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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흥업(殖産興業)
이선은 즉시 개혁을 위해 필요한 작업에 들어갔다. 이선은 외아문 수협판 김홍집과 외아문 협판 겸 총세무사 묄렌도르프를 만났다. 1884년 갑신년이 저물고 있는 상황에서 1884년도의 대내외적 상황을 점검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고문관인 묄렌도르프가 실무를 총괄한다면, 조선에서 단연 유능한 관료라 할 수 있는 김홍집은 이선과 함께 개화 정책을 총괄했다.
"근래 해관세 수입은 어떻습니까?"
"현시점에서 조선 최고의 수입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에서 체결된 관세 10%, 사치품 30%의 적용이 모든 국가에 적용되었다. 실제 역사에서 1883년 조영 조약이 개정됨에 따라 관세는 5~7%로 줄어들었고, 최혜국 대우에 따라 모든 국가에 관세가 인하되었다.
조선과 무역 규모가 가장 큰 일본은 개정에 저항했지만, 결국 1883년 조일 통상 장정과 해관 세칙을 제정해 관세 10%를 적용했다. 서양 열강들이 10%를 적용하므로 일본이 더 이상 강력히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이선의 노력으로 원안을 유지해 상당한 관세자주권을 누림으로써, 조선은 역사보다 최소 2배의 해관세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개정 세칙에 따라 1884년부터 본격적인 해관세 수입을 거둘 수 있게 되자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조선에 상당히 재정적 기여가 되었다.
"현재 대일 무역의존도가 너무 높습니다. 무역의 다변화를 노릴 필요가 있습니다."
"예, 그래서 다양한 노선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조일 통상 장정의 반대급부로 조선은 일본 선박의 연해 무역권과 정기운항권, 어채권을 일부 넘겨줬다. 일본은 여전히 대조선 무역은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선은 중국의 서양 자본을 직접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동아시아 무역을 주도하던 영국계 자본 이화양행(怡和洋行)의 상해 지점장 거빈스(Gubbins)가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화양행은 상하이-인천-부산-나가사키를 운행하는 화물 증기선을 개통하여 기존 항로를 독점하다시피 하던 미쓰이(三井)물산의 경쟁자로 등장했다.
묄렌도르프는 이화양행 외에도 동아시아의 독일 거상인 마이어 상사(H.C.E. Meyer & Co.)를 끌어들여 1884년 제물포에 세창양행(世昌洋行)을 건립했다. 세창양행의 자본 투입에는 묄렌도르프도 참여하여, 조·독 합작 회사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카를 볼터(K. Bolter)가 이끄는 세창양행은 무역 대행업체로서 다른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면제품 등을 수입하고 곡물을 수출하였으나, 묄렌도르프의 권유를 받아 점차 규모를 키워갔다.
특히 서양의 공산품과 각종 기계, 기선과 무기 구매까지 알선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식산흥업 정책의 진행 상황은?"
묄렌도르프는 이선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9가지 개혁안을 제시했고, 이선은 이를 채택했다.
행정·재정·사법·군사·교육 개혁 문제는 상당한 시간과 예산을 필요했으므로, 묄렌도르프는 일단 쉽게 할 수 있는 농업과 상공업, 무역과 교통 분야에서 혁신을 시도했다.
이선이 보빙사로 가서 미국에서 들여온 차관 200만 달러가 경제 개발의 기초 자금이 되었다.
"먼저, 농업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에서 농업 분야를 집중적으로 시찰하고 온 오위장 최경석과 변수가 국영 농장에서 새로운 생산을 촉진했다. 서양의 농기계와 농법을 도입해 농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농작물과 시비법(施肥法, 거름)을 개량하여 생산성을 높였다.
이어 인삼, 목화, 뽕나무, 대마, 연초 등 상업 작물의 재배도 장려했다.
이를 위해 내아문 산하에 전매국(專賣局)이 설치되었다. 전매국에서 특히 중시한 건 홍삼으로, 삼정과(蔘政課)의 주도 아래에 조선의 주된 수출품이자 수입원이었던 홍삼은 국가 전매제로 확립되었다. 그동안 이선의 지원을 받아 청과의 홍삼 무역을 주도하던 송상과 만상 등 기존의 민간 상인들에게 생산의 우선권을 주되, 전매국 삼정과를 통해 확고한 국가 통제하에 둔 것이다.
또한 양잠공사(養蠶公司)를 신설하여 독일인 양잠 전문가 메르텐스(Mertens)를 고용, 인천 부평 일대에 대규모 뽕나무밭을 조성했다. 부평의 뽕나무밭 규모는 100만 주에 달했다.
연초, 즉 담배도 조선의 유망한 상업 작물로 주목받았다. 각종 상업 작물의 재배 적격지를 찾기 위해, 독일인 지질학자 크니플러(Kniffler)가 조선의 토질조사에 돌입했다.
묄렌도르프는 상업 작물들을 원료로 공장을 건설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서구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적인 수공업을 근대적 공장제 수공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묄렌도르프가 제안하고 이선이 받아들인 안은 기존 산업을 개량하고 수입대체 산업과 수출품을 중점 육성하여 자주적 경제발전을 꾀하는 안이었다. 성장 잠재성이 낮거나 가격경쟁력이 약한 산업에 특화한다면, 선진국과의 경제적 격차가 더욱 커지고 원료시장으로 전락할 터였다.
묄렌도르프가 제안한 상품들은 유리, 성냥, 도자기, 부채, 돗자리, 직물 등 기존의 가내 수공업을 공장제 수공업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모두 소자본으로 공장 설립이 가능하고, 백성들의 기본 생활에 필요한 것이었다. 조선 시장 내에서 수요와 공급을 모두 창출한다는 점에서 효율적이었다.
먼저 실생활에 필요한 경공업을 촉진한다는 원칙에 따라, 소규모 공장들이 한성 인근을 중심으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앞으로 군대가 팽창할 터인데, 최소한 국가 주도하에 총알과 포탄, 피복과 각종 군수품 정도는 스스로 생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선은 군수산업의 창출에도 신경 썼다. 브라노벨의 바쿠 유전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익을 군수산업에 투자했고, 루트비히 노벨은 약속대로 전문가를 파견해 현지 생산에 돌입했다.
기기국(機器局)이 신설되어 옛 군기시(軍器寺) 화약도감(火藥都監) 자리에 기기창이 설립되었다.
초대 기기 총판이 된 박정양의 지휘 아래에, 브라노벨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각종 화약과 무기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기초적이었으나, 근대식 무기 생산의 시작이었다.
"광산 개발은 반드시 국가의 주도하에 이뤄져야 합니다."
이선은 서양이 원하는 형태인 이권 양여를 통한 개발은 할 생각이 없었다. 광산은 재정이 열악한 조선에서 국부(國富)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
국가 재정에 크게 기여하게 될 금은과 산업의 기간이 드는 철 그리고 석탄만큼은 정부의 통제하에서 국익을 창출해야 했다.
독일계 미국인으로 광산 전문가 로젠바움(Rosenbaum)이 외아문에 고용되어 전국 광산의 조사에 착수했다.
묄렌도르프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세관을 비롯한 각종 전문 분야에 서양인 직원을 여럿 채용했다. 조선에서 일하는 서양 민간인 중에서도 단연 독일인이 가장 많았다.
예컨대 묄렌도르프가 총세무사로 재직 중인 해관의 경우 32명의 외국인이 근무 중이었는데 이 중 10명이 독일인이었고, 여러 부처를 통틀어 조선을 위해 일하는 외국인 직원 60명 중 27명이 독일인이었다.
이로 인해 묄렌도르프는 독일인만 집중적으로 채용한다고 다른 서양인들, 특히 청국에서 주요 직책을 도맡고 있던 영국의 비난을 받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독일인 전문가라면 믿을 만하지. 그리고 동아시아 정책에서 중립적인 독일이라면 다른 나라의 거부감도 덜하고. 그런 점에서 독일인과 미국인이 가장 무난하지.'
한 가지 요인도 더 있었다.
'이홍장이 묄렌도르프를 보내면서 한 말처럼, 일본은 독일인 말이라면 꼼짝 못 하는군. 일본 곳곳에 독일인 고문관이 가득하니…….'
메이지 유신의 방향이 프로이센식 개혁으로 정해짐에 따라, 특히 1880년대에 독일인 고문관이 대거 채용되었다. 일본인은 독일인을 높이 평가하여 그 권위에 복종했고, 이선은 그 점을 이용했다. 묄렌도르프와 독일인 고문관들은 일본을 상대로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조선의 상업과 무역을 육성하기 위해, 여러 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기존의 국내 무역을 주도하던 경강상인과 송상, 만상, 유상(평양 상인), 보부상들은 일본과 청국, 서양 상인의 침투에 위기감을 느꼈다. 이선은 이들을 규합하여 무역회사 설립을 권유했다.
왕실의 부마인 박영효와 개화파 관료 신기선을 사장과 부사장으로 하여, 경강상인과 보부상들은 인천에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의 순신창상회(順信昌商會)를 설립했다.
전통적으로 상업은 최고라 자부했던 개성의 송상도 뒤처질 수 없었다. 의신상사(義信商社)를 설립했다. 송상 출신으로 이선의 홍삼 무역을 대리하던 송금덕이 이선을 사장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이선은 정중히 거절했다.
'식산흥업 정책을 주도하는 내가 특정 회사의 사장을 맡으면 정경유착이고, 특혜의 의혹을 받지.'
원래 운현궁과 가까웠던 송금덕은 대신 이재면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이재면이 의신상사의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평안도는 상업이 발전하여 시대를 읽는 눈이 빨랐다. 평안도의 유상과 만상이 수십만 냥을 출자해 대동상회(大同商會)를 인천에 설립했다. 대동상회는 반관반민이 아닌 순수 민간회사였다. 이들은 상당한 자본 규모로 단기간에 전국적인 영업망을 확립했다.
조정에서는 상회를 육성하고 보호하여, 설립 때부터 기무처가 전국 각 지방관에게 상회의 영업활동을 보호해주고 잡세나 분전(分錢)을 징수하지 못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래서 출자자인 사원들이 기무처에서 발급한 상회의 빙표(馮票)를 가지고 전국 각지에서 상품 매매를 할 때는 지방관의 보호를 받았다.
전통적으로 농업을 본업으로 삼고 상업을 천시했던 사농공상의 조선에서, 자본의 시대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천과 부산, 원산이 개항장으로 무역 규모가 크게 늘었습니다. 당연히 이로 인해 해관세 수입도 늘어났습니다. 추가 개항도 고려해 볼 만합니다. 기선을 확보해 해로무역을 확대하고, 항만 접안 시설을 확충해야 합니다. 육로 교통도 확대해야 합니다. 낙후한 도로를 개선하고, 철도 부설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조선의 배는 범선뿐이었으므로, 조정은 기선을 여러 척 구입해 화물선으로 사용했다. 이제 조운선과 각종 운송은 기선이 대체할 예정이었다.
육로운송도 개선하여, 간선 도로마다 확충 작업에 들어갔다. '근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철도 부설도 계획에 돌입하여, 제일 먼저 한양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 철도를 미국 자본과 논의를 시작했다.
"전신국이 신설되어 조선과 중국을 잇는 전신이 설치되었고, 곧 우정총국이 신설되어 우정 업무를 맡을 예정입니다."
1884년 9월, 전신국(電信局)이 세워져 통신 업무를 담당했다. 한양-평양-의주-중국을 잇는 서로전신선(西路電信線)이 개통되면서 조선이 드디어 세계를 잇는 전신의 체계에 편입되었다. 세계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885년에는 한양과 부산을 잇는 남로 전신선도 부설하고, 해저 전신선을 설치해 일본과의 통신도 준비 중이었다.
연말에는 우정총국이 신설되어 우정 업무도 시작될 예정이었다. 초대 우정총판으로 임명된 이는 홍영식이었다.
'우정총국이라. 갑신정변이 일어난 바로 그 장소지. 이제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겠군.'
음력 10월 17일, 양력 12월 4일에 우정총국 개국 연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역사대로라면 바로 그 시간과 장소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조선의 근대화 정책은 한참 동안 지연되어야 했고, 우정 업무도 시작조차 못 한 채 10년간 중단되었다.
하지만 바뀐 역사에서는, 조선의 우정 업무 시작을 알리는 순수한 우정총국 개국연회가 될 터였다.
"아주 좋습니다. 식산흥업 정책은 5개년을 목표로 잡고, 개국 498년(1889년)까지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1884년부터 본격화된 식산흥업 정책의 1단계는, 1889년까지 낙후한 산업을 일신하여 근대적 산업의 기초를 닦고 완수할 예정이었다. 1890년부터는 2단계에 돌입할 계획이었다.
"외부의 간섭 없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묄렌도르프의 전망에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게 내 목표입니다. 우리는 내정의 기초 위에서, 외정을 추진해야 합니다. 내정 없는 외정은 사상누각이니까. 하지만 외정의 뒷받침 없이 내정을 완수할 수도 없지요. 외정 없는 내정은 지리멸렬하게 될 겁니다. 내정과 외정의 조화 위에서, 우리의 목표는 계획대로 달성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