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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118화 (118/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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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준미주(金樽美酒)

이선은 김옥균과 함께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찾았다. 이미 미국 공사 푸트, 영국 총영사 애스턴, 독일 부영사 부들러와 두루 친밀한 관계를 맺던 김옥균인지라 그가 러시아 공사관을 방문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반갑습니다, 공사. 저는 익히 도쿄에서 로젠, 다비도프 공사와 회동하며 러시아와 조속히 수교하여 우호를 맺기 희망했었는데 이렇게 공사께서 주재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김옥균은 1881년에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러시아 공사관을 찾아가 수교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었다.

"저 역시 조선의 첫 러시아 공사가 되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공의 말씀에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우호적으로 시작된 대화는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길게 이어졌다. 이선은 김옥균에게 대화를 맡기고, 주로 듣는 데에 집중했다.

"일본이 저렇게 호기롭게 나가는 것이 혹 청과 전쟁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일본의 군사력이 청보다 강해 보이기는 하나, 지금 당장 청나라와 전쟁을 해봤자 일본에 도움이 될 리가 없지요."

"사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다만 청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느라 조선에 신경 쓰지 못하는 상황은 조선에 큰 기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가 이웃 나라로서 도움을 주시길 바랍니다."

"응당 그래야지요."

"여기 계신 완화군 대감으로부터, 귀국 황제 폐하께서 일전에 추진한 '대개혁'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가슴이 벅차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조선에 필요한 조치도 꼭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옥균은 화술에 능란한 인물이었다. 일본 공사 앞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미국 공사 앞에서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영국 영사 앞에서는 영국의 국력을, 독일 공사 앞에서는 독일의 군사력을 칭송했다.

러시아 공사 앞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을 칭송했다. 베베르도 과히 듣기 좋다는 표정이었다.

특유의 사교술로 김옥균은 조선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관들과 이선 못지않게 명성이 높았다.

'역시 김옥균은 혁명가보다는 외교관이 적격이다.'

"저 역시 그러한 대개혁을 추진해보고 싶습니다. 다만 청과 일본의 압력이 우려스럽습니다."

"조선을 위해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조선에서 청과 일본 간의 대립을 막아, 불안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생각 또한 일치합니다. 러시아가 조선을 위하여 그러한 중재를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정부의 입장이 조선의 독립 보전과 외세의 개입을 막는 것이니만큼, 응당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귀국의 호의에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대화가 오가면서 러시아의 우호적인 반응을 확인한 김옥균은 크게 기뻐했고, 돌아가는 길에 이선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청의 횡포를 제어해줄 만한 나라를 찾고 있었는데, 러시아가 저렇게 긍정적인 반응이니 저는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이전에는 일본에 기대를 걸었다가 그 정책이 워낙 표리부동하여 도통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만, 오늘 러시아 공사를 만나보니 과연 대국의 풍모가 느껴집니다."

김옥균은 진수당이 오만하게 굴고, 다케조에가 설쳐대는 상황에서 베베르의 우호적이고 신중한 반응이 진정 마음에 들었다.

"일전에도 내가 러시아는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며, 결코 내정을 간섭할 의사가 없다고 누차 말씀드리지 않았소이까? 또한 베베르 공사는 매우 신중한 인물이니 더욱 그러할 것이외다."

"군 대감께서 러시아와 각별한 관계인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대감께서 개화당을 지도해주셔서 정말 고마울 따름입니다."

역사대로라면, 현재 개화당의 정치적 입지는 청의 압박과 일본의 변심 속에서 극도로 줄어들었을 터였다. 결국, 그 초조함이 갑신정변이라는 무리수로 이어졌고, 그들의 의도와 달리 개화당의 몰락과 대청 종속화의 가속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선의 등장으로 개화도 범선에 순풍을 맞듯이 진행되고, 개화당도 중용되고 있으니 김옥균 입장에서 이선은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뭘 새삼스럽게. 나 역시 고균이 이끌던 개화당을 나의 사람들로 넘겨줘서 고마울 따름이오."

개화파 관료들과 별개로, 자신에게 충성할 사람들이 필요했던 이선의 입장에서도 김옥균과 개화당의 충성은 반가운 일이었다.

"저야 조직의 실무를 맡고 있을 뿐, 진짜 지도자는 대치 선생이시지요. 돌아가신 환재(박규수) 대감과 역매(오경석) 선생에 이어 대치 선생께서 우리 젊은이들을 지도해주신 덕에 시야가 트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박규수로부터 시작된 개화파의 계보에 대해선 이선도 잘 알고 있었다.

"대치 선생이 과연 백의 정승이라 불릴 만하지. 중인이란 신분으로 인해 백의에만 머무르고 있지만, 시대가 바뀌면 크게 중용될 수 있을 것이오."

"신분을 보지 않고 오직 능력만으로. 저 역시 그런 시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께선 관직에 오르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셔서……."

'백의 정승' 대치 유홍기는 막후 지도자로만 남을 뿐이었다. 재작년 김옥균의 추천으로 정9품 감생청 사용으로 임명되었으나, 50대의 나이에 하급 관료 생활을 하려니 적응을 하지 못했다. 유대치는 물러나고, 본업인 의업과 교육 활동에 매진했다.

"꼭 중용이 관직만을 의미하겠소? 나는 성균관과 같은 국립 교육기관을 설립할 생각이오. 물론 유학이 아니라 양무에 관해 공부하는 곳이지. 당장은 일본처럼 서양인 교수들을 데려와야겠지만, 조선의 실정에 맞게 교육할 사람도 필요하오. 나는 대치 선생을 교수로 염두에 두고 있소."

서양 학문을 공부하는 기관으로 동문사가 있긴 했지만, 아직은 외국어 교육 기관에 불과했다. 이선의 목표는 종합 대학에 해당하는 고등 교육기관을 세우는 것이었다.

'조선인 중에 교수로 뽑을 사람이 별로 없지만, 개화파의 계보를 이어 개화당을 정신적으로 지도한 유대치만큼 교수로 적합한 인물이 없지.'

"과연! 그런 일이라면 대치 선생께 적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역시 군 대감께서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쓰실 줄 아십니다."

"적재적소라 하면, 고균에게는 장차 외교관 임무를 맡길까 하오. 서양이 조선에 상주 공사를 파견했으니,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조선도 각국에 공사를 파견해야 하오."

이선은 최소 일본, 청국, 미국, 영국, 러시아에는 상주 외교관을 파견할 생각이었다.

"마음만 같아선 내가 가고 싶지만, 이제 나는 쉽게 조선을 떠날 수 없는 처지지. 고균이 나를 대신해 서양으로 가 조선의 국익을 도모해주길 바라오."

"저야 명하신다면 따를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조선의 경장에 주력을 다 하고 싶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가라는 건 아니오. 지금은 경장을 이뤄내는 게 급선무지. 다만 고균도 장차 서양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해 보았으면 하오."

"아, 저도 보빙사로 다녀온 동지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릅니다. 때가 되면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습니다."

김옥균 역시 임오군란 이전에 자비를 들여서 미국으로 떠날 계획도 있었던 만큼, 바라던 바였다.

김옥균이 이선에게 쉽게 속내를 밝히듯이, 이선도 김옥균을 가깝게 대했다.

김옥균은 유능한 개화파 관료일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매우 매력 있는 인물이었다. 사교성이 좋은 그는 누구와도 쉽게 관계를 맺고, 덕택에 이선과도 정치적 동지 이상의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특히 그는 보수적인 사대부라면 경멸하는 온갖 잡기(雜技)와 풍류에 능한 인물이었다.

시서(詩書)와 그림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바둑 실력이 한성에 따라올 이가 없을 만큼 탁월했다.

그뿐인가, 투전판 노름에도 끼어들어 한몫을 챙기고 심지어 기생 저고리 벗기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세도가 안동 김문 출신이라고 믿을 수 없는 이단아였다.

"군 대감,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술이라도 한잔할까 합니다만, 어떠신지요?"

"좋소. 그럼 늘 그렇듯이 고균의 집으로 갈까요?"

김옥균의 집은 개화당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오늘은 특별히 운종가(雲鐘街)로 모시겠습니다."

운종가는 육의전이 모여 있는, 한양 최대의 번화가였다. 사람이 많은 곳에는 술집도 많았고, 김옥균의 의미하는 바는 기루(妓樓)일 터였다.

"어허, 내가 왕족의 신분으로 거길 어떻게 드나들겠소?"

이선이 정색을 했다.

"군 대감께서도 곧 열여덟이십니다. 풍류를 즐길 만큼 장성하셨거늘, 안 될 게 무엇이겠습니까? 미모와 자태가 빼어난 여인들과 좋은 술 한 잔 즐기시지요.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큰일 날 소리! 왕실에서 알면 뭐라 하겠소?"

"대원군이 걱정입니까? 대원군도 젊은 시절에 얼마나 기루를 자주 가셨는데, 국무에 매진하는 손자가 하루 갔다고 뭐라 하시겠습니까."

젊은 시절에 대원군이 파락호였다는 건 과장이지만, 풍류남아였던 것은 분명했다.

"아니, 그래도……."

"자자, 걱정하지 마시고 저를 따라오십시오."

김옥균의 거듭된 설득에 이선도 자기합리화를 시도했다.

'솔직히 기루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긴 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인류학적 관심으로 치자.'

김옥균은 이선을 운종가로 안내했다. 사람이 많아지자, 늘 이선의 곁을 호위하는 장무영은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늘 허리에 칼을 차고, 품에는 권총도 갖고 있었다.

"이리 오너라!"

"아이고, 나으리! 오셨습니까요?"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는 김옥균의 행차를 크게 반겼다. 보아하니 한두 번 드나든 것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래. 오늘은 내 특별히 고귀한 분을 모셔왔네. 한 상 그럴싸하게 차려 보게. 그리고 가장 빼어난 아이들로 불러오고. 특히 그 아이를 불러오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얘들아, 어서 나리를 모시거라!"

김옥균의 장담대로 기루는 모든 게 화려했다. 기왓장은 높고, 음식은 풍족했으며, 여인들은 아름다웠다.

"옥균 나으리 오셨어요!"

"오, 다들 잘 지냈느냐? 오늘은 특별히 귀한 손님을 모셔왔으니, 다들 잘 모시도록 하게."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 대체 얼마나 자주 온 거요?"

"소싯적에 많이 놀았지요."

김옥균은 주색잡기에도 능한 거로 유명했다.

"그러니 그대도 들어와서 편히 앉으시오. 기루까지 와서 너무 그러지 말고."

"괜찮습니다."

장무영이 여전히 경계를 서고 있자, 김옥균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군 대감, 보안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 아이들은 모두 교육을 잘 받았습니다. 그냥 편안히 즐기고 가시면 됩니다."

이 자리에 있는 기생들은 고급 기생들이었고, 목적도 상류층 손님들의 술자리 응대였다.

그만큼 풍부한 교양과 예술을 겸비한 이들이었는데, 김옥균이 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도 예술적인 감각이 탁월해서였다.

"음, 무영, 오늘은 괜찮으니 그대도 들어와서 내 술 한잔 받게."

"화, 황송하옵니다."

이선이 술을 권하자, 장무영이 황송해하며 술잔을 받았다.

정부의 고관인 김옥균에 이어 경호원으로 보이는 이도 깍듯하게 모시자, 이선의 정체를 모르는 기생들도 높은 사람이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나리, 특별히 필요하신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저희 아이들은 시서예화에 모두 능하답니다."

행수의 물음에 이선이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시서는 이제 지겹고, 예화가 좋겠군. 아, 소리나 들어볼까."

조선 후기에 등장한 판소리는 특히 이 시대에 전성기를 꽃피우고 있었다. 판소리 애호가인 흥선대원군과 임금의 덕이었다.

"소리 좋지요. 마침 여기에 소리에 능한 아이가 있답니다."

바로 공연이 준비되었다. 고수(鼓手)가 북과 함께 들어오고, 곱게 단장한 묘령의 기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귀인을 모시고 소리를 하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어떤 노래로 하오리이까?"

여인의 목소리는 쟁반에 구슬이 굴러가듯 미성(美聲)이었다.

"음, 뭐든 괜찮은데. 아, 춘향가가 좋겠군."

이선은 판소리에는 조예가 깊지 못해서, 그저 아는 대로 말했다.

"알겠사옵니다. 어느 대목으로 하오리이까?"

이선은 그때야 춘향가를 다 부르기에는 너무 길다는 걸 인지했다.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두하는 대목. 아니, 이몽룡이 시를 짓는 대목부터."

하필 이선이 그 대목을 고르는 걸 보고, 김옥균은 술잔을 들으며 빙긋 웃었다.

여인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소리를 시작했다.

"…… 어사또 일필휘지하야 글 지어 운봉 주며, 운봉은 밖으로 나가 조용한 틈을 타서 한번 떼여보시오. 운봉이 받아 밖에 나가 떼어 보니 글이 문장이요 글씨 또한 명필이라. 고금을 막론하고 위정자는 이 글의 뜻을 다시 한번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니. 그 글에 허였으되,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촉루락시(燭淚落時)에 민루락(民淚落)이요 가성고처(歌聲高處)에 원성고(怨聲高)라!"

금술동이에 담긴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로 만들었고 옥쟁반에 담긴 안주는 만 사람의 기름으로 만들었으니,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성이 높다.

이선은 춘향가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단순히 판소리의 한 대목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현실을 시적으로 압축해 놓았다.

백성들은 이 대목을 들으며, 자신들의 처지와 수령들의 행태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들은 다음 대목에 있을 어사 출두를 기다렸다. 아니, 실제 그들의 삶을 구원해 줄 위정자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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