 임무를 수행했고, 각국 외교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귀임한 일본 공사 다케조에와 만난 김옥균은 알다가도 모를 심정이었다. 이래저래 일본과 갈등이 많았던 김옥균은 그간 가슴에 쌓인 것을 터트리듯 다케조에를 몰아붙였다. 그런데 다케조에가 헤어지는 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 것이었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귀국의 개혁을 돕는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어리석은 소견이나, 오래전부터 우리나라를 독립하여 구습을 변혁하자면 일본의 힘을 의뢰하지 않고서는 달리 방책이 없다고 여겨, 시종 그 범위에서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양국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열성을 다한 것입니다."
김옥균은 일본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인식을 하고 있었으나, 이선을 개화당의 주군으로 받들게 된 후에는 시각의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귀국 정부의 무상한 변덕으로 인하여 나는 비할 데 없는 큰 낭패를 당했습니다. 귀국에 차관을 청했을 때도, 이노우에 외무경의 면전에서 면박을 당했지요. 그런데 지금 공사의 말은 무엇을 이름인지 모르겠습니다."
"무릇 국가의 정략이란 때에 따라 변하고 사세에 응해 움직이는 것이지, 어찌 한 구석에만 고착시켜서 볼 수 있겠습니까?"
여전히 일본을 신뢰하지 못하는 김옥균은 대답하지 않고 돌아갔으나, 홍영식과 박영효를 만나는 자리에서도 다케조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청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하고 있습니다. 청국은 곧 망할 터이니, 조선을 위해 개혁에 뜻을 둔 인사들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케조에가 김옥균에 이어 개화당 인사들에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들은 이선에게 다케조에와의 면담을 보고했다.
이선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일본 정부의 정책이 바뀐 것 같소."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요?"
"일본이 조선 중립 안에 동의해 주면 가장 좋은 일이지. 다른 뜻이라면 용인할 수 없지만……. 일단 저들의 뜻을 알아볼 때까지 기다려 봅시다."
'실제 역사라면, 일본은 청불전쟁을 틈타 개화당의 정변 계획을 후원한다. 하지만 역사가 이미 바뀌었으니 일본이 어떻게 나설지 아직은 의문이군.'
11월 1일, 임금은 베베르를 만난 다음 날에 일본 공사와도 친견했다. 이 자리에서 다케조에는 더욱 놀라운 행보를 보였다.
"일본국에서 근래 신식 소총을 개발하였습니다. 귀국의 국방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여 바칩니다."
일본 공사관 무관이 무라타(村田) 소총 13년식을 임금에게 바쳤다. 무라타 소총은 메이지 13년, 즉 1880년에 일본이 개발한 자국산 소총이었다. 지금까지 외국 무기를 수입해왔던 일본이 최초로 도입한 제식 소총이었다.
"오오, 고맙소."
임금은 일본이 서양 무기를 수입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개발까지 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다케조에는 무라타 소총 50정을 바친 후, 더욱 놀라운 행보를 보였다.
임오군란 때 사망한 일본 군인의 위로금으로 조선이 지급한 5만 엔에 더해 40만 엔을 조선 조정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는 우리 천황 폐하께옵서 특별히 귀국의 양병비로 정하여 독립하는 기금으로 삼게 한 것이오니, 결코 다른 비용에는 쓰지 마시옵소서."
일본의 호의에 임금 또한 기뻐했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있나. 귀국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겠소."
이어서 다케조에는 외교적 수사를 접어 두고 일본 정부의 뜻을 전했다.
"외신이 전하께 삼가 아룁니다. 청불전쟁에서 청국은 반드시 질 것입니다. 일대 개혁이 필요한 시기이니, 조선은 결코 이 시기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조선의 내정을 서양의 법을 따라 개혁하여 속히 독립을 도모하는 것이 일본 정부의 소망입니다."
"그, 그렇구려."
일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환에 임금은 물론이고, 자리에 배석한 이선과 김옥균, 개화파 관료들도 모두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일본 정부의 뜻이 조선의 개혁에 있다고? 허허,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알다가도 모르겠군.'
11월 3일, 이날은 메이지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로, 일본의 소위 천장절(天長節)이었다.
군주의 생일을 공사관에서 기념하며 외빈을 초청하는 건 외교적 관례였으므로, 일본 공사관에서 천장절 축연이 벌어졌다.
한양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관들, 조선의 외아문 관리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케조에는 더욱 노골적인 태도를 보였다.
"淸國總辦朝鮮商務 陳壽棠大人(청국총판조선상무 진수당대인)!"
술잔이 돌며 화기애애하던 분위기에, 다케조에는 갑자기 조선어로 말했다.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뼈 없는 해삼 같지요. 하하하!"
"???"
조선어를 모르는 진수당이 그냥 넘어갔지만, 조선 관리들은 황당했다.
'왜 저래? 미친 거 아냐?'
다케조에의 행동은 외교적 결례임이 틀림없었다. 축연은 어색한 분위기로 끝났다.
"다케조에가 원래 저런 인물이 아니지 않소?"
이선은 다케조에를 천진 주재 영사 시절부터 알았다.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중국 문화에 능통하고, 이홍장과 친분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다케조에의 중국 기행문에 이홍장이 서문을 써줄 정도였다.
"공사가 술이 좀 과했나 봅니다."
"외교관이 술 취했다고 저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리가 있나."
김옥균도 우려스러웠다. 최근 다케조에가 청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가 되었다. 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청이 패배하리라는 발언을 하고, 청국 외교관 앞에서는 모욕적인 발언까지 했다.
더욱이 일본 공사관을 중심으로 불-일 동맹설과 청-일 개전설까지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이런 소문을 낸다는 것 자체가 일본이 청과 결코 전쟁할 생각이 없다는 방증이라 생각하오. 전쟁을 하려면 기습적으로 하지, 이런 식으로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니겠소?"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도대체 일본 공사는 무엇을 원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청을 도발하면서 무언가를 얻어낼 생각인가 본데……. 어제 성상께 무기와 돈을 바친 걸 보지 않았소? 노골적으로 청을 도발하고, 조선의 환심을 사려하고 있소. 결국, 일본이 임오년 이후에 상실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얻고 싶은가 보군."
'그동안 일본 정계에 변동이 있었나?'
이선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태서(유럽)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았소?"
"예, 제가 알기로 참의 겸 궁내경을 맡고 있습니다."
"직함은 궁내경이지만, 아무래도 이토가 일본의 전권을 맡게 된 것 같구려."
1883년 7월, 일본 정계의 흑막이었던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가 죽었다. 얼마 뒤 이토가 독일에서 귀임했다. 이토는 메이지의 절대적인 신임을 배경으로 하여 정계 제1인자의 지위를 굳혔다.
한동안 헌법 제정과 제도 개혁에 힘쓰며 국내 문제에 매진하던 이토가, 청불전쟁 이후 대륙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는 이노우에를 상대했다면, 앞으로는 이토인가.'
이선으로서는 만만찮은 인물이 외교무대에 재등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