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23화 (12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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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甲)과 을(乙)

심사숙고하던 끝에, 이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갑 안은 온당치 못하고 을 안이 옳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개화당이라고 하는 자들을 도와 조선을 개명의 길에 나아가도록 하는 것도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토의 온건한 의견에 지금까지 조선에 대한 방관 정책을 하던 이노우에도 동의를 표했다.

"궁내경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때 군부를 대표하는 야마가타가 이의를 제기했다.

"재작년 조선의 정권 교체 이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의 거의 상실된 상황입니다. 제국 정부가 지나치게 소극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청이 프랑스와 전쟁 중인 지금이 바로 정책을 전환해야 할 시기가 아닙니까?"

"현재 조선을 이끄는 대원군은 단호한 노인이고, 완화군은 유능한 청년입니다. 무엇보다 완화군이 청의 이홍장이나 러시아의 차르와 특별한 관계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용인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다케조에 공사의 말대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청국 혹은 러시아에 모든 주도권을 내주잔 말씀입니까? 조선은 일본 제국에 매우 중요한 나라입니다."

이토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내무경께서는 일본이 청이나 러시아와 일전을 각오할 능력이 된다고 보십니까?"

"러시아는 무리지만, 청은 프랑스와 손잡고 일전을 벌이면 해볼 만합니다."

프랑스와 일본은 막부 시절부터 가까운 나라였고, 일본이 최근 독일로 전환하기 전까지 거듭 군사고문관을 파견한 나라였다. 프랑스는 일본에 은근히 참전을 권유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모험적입니다. 만약 일본이 프랑스를 도와 참전하더라도, 이익은 프랑스만 보고 일본은 손해만 볼 겁니다. 지금은 대외 전쟁을 벌일 때가 아닙니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조슈 출신 동향 친구이자 동지였다. 하지만 정부를 대표하는 이토와 군부를 대표하는 야마가타 사이에는 대외정책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대장경 마쓰카타도 이토를 거들었다.

"현재 재정 상황을 볼 때, 오직 내정에만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적어도 5년은 모험적인 정책을 추진하면 안 됩니다."

1881년 '메이지 14년의 정변' 이후, 일본 정계는 조슈-사쓰마 번벌 정부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정권을 주도하는 이토, 이노우에, 야마가타가 모두 조슈 출신인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슈가 우위에 있었다.

조슈가 육군과 대륙 진출을 원한다면, 사쓰마는 해군과 대양 진출을 원했다. 마쓰가타는 사쓰마를 대표해 조슈와 육군을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금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정금(正金)을 확립하는 겁니다. 쓸데없는 지출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마쓰가타는 금본위제 확립을 목표로 대대적인 재정개혁에 돌입했고, 세제(稅制)를 개혁해 정부의 재정수지를 크게 개선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였다. 극도로 지출을 억제하는 마쓰가타의 정책과 전쟁을 유발하는 모험적인 대외 정책은 상극이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오히려 정부가 아니라 민당(民黨)의 무리가 정책에 관여하는 겁니다. 여러분, 자유당이 조선 문제에 개입하려고 했던 거 아십니까?"

1880년대 초, 일본에서는 자유 민권 운동과 의회 개설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873년에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퇴진한 전 참의 이타카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자유당 총재가 이를 대표했다.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은 가혹한 개혁을 동반했고, 특히 농민들의 희생이 컸다. 농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폭등하고, 자유 민권 운동의 영향으로 이념화가 진행됐다. 자유당조차 급진적인 농민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질 정도였다.

1884년 11월, 지치부 사건(秩父事件)이 발생했다. 자유당과 연계된 지치부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 철폐와 부채 탕감을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추수해도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 대체 누구를 위한 정부란 말인가?"

"고리대금업자와 악질 지주를 타도하자!"

"폭정을 일삼는 번벌 전제 정부를 타도하자!"

지치부 봉기가 간토 일대에서 상당한 호응을 받으면서, 가난에 허덕이던 수만의 농민들이 봉기에 참여했다. 격화된 봉기는 '번벌 정부 타도'로 목표를 전환했고, 경찰서와 관청까지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봉기의 확산에 놀란 일본 정부는 간토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 정규군 병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진압 작전에 돌입했다. 내무경 야마가타는 강경한 진압을 명령했다.

"감히 천황 폐하의 군대에 맞서는 폭도들에게 단호한 힘을 보여 주어라!"

예상 밖의 상황 전개에 자유당 지도부도 놀라서 지치부 봉기를 비난했다.

"자유 민권 운동은 평화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폭력적인 봉기는 우리 당의 뜻이 아니다."

상대적 온건파인 이토는 민심을 고려해 자유당 총재 이타카키와 상의원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를 만나 정부 입각을 권유했다.

이들은 입각을 고사했으나, 이때 이토는 고토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자유당 지도부는 프랑스 자유주의를 모델로 생각했고, 얼마 전 이타카키와 고토는 프랑스 시찰도 마치고 돌아온 길이었다. 9월, 청불전쟁이 격화되자, 이들은 비밀리에 주일 프랑스 공사관을 방문해 주일 프랑스 공사 시엔키에비치를 만났다.

이타카키는 먼저 프랑스의 승전을 기원한다고 말하다가, 갑자기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나는 일본 정부와는 견해를 달리합니다. 일본 정부는 청국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청국을 쳐부수는 아무 일도 못 한다는 사실을 공사께서는 알아야 합니다. 고토 씨가 조선 문제에 관해 설명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고토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우리들은 극비리에 여기에 왔습니다. 우리들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는 일본 정부에 알리지 말기 바랍니다. 현재 조선은 몹시 불안정한 상태에 있습니다. 한편 일본은 어떤가 하면 만족할 만한 상태가 아니고, 자유로운 시대가 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계획은 조선이 독립을 회복하고 강해지도록 원조하고, 조선이 강대해진 것을 보고 일본이 부러워하고 자유를 향해 치닫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조선과 수교조약을 체결한 당사자인 시엔키에비치는 이들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는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입니다. 조선 정부와 관련이 있는 일입니까?"

"나는 일전에 일본에 온 김옥균, 박영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조선 국왕과 왕자가 소중히 여기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조선국이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이뤄내려면 어떤 방법이 있고, 또 누구하고 의논하면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국왕과 왕자도 이 계획에 전적으로 찬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엔키에비치는 조선 왕자, 즉 이선과 직접 회담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선은 그런 뉘앙스를 일언반구도 비추지 않았다.

공사는 의심이 들었다. 일본의 야당인 자유당이 조선 문제에 개입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일본 국내 정치와 연결하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외교관다운 조심성을 발휘해 답했다.

"마땅히 먼저 신식 군대를 편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청국이 눈치 채게 되면, 사단을 일으키게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고 있으므로 인제 와서는 불가능합니다. 청국은 조선의 신식 군대 편성을 수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현재 조선에는 독일 외교고문관, 미국 재정 고문관, 영국 군사고문관이 있습니다. 왕자와 러시아와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오직 귀국만 뒤처져 있습니다."

고토가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서 공사와 의논하고자 왔습니다. 프랑스는 교관, 법률가, 행정가를 파견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들의 의뢰를 귀국이 받아들인다면, 조선은 귀국 영향권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일본에도 매우 만족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조선은 진정 자유로운 독립국이 될 것이고, 일본도 조선에 뒤처지지 않도록 자유를 향한 길을 걷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모든 노력은 여기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프랑스 공화국에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조선에 필요한 것은 우선 군대 조직을 위한 100만 달러, 즉 500만 프랑의 차관입니다."

고토는 공사의 반응에 흥분하듯이 말했지만, 시엔키에비치는 냉철했다.

"그렇다면 조선이 제공할 수 있는 담보는 무엇입니까?"

"조선은 광산을 담보로 하고, 채굴권을 귀국에 제공할 수 있습니다. 조선 국왕과 왕자, 5명의 대신은 내가 지금 공사에게 말한 계획에 대해 호의적입니다. 프랑스 자금을 제공하는 대로 나는 사람을 김옥균과 박영효에게 보낼 것입니다. 김과 박은 왕에게 보고할 것이고, 우리는 왕의 승인을 얻는 대로 이미 준비된 계획을 시행으로 옮길 것입니다. 그 주요 내용은, 조선인으로 조직된 군단이 서울에 머문 청국병을 몰아내고, 청국을 지지하는 대신들을 물리치고, 조선에 새 정부 조직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과연 청국은 방관하느냐가 문제인데, 별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청국은 프랑스가 조선을 돕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부터 무력해질 겁니다.

"본국에 보고하겠습니다.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준 것에 감사합니다."

이타카키와 고토는 프랑스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 착각했지만, 공사는 지극히 외교관다운 조심성을 발휘한 것이었다. 시엔키에비츠는 파리에 회동 내용에 대해 보고했다.

*

도쿄-파리. 주일 공사관 정책 의견서 제 55호

기본적으로 이 계획이 실현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다. 왜냐하면, 조선은 실제로도 독립국이므로, 프랑스 정부가 제공한 자금을 뜻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당하고 합법적인 일은 없다. 그러나 사태가 진전되면, 이해관계를 가진 유럽 각국에서 이의가 날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들은 프랑스가 조선에서 맡게 될 새 역할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북경 정부를 극단적으로 자극하면서 조선과의 제휴를 추진할 수는 없다. 청에게 조선은 베트남과는 전혀 다른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청을 극도로 자극할 경우 프랑스는 청과 진짜 전쟁, 즉 북경을 제압해야 할 전쟁에 끌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는 공화국 정부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리라 생각한다.

조선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을 통해 추가 정보를 입수해보겠다. 각하의 훈령을 기다리겠다.

파리-도쿄. 총리 겸 외무장관 쥘 페리의 답신.

귀하가 취한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지금 문제는 조선에 프랑스 공화국 정부를 대표할 외교관이 없다는 점이다. 공화국 정부는 조선과의 조약을 비준하고, 정식으로 상주 외교관을 파견할 예정이다. 주청 프랑스공사 파트노트르가 적당한 때에 조선에 입국하여 교섭하는 임무를 맡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들은 조심해서, 조선 문제에 관한 어떠한 개입도 피해야 한다.

*

이토가 고토에게 입각을 권한 자리에서, 고토는 술에 취해 프랑스 공사와의 회동을 누설했다. 이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유당 무리가 정부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을 멋대로 추진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다케조에 공사에게 훈령을 내려, 이 계획이 사실인지 탐지하게 해본 겁니다. 정말 완화군과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일을 꾸미고 있는가 여부를."

다케조에가 조선으로 귀임하여 개화당과 접촉하고, 청을 도발하는 모험적인 행위를 벌인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개화당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다케조에는 비밀전문을 통해 자유당이 조선의 동의 없이 멋대로 일을 꾸민 것이라 결론을 내려 보고했다.

"하마터면 자유당 무리의 도박에 제국 정부가 놀아날 뻔했습니다. 자유당의 목적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의 정권 탈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필 이 시기에 지치부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도 수상하고."

결국 오쿠보와 사이고가 대립한 1873년의 '정한론' 논쟁이나, 정부와 자유당이 대립한 1884년의 갑신정변 개입이나, 일관적인 조선 침략 정책이라기보다는 일본 국내 정치를 누가 주도하냐는 문제였다.

"내각제로 전환하고 내정을 일신하려는 이 중요한 시기에 자유당의 망동을 놔둘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타카키와 고토에게 자유당의 자진 해산과 정치 불개입, 유럽으로의 외유를 권유할 생각입니다."

"그들이 응하겠습니까?"

이토가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정 불응한다면 강제해산이라도 시키는 수밖에. 자유당이 지치부와의 연계를 부인했으니, 반란을 일으킨 폭도들은 더욱 관용 없이 강력히 진압하는 거로 합시다."

"그렇다면 조선 문제는……."

"당연히 을안을 택해야지요. 지금은 조선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때가 아닙니다. 최대한 조선을 우호적으로 대해 조선 국왕과 왕자, 관료들이 일본에 호의적인 생각을 지니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들이 정말로 어일신(메이지유신)과 같은 대변혁을 꿈꾼다면, 결국 자연히 청국보다는 일본식 개혁에 호감을 보이게 될 겁니다."

각의를 주도하는 이토의 의견에, 이노우에와 마쓰가타는 긍정적으로 함께했다.

야마가타는 여전히 이토의 온건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대세를 거스르지 않고 옛 친구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야마가타와 군부가 대륙 진출의 야심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이미 1884년부터 5년 계획으로 육군 72개 대대 병력을 증원한다는 계획을 세운 터라, 야마가타는 때를 기다리며 힘을 축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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