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25화 (12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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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謀議)

1884년의 마지막 달, 이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대내적으로는 임금의 암묵적 동의와 개화파의 지지를 얻고, 대외적으로도 열강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이제 혁명적 변화의 시간이 왔다.'

이선은 마지막으로 동의를 얻을 대상으로 대원군을 찾았다. 지금까지 대원군은 개혁에 동의하고 함께 해왔지만, 이선이 추구하는 급진적 근대화에 동의할지는 미지수였다. 서구화에 반감을 느낄 사대부의 저항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원군의 지지는 필요했다.

'대원군의 동의만 받아 내면, 보수파의 반대는 막아 낼 수 있다.'

"할아버님, 소손이옵니다."

"음, 그래. 요새 바쁜 것 같더구나."

"송구하옵니다. 대내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 보니……."

"할 일이 많다는 건 좋은 거다. 계유년(1873)에 은퇴하고 10년간 얼마나 적적하던지, 허허."

대원군은 철저한 정치적 인간이었다. 권좌에 앉아 국정을 맡을 때 삶의 행복을 느끼고, 권좌에서 밀려나면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했다.

"지금은 일이 많으니 더없이 좋구나. 그래, 네가 하는 일은 어떠냐?"

이선은 국제정세, 청불전쟁의 전황, 근래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청일 간의 알력, 자신이 추진하는 중립화와 열강의 승인 여부를 설명했다. 대원군은 다른 일보다 원세개의 행태에 혀를 찼다.

"원세개, 이 건방진 놈. 새파랗게 어린놈이 감히 주상 앞에서 그따위 망발을 부려? 내 앞이었다면 따귀라도 때려줬을 거다."

대원군이 원세개의 싸다구를 때릴 걸 상상하니, 이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원세개가 오만방자하다고 하나, 어차피 북양대신의 아랫사람입니다. 제가 직접 이홍장과 논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좋다. 근데 정말 청일 간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느냐?"

"지금 당장은 아니겠으나, 향후 10년 이내에 그럴 가능성이 무척 큽니다. 두 나라는 동양의 패권을 차지해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까요."

"동양의 패권? 만약 청일 간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조선은 단 한 뼘의 영토도 내줄 수 없다."

대원군은 조선의 국권 수호와 영토 보전에 만전을 기했다. 이선은 바로 이 지점에서 대원군을 설득할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언해 열강의 승인을 얻고, 대내적으로는 철저한 혁신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합니다."

"철저한 혁신이라. 지금 하는 정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인가?"

"그러하옵니다. 지금의 조선은 서양은 말할 것도 없고, 청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한참 뒤떨어졌습니다. 이 간격을 단기간에 메우지 않으면 국권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그럼 어찌하겠다는 것이냐?"

"현재 추구하고 있는 정책은 청의 양무운동과 유사합니다. 하오나 이로는 부족합니다. 일본의 유신, 더 나아가 덕국과 아라사의 대개혁과 같은 방법을 수용하지 않으면 단기간에 격차를 메울 수 없습니다."

이선이 고개를 숙이며 청했다.

"조선이라고 어찌 일본처럼 하지 못하겠습니까? 덕국이나 아라사처럼 되지 못하겠습니까? 부국강병을 이루어내 조선의 기치를 드높이고, 왕권은 만대에 걸쳐 존엄을 누리며, 만백성은 새로운 시대를 만끽할 것입니다."

대원군은 눈을 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선은 구태여 침묵을 깨지 않았다. 대원군에게 넉넉히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마침내 대원군이 입을 열었다.

"네가 나아가려는 길이 옳다고 확신하느냐?"

"정치함에 있어 확신만으로는 되지 않겠습니다만, 저는 옳다고 확신합니다."

대원군은 확신을 표하는 이선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옛일을 회고했다.

"나는 병인년에는 법국과, 신미년에는 미국과 싸웠다. 그리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지. 너도 그 문구를 알 것이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다."

그 말처럼 대원군은 한때 대외 초강경론자로서 전쟁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서양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대원군이 추구하는 국내 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임오년 이후에는 서양과 조약을 맺고, 전국의 척화비를 모두 뽑아버렸다. 서양인 관료들의 초빙도 받아들이고, 그들 방식을 도입하는 것도 동의했지. 그러자 사대부들은 내가 표리부동한 자라고 비난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대원군은 쓴웃음을 짓다가, 웃음을 거두었다.

"하지만 나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인 거다. 병인년에는 서양과의 투쟁이 필요했다. 하지만 임오년에는 서양과의 화친이 필요했기에 따랐다. 그뿐이다. 앞으로 필요한 시대의 변화가 서양식 개혁과 부국강병이냐?"

"정확히 보셨습니다. 실로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그리하도록 하라! 너에게 전권을 맡기도록 하겠다. 나는 네가 하려는 일을 지지할 것이다."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 듣지도 않았는데 대원군이 화통하게 수락했다. 그만큼 손자를 믿는다는 의미였다. 이선은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할아버님의 기대, 아니 조선의 기대에 결코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내 나이 환갑을 넘겨 예순다섯이다. 나는 이미 늙었다. 낡은 시대밖에 보지 못했지. 나의 사명은 외척을 몰아내고 세도(勢道)를 끝장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위로는 왕권을 드높이고 아래로는 민생을 평안히 하고자 했다. 그게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이었다."

"참으로 꼭 필요했던 시대적 사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는 아직 젊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보았지. 네가 나아가려는 길이 옳다고 믿는다면, 거침없이 나아가도록 하거라."

대원군은 본래 완고한 사람이었다. 절대 권력에서 스스로 내려올 사람도 아니고, 급진적인 변화를 받아들일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선의 성장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시대의 변화가 왔음을,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청년들의 시대가 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언제 일을 시작할 생각이냐?"

"시기를 놓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청불전쟁이 한창이고, 청일 간에 전쟁설이 나오는 작금이 적기입니다. 갑신년이 가기 전에 시작하고자 합니다."

대원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이란 단숨에 쥐고, 권력을 쥐었으면 폭풍처럼 밀어붙여야 한다. 내가 집정 초기에 거의 모든 일들을 했음을 명심하거라. 경장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반격의 틈을 주면 아니 된다."

비변사 폐지, 호포법 실시, 탐관오리 처벌, 도고 혁파, 경복궁 증건, 서원 실태 조사 등은 모두 즉위 초기인 1864년과 1865년 사이에 이뤄진 일이었다.

"다만 가장 핵심적인 경장은 수위를 조절하여 때를 기다린 후에 시행해야 한다.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는데 일을 추진하다간 역으로 당할 수 있다."

대원군이 가장 공을 들인 사업은 서원 철폐였다. 서원 실태 조사를 마치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친 1871년에야 서원 철폐령을 단행했다. 그만큼 기득권을 가진 양반들에게 저항이 큰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이선이 궁극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사업은 토지개혁이었다. 이는 다른 일과 달리 단기간에 이뤄질 사안이 아니었다. 먼저 전국적으로 양전을 실시해 토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후에 가능했다. 전국적인 양전만 해도 최소 5년은 필요하다고 추정되었다.

농업 국가인 조선에서 토지개혁은 꼭 필요한 일이나, 이에 대한 저항도 엄청날 터였다.

대원군이 신미양요 '승전'의 비상시국을 이용해 서원 철폐를 단행한 것처럼, 이선도 대외적 승리를 거둔 후에야 토지개혁을 추진할 동력을 얻으리라 생각했다.

"성상과 국태공의 명을 받들어, 반드시 경장을 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이 절을 하며 감사를 표하자, 대원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국가의 대업이 너에게 달렸다."

대원군의 동의까지 얻어내자, 이선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이선은 개화당과 즉각 모의를 시작했다.

"청불전쟁의 격화와, 청일 충돌을 명분으로 삼아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친위대를 동원해 궁궐을 호위하고, 성상의 명으로 대경장을 선포한다. 개혁 정강은 조보(朝報)를 통해 발표하고, 성상께서 종묘로 나아가 열성조(列聖朝)의 신위 앞에서 선언한다."

"오오,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막연히 생각만 하던 일이 드디어 현실로 이뤄진다고 하자, 개화당원의 감정이 고양되었다.

"그리고 덕국 외교관의 이름으로 대외 중립을 만국에 선포한다. 덕국과 아라사는 곧장 승인할 것이며, 동의하지 않는 나라는 내가 직접 설득하도록 하겠소."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면, 국내의 반대는 물론이고 외국이 개입할 여지도 없었다.

"시기는 언제가 되겠습니까?"

"정세 변화에 따라 유보적이겠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는 일시는 갑신년 11월 그믐날이오."

갑신년 11월 30일, 즉 1885년 1월 15일.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만약의 때를 대비해, 군대의 동원을 확실히 해야 할 것이오. 친위대 3000명은 우리가 확실히 통제하고 있으니 걱정할 게 없고."

친위대 참령관 정유진과 서재필이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추가로 더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겠소? 구식 군대 말고 신식 군대로만."

"제가 경기도에서 새로 양성한 병력이 있습니다. 4개 영으로 2000명 정도입니다."

경기도 관찰사 박영효는 지방에서는 최초로 신식 군대를 모집했다. 전통적인 요새인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방위를 명목으로 징집하여 주둔 중이었다.

"한성으로 진입할 필요는 없지만, 한성으로 향하는 주요 통로를 통제하도록 하시오. 특히 인천과 강화가 중요하오. 강화는 친군심영(親軍沁營)이 지키고 있지만, 인천에는 병력이 부족하지. 1000은 인천으로 보내 제물포 항구를 철통 경계하시오."

만약 청군이나 일본군이 개입하려고 든다면 해상으로 올 게 분명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또한 함경도 남병사 윤웅렬이 1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함흥에서 대기 중입니다."

개화당원인 윤웅렬의 부대는 러시아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상 러시아제 신식 무기로 완전 무장하고 있었다.

"한성까지 올 필요는 없지만, 개항장인 원산을 확실히 통제할 필요가 있소. 병력을 원산으로 보내 주둔하라고 하시오."

"알겠습니다."

"정권을 장악하고 제일 먼저 시급한 일은 군대의 재편이오. 아직은 신식 군대의 수가 수천에 지나지 않지만, 앞으로는 수만, 더 나아가 수십만이 될 것이오."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각자 맡은 일을 수행합시다. 그리고 때가 되면 내가 명을 내리겠소."

"군 대감의 명이 떨어질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개화당원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이선은 만사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청이나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으로 진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현재로서 청이나 일본이 군대를 동원할 여유가 없지만, 어느 나라나 강경파의 폭주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 대비해야해. 중립선언이 문서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했을 때 영국이 중립조약을 근거로 개입한 것처럼.'

이선은 묄렌도르프와 함께 베베르를 찾아 유사시 러시아 해군의 동원이 가능한지 물었다. 조선에 근대적 육군은 막 태동하고 있었지만, 해군은 전혀 없는 탓이었다.

"함대뿐만 아니라 육군도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조선에 러시아군이 있으면 청과 일본은 감히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묄렌도르프는 이선보다 더 적극적으로 러시아의 '보호'와 육군의 주둔을 희망했지만, 이선은 이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청과 일본은 차치하더라도, 영국을 극도로 자극하게 될 겁니다. 러시아군의 개입은 어디까지나 청일이 먼저 군사를 동원하는 최악의 경우에 한정해야 합니다."

이선은 오직 조선의 국익만을 생각했고, 묄렌도르프는 청보다 조선을 훨씬 우선시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독일의 외교적 이익을 고려했다. 러시아가 극동으로 적극적으로 진출해 유럽과 중동에는 신경을 덜 쓰는 것, 그게 바로 비스마르크가 바라는 바였다.

"황제 폐하께 보고를 올렸습니다.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시지요."

"예, 그럼 좋은 답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선은 대내외적으로 모든 장치를 완벽하게 깔아놓을 생각이었다. 어설프게 일을 꾸미다가 천금 같은 기회를 날려 먹을 순 없었다.

많은 이의 기대와 열망 속에서, 1884년이 저물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해, 1885년이 한층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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