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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시대
"…… 어사또 일어서며 좌우를 살펴보니 청패역졸(靑牌驛卒) 수십 명이 구경꾼같이 드문 듬성 늘어서 어사또 눈치를 살필 적에, 청패역졸 바라보고 뜰아래로 내려서며 눈 한 번 꿈쩍 발 한 번 툭 구르고 부채 짓 까닥허니 사면의 역졸들이 해 같은 마패를 달같이 들어 메고 달 같은 마패를 해같이 들어 메고 사면에서 우루루루 삼문을 후닥딱!"
여인은 이 대목에서 부채를 펼치고 힘을 주어 외쳤다.
"암행어사 출두야 출두야! 암행어사 출두하옵신다!"
짝짝!
여인의 소리가 끝나자마자, 이선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보냈다. 김옥균과 장무영, 다른 기생들도 따라 손뼉을 쳤다.
"훌륭한 소리요. 아주 잘 들었소.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이선의 물음에 여인이 겸손히 답했다.
"귀인께서 천한 것에게 어찌 말씀을 높이십니까? 편히 대하시옵소서."
"하하, 예인(藝人)은 우대해야지. 신분이 뭐가 대수겠소?"
이선이 까마득히 높은 사람임을 알고 있는 듯, 여인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귀인께서 이름을 묻지 않으시냐?"
김옥균의 물음에 여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예, 계손향이라 하옵니다."
"계손향(溪蓀香), 향기로운 붓꽃이라. 좋은 이름이군."
기분 탓인지, 여인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밀려오는 듯했다.
"내가 소리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지만, 이 대목은 잘 알고 있소. 고금을 막론하고 위정자는 이 글의 뜻을 다시 한번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니."
이선이 대목을 인용해서 말하자, 김옥균이 웃으면서 답했다.
"필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임오년 이후 조정은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아전들의 횡포를 잠재웠소.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옷을 벗겼지. 이제 백성들의 삶은 예전보다 나아졌을까?"
"이르다 뿐입니까? 특히 근래의 개혁안 반포로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행인데,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오. 암행어사가 출두하여 탐관오리를 파직한다고 한들,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반복되겠지."
이몽룡은 어사출두를 하여 춘향을 구한다. 민중은 그 대목을 들으며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뿐이다. 근본적인 개혁을 하지 않으면, 변학도를 제거한다 한들 또 다른 변학도가 새로운 수령으로 오게 된다.
"그렇습니다. 일대 개혁을 실시하여 낡은 제도를 혁파하고 새로운 제도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대내외의 정세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소. 때가 무르익으면……."
이선과 김옥균이 정치 이야기를 시작하자, 행수가 기생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기생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김옥균이 불러 세웠다.
"계손향은 남으시게. 대감, 괜찮으시겠지요? 기껏 기루까지 왔는데 술자리에 여인이 없으면 적적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리합시다."
술기운이 올라 약간 불콰해진 얼굴로 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계손향의 소리에 감탄한 터였다.
방에는 이선과 김옥균, 장무영에 계손향만 남았다. 계손향이 정중히 술잔을 올렸다.
"제 술을 받으시옵소서, 완화군 대감."
"고맙소."
이선은 술잔을 받다가, 순간 목소리를 높였다.
"그대가 나를 아는가?"
"고균 나리께서 이렇게 깍듯이 모시는 분이라면, 조선 땅에 완화군 대감 말고 누가 있으시겠습니까."
이선은 김옥균을 쳐다보았다.
"기생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꽤 했나 보군."
"아니, 그게 아니옵고……."
"고균 나리께서 군 대감을 여러 차례 칭송하였사옵니다. 하오나 저는 그전부터 군 대감을 알고 있었습니다. 도성에 살면서 군 대감의 업적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계손향은 뜻밖에도 말솜씨가 청산유수였다. 이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고균이 그대에게 그리 말하라 시키던가?"
"아니옵니다. 소녀는 비록 천한 기생이오나, 군 대감께 늘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고균 나리께 군 대감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청한 바 있습니다."
"호오, 어찌하여?"
기생이 왕족을 만나고 싶어 한다니, 이선도 호기심이 들었다.
"소, 소녀는……."
계손향은 잠시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소녀는 천주교도이옵니다."
'아, 그런가.'
이선은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군 대감께서 믿음을 허용하시고, 천주교도들을 박해하는 자들로부터 보호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머물다 빛으로 나오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나라에 충성하고 법률을 준수한다면, 나는 무엇을 믿든 개의치 않소."
"신부님께선 완화군 대감을 조선의 콘스탄티누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분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여인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며, 이선은 오히려 민망함을 느꼈다.
"그거 고맙구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천주교도가 되었소?"
"제 부모님께서 신앙인이셨으니, 저 역시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습니다."
"그럼 부모님께서도 기뻐하시겠구려."
"제 부모님께서는 이미……."
"설마, 혹시 병인년에?"
순간 계손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은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다.
"아버지는 병인년에 순교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갓난아기인 저를 업고 멀리 산골로 도피하셨지요.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저는 이리저리 떠돌다 운 좋게 기생이 되었지요."
이선은 한숨을 쉬었다. 죽은 자만 수천 명,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고 들었다. 계손향도 그중의 하나였다. 기생이 된 건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였다.
"유감이오. 당시 조정의 대처가 옳지 못했소. 신자들을 모두 죽일 건 없었지."
김옥균은 놀랐다. 이선이 당시의 조정, 즉 대원군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셈이었다.
'잘못한 건 잘못한 거지. 적당한 선에서 끊으면 될 걸, 결국 전쟁까지 이어졌잖아.'
이선은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대원군을 할아버지이자 위정자로서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병인박해는 명백한 실수라고 생각했다.
"제가 괜한 말을 아뢰어 심기를 어지럽힌 듯합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계손향이 사과했다.
"그대가 사과할 일이 아니오. 조정에서 그대한테 사과할 일이지."
술기운이 들어간 탓인지, 이선은 본심을 드러냈다. 이선에겐 현대적 감성이 남아있었으므로, 계손향이 국가폭력의 희생자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조정이 백성에게 지나간 일을 사과하는 일은 드물었다. 김옥균과 계손향은 당혹과 감격의 눈빛으로 이선을 쳐다보았다.
김옥균이 멋쩍어하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그, 제가 오늘 대감을 모시고 계손향을 만나게 하려고 한 건 맞습니다. 근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지요."
"그 이유가 뭐요?"
"계손향은 조선 여인으로는 매우 드물게도 일어 와 법어(프랑스어), 영어를 할 줄 압니다."
이선은 바로 관심을 보였다.
"아니, 정말 드문 일이군. 어떻게?"
계손향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한다고 하면 부끄러운 일이옵고, 몇 마디 하는 정도이옵니다."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 배우게 된 계기라도 있소?"
"일어는 고균 나리한테 좀 배웠고, 법어는 백규삼(블랑) 신부님께 좀 배웠습니다. 그, 영어는……."
계손향이 부끄러워하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김옥균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사실 계손향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먼 곳에서 온 사내와 말이지요."
"나, 나으리!"
계손향의 얼굴이 새빨개졌는데도, 김옥균은 멈추지 않았다.
"대감, 보빙사로 함께 다녔던 미국인 로웰을 기억하시지요?"
"아, 기억하다마다. 조선에 귀국하기 전에 먼저 떠나 버려서 아쉬웠소. 좋은 청년이었는데."
퍼시벌 로웰은 박정양과 더불어 먼저 귀국했고, 임금을 알현하고 국빈 대접을 받으며 체류하다가 3개월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로웰이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친분을 트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주 유쾌하고 호인이더군요. 그래서 의기투합하여 술자리도 여러 차례 가졌지요. 그래서 기루에도 데려가서 같이 마시고 그랬는데, 글쎄, 그 친구가 계손향한테 홀딱 빠졌지 뭡니까!"
계손향은 아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이야, 이거 근래 들은 말 중에 제일 재미있소. 계속해 보시오."
"계손향도 눈 파랗고 머리 노란 그 친구가 썩 괜찮았는지, 말은 잘 안 통해도 마음이 통하는 뭐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지요."
"그래서 어떻게 됐소?"
"뭐 어떻게 됐겠습니까. 로웰은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고, 계손향은 기적(妓籍)을 떠날 수 없는 신분이고. 몇 주간 애처로운 사랑하다가, 언젠가 재회를 기원하며 로웰은 떠나버렸지요."
"허어, 그런 일이 있었군……."
이선은 일전에 들은 오례당과 아말리아의 이야기에 이어 로웰과 계손향의 이야기를 듣자, 과연 사랑이란 국적과 신분을 초월해 이뤄지는 것이라는 걸 느꼈다.
나는 연회에서 만난 기생들과도 꽤 친하게 지냈는데, 계손향이라는 여인이 특히 친절했다. 그녀는 호랑이처럼 사나워 보이는 내게 처음부터 다정히 대해 줬던 유일한 여성이다. 화계사에서 내 옆에 앉아 일본어 단어 몇 개를 동원해서 서툴게 조잘대는 그녀를 나는 마음의 언어로 이해했으며 가슴 뭉클한 정을 느꼈다. 정말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나의 두 눈이 은비녀로 쪽진 그녀의 새까만 머리털 위를 배회하다가 그녀 얼굴에 꽂혔다. 나를 향해 미소 짓는 예쁜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수천 마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 퍼시벌 로웰, 『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 1885
"계손향은 로웰을 그리워하며 영어를 배우기로 했지요. 하지만 기생에게 영어를 가르쳐줄 사람이 없어서, 백 신부를 통해 법어를 먼저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동문학에서 나온 책으로 영어 공부도 시작했습니다. 제가 한 권 구해다 줬지요, 하하."
"소, 송구합니다. 나라에서 관리들 공부하라고 만든 책을 감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계손향이 겨우 고개를 들어 용서를 구하자, 이선이 웃으면서 답했다.
"용서라니? 나는 칭찬을 하고 싶은데. 아주 진취적이고 훌륭한 자세요. 스스로 비하할 것 없소. 자신감을 가지시오."
이선은 사랑이 만들어낸 학구열에 감탄했다.
"계손향이 자신감을 잃을 법도 한 게, 기생 신분에 별짓 다 한다고 험담을 많이 듣는 모양입니다."
"험담이 아니라 사실인걸요. 서양인을 마음에 품은 것도, 미국에 가고 싶다는 것도, 영어를 공부하고 싶다는 것도 다 헛된 미몽이지요."
계손향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기생들 사이에서도 그럴 진데, 만약 양반이 들으면 경을 칠 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선과 김옥균은 조선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분관을 가진 이들이었다.
"기생도 자유롭게 떠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오. 신분제의 폐지가 시급하지. 인신 제약은 어떤 종류든 사라져야 하오. 개혁을 추진한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오."
계급 해방과 여성 해방은 근대국가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이뤄져야 할 일이었고, 그렇게 되면 계손향의 소원도 이뤄질 수 있을 터였다.
계손향은 이선과 김옥균이 하는 엄청난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선의 말에 더욱 놀랐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정식으로 영어를 공부해보는 게 어떻겠소?"
"소, 소녀가 어찌 감히……."
"영어뿐만 아니라, 서양에 관해 공부할 의지가 있는 이들은 대환영이오. 나라에서 향후 미국으로 보낼 관비 유학생도 뽑을 생각이오. 열심히 공부한다면, 그대도 미국 유학생으로 뽑힐 수 있지. 그럼 그리운 임이랑 재회도 가능할 거고, 하하."
계손향은 고개를 떨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 가당치도 않습니다. 소녀는 계집인 데다, 더욱이 천한 기생이온데 어찌……."
"안 될 건 뭔가?"
이선의 강한 어조에 계손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일본 관리 중에 무쓰라는 이가 있소. 정부 전복을 꾀해 체포된 정치범이었지만, 그 능력을 인정받아 석방되어 지금 영국에 유학 중이지."
"아, 기억납니다. 작년에 제가 일본에 있을 때 특사로 석방되어 풀려났습니다."
"맞소. 이토가 적극적으로 추천했다지. 아무튼, 그 부인도 함께 유학을 떠났소. 영어가 유창하고, 서양 예법에도 능해 동양에서 온 사교계의 꽃이라 불린답디다."
계손향은 이선이 해 주는 이야기에 강한 흥미를 느꼈지만, 곧 관리의 부인은 태생적으로 신분이 다르다고 느껴졌다.
"근데 그 여인은 본래 게이샤였소. 즉, 기생과 같은 처지란 말이지."
"예?"
후일 주미공사에 이어 외무대신이 되는 무쓰 무네츠(陸奥 宗光)의 부인 료코(亮子)는 미모와 총명함으로 인해 '워싱턴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본래 게이샤 출신이었다.
"알겠소? 지금의 시대는, 불가능이란 없소.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시대지. 우리 위정자의 역할은, 백성 모두가 태생의 제약 없이 그 능력을 도야시키게 하는 것이오. 타고난 성별과 신분이 무슨 대수겠소? 인간이 타고난 것이 있다면 오직 그 재능과 품성이오."
이선은 계손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재능과 품성을 갈고 닦으면, 분명 그대에게도 기회가 오겠지. 그러니 희망을 가지시오. 나는 모든 백성이 희망을 가지고 이룰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소. 나와 고균이, 그리고 조정이 그대의 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