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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130화 (130/812)

129 < 진통 >

진통(陣痛)

연이은 사회 개혁 조치로 환호와 열광에 빠져 기뻐하는 백성들과 달리, 양반들은 얼이 빠져 있다가 분기탱천하기 시작했다. 특히 향촌 사족들의 반발이 컸다.

"허, 반상의 법도를 하루아침에 없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이제 상놈들이 양반 멱살 잡아도 할 말이 없구먼."

"노비는 조상님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인데, 어찌 하루아침에 없애 버린단 말이오!"

"이제 꼬박꼬박 노비님 허락받고 일을 시켜야 하나? 노비가 주인을 겁박해도 되는 시대가 왔군."

자연히 비난은 조정을 향해 쏟아졌다.

"도대체 정치한다는 자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소? 분명 정권을 잡고 있는 자들도 사대부들인데, 왜 사대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임오년에 도성의 온갖 천한 종자들이 반란을 일으킨 덕에 대원군과 완화군이 집정했으니, 그 보답을 하는 것 아니겠소."

"말세로군! 이 나라 조선은 오백 년간 사대부의 나라였소. 나라가 사대부를 저버렸으니, 어찌 충성을 할 수 있겠소!"

"맞소. 이 더러운 세상, 확 뒤집혀 버려야지!"

지금까지 농민들이 세상이 뒤집혀야 한다며 절망했다면, 양반들이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향촌 사족들도 조정은 강력한 무력을 독점하고 있고, 조정에서 맞서던 양반들이 어떤 신세가 됐는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이선은 양반들의 반발을 예상했다. 하지만 의외로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급격한 사회변혁을 우려하는 상소문 몇 개가 올라온 정도였다.

'매우 유사한 사례가 메이지유신 이후 몰락한 사무라이 계급의 반란인데.'

몰락 사족의 반란은 유신 초기에 빈번하게 일어났다. 메이지 초기, 1870년대의 일본군은 자국 반란을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역별로 무력을 보유했던 일본의 사무라이 계급과 달리, 조선의 양반 계급은 무력 측면에서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하긴, 동원할 무력이 없잖아?'

낫과 쇠스랑이라도 들고 저항하는 농민과 달리, 양반의 무력(武力)이라는 건 무력(無力)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이란 결국 문중(門衆)의 인력과 소작농, 노비들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동학 농민 전쟁 당시 양반들이 농민군에 맞서 동원했던 민보군(民保軍)은 대부분 향촌 사족의 영향력하에 있던 소작농과 노비들이지.'

하지만 이 상황에서 소작농과 노비가 양반을 위해 조정에 맞서 무기를 들 가능성은 없었다.

'오히려 양반이 봉기를 일으키면 소작농과 노비가 습격할걸.'

민보군이 농민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건, 관군과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덕이었다.

'외세의 도움을 받아서 자국 농민들을 진압하다니, 정말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이따위 놈들이 지배층이라니. 지금의 양반들이 무력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적지만, 만약 일어난다면 근대 무기의 위력을 보여주지.'

그나마 현실감각이 있는 양반들은 시대의 변화를 파악했다.

"그래도 최악은 피하지 않았소? 내 한양에서 보니까, 애초에 거기 양반들은 대개 노비를 안 쓰고 새경을 주고 사람을 씁디다."

"그건 한양 이야기고. 거긴 날품팔이가 많잖소."

"마찬가지야. 결국 새경 주고 일 시키라는 건데, 어차피 노비들한테 먹여 주고 재워 주던 걸 새경을 주는 거로 대체하면 되니까. 나라에서 새경의 액수까지 정한 건 아니잖소."

"하긴, 지금껏 노비 생활만 하던 놈들이 어딜 가서 뭘 할 거야."

"그리고 내가 보기에 진짜 중요한 건 양전이오. 결국 양전을 하면 지주들에게 유리하게 정리될 거요."

"아니, 지조 개정해서 지주들 세금 뜯어가겠다는 거 아닌가?"

"심지어 조정에서 왕토 사상이나 경자유전을 운운해서 지주들 땅을 뺏는다는 소문이 있던데?"

"뭐요? 백번 양보해서 노비제 혁파는 받아들여도, 그건 절대 용납이 안 되지!"

"어허, 절대 그렇게 될 수가 없다니까. 조정을 운영하는 자들도 결국 양반이오. 그건 개화파도 마찬가지야. 개화파는 서양이나 일본의 방식을 따르겠다는 거 아니오?"

"그러니 말세지. 오랑캐 세상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좋아질 수도 있소. 내가 한양에서 들은 바가 있는데, 그 서양과 일본에서는 뭐라더라, 아, 재산권을 존중한다고 하더라고. 지조 개정이란 게 결국 양전하여 지계를 발급해서 지주들의 토지 소유권을 명확하게 한다 이거지. 결국, 땅 가진 자들이 유리하게 될 거요."

"오호, 듣고 보니 그건 괜찮소."

"그래, 뭔가 빼앗아 가는 게 있으면 내주는 것도 있어야지."

하지만 모두가 반동적이거나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특히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보다 정치적 청의(淸議)를 중시하는 유림이 그러했다.

"개화를 외치는 연소배(年少輩)들이 세상을 뒤엎고 있긴 하지만, 꼭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니오. 홍범 20조의 마지막 항목을 보시오."

"지방에서는 향회를, 중앙에서는 의회를 개설하여 천하의 공의를 실천한다."

"비록 이 의회라는 것이 서양의 사례를 따랐다고는 하지만, 천하의 공의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꼭 배제할만한 사안이 아니오."

"어쩌면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소. 향회를 만든다면, 이를 주도할 이가 누가 되겠소? 상민들? 어림도 없소. 공정하고 노련한 사람을 선발한다면, 결국 사대부요. 의회를 개설하여 천하의 공의를 실천한다면, 누가 나서겠소? 역시 사대부요."

"과연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정치 권력에서 배제되어있던 영남 남인들과 기호 소론들은 의회 개설에 주목했다.

이들은 척족의 세도를 끝장내고 남인과 소론을 등용한 대원군을 지지했다. 대원군 퇴진 후 정권 주류인 여흥 민씨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자, 위정척사를 내세워 저항했다. 이들은 1881년 영남 만인소를 제출해 개화 정책을 결사반대했다.

하지만 임오년 이후, 재집권하게 된 대원군이 정책을 전면적으로 바꿔서 개화를 내세우자 이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여전히 대원군을 지지해야 할지, 아니면 개화 정책에 맞서 신정권에도 항거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저 더러운 북촌 노론의 무리들이 나라를 오랫동안 망쳐놓았소. 우리는 저들과 달리 청의를 굳건히 지켜왔소. 하지만 만인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소."

"저들과 달리 사대부의 청의가 굳건하다는 걸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영남 만인소는 영남 남인의 힘을 보여주긴 했으나, 임금과 조정이 무시하면서 헛고생이 되고야 말았다.

"물론 그러긴 했지. 하지만 더는 명분에만 집착해선 곤란하오."

사실 정권에서 밀려난 사족들이 더욱 위정척사에 매달리는 건, 그들이 경멸하고 질시하는 노론 경화사족들이 개화를 택했기 때문이었다.

"향후 수립될 의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청의를 대표하고, 개화파 연소배들을 견제합시다."

일본에서도 의회 개설 운동을 주도한 건, 무력 봉기를 대신해 새로운 투쟁방법을 찾았던 몰락 사족들이었다.

향촌사족들이 오랫동안 목말라 왔던 정치 참여의 기회를 의회 개설로 약속해 주자, 의회 개설 운동의 동참자가 되었다.

가장 강경한 위정척사 세력인 영남 남인이 중립적 입장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조정에는 도움이었다.

이선이 가장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분야가 바로 토지 정책이었다. 사회 변화와 달리, 경제 문제는 폭발성을 갖고 있었다.

'결국, 조정 신료들은 물론이고, 개화당 지도부조차도 대개 명문가 출신이다. 이들이 현실적으로 참고하는 건 메이지 일본의 지조 개정이고. 결국 사적 소유권을 강화해 지주 중심의 초기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하자는 건데······.'

개화당 주류조차 토지개혁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양전과 지조개정, 상공업 육성으로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자는 방향으로 잡았다.

신분적 특권계급이었던 양반은 경제적 특권계급인 지주로 정착하고, 어용 상인들은 자본을 축적하여 근대적 자본가로 변신할 것이다. 지주도 능력에 따라 자본가로 전환할 수 있었다.

농민에게 내놓은 대안은 잡다한 세금을 줄이고 고율의 소작료를 제한하여 생활을 안정시키자는 방안이었다.

'물론 단기적으로 그것만으로 개혁에 필요한 자금은 확보할 수 있지. 농민들도 그 정도 조치만으로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만족할 거고.'

이선은 개화당이 최선으로 여기는 메이지 유신을 넘는, 근본적인 개혁을 갈구했다.

'중장기적으로 절대다수의 인구인 농민을 충성스러운 국민이자 주체적인 시민으로 만들려면, 확고한 경제적 자립이 필요하다. 지주 중심의 자본주의로 이행하면 국가와 상류층은 부유해져도 국민경제는 피폐해질 거다. 농업 국가인 조선에서 토지개혁을 통해 자영농을 육성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려운 일이었다. 양전을 통해 토지 상황을 자세히 살피고, 부의 총량을 증대한 후에 분배도 고려해야 했다.

'산업화에 성공해도, 이후 점증하는 인구의 부양을 위해선······. 어렵군. 일본처럼 해외 식민지 확보를 위해 무한정 전쟁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본의 자본주의 발전은 성공적이었으나, 이는 농민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대화에 필요한 자원 동원은 농민의 착취로 이어졌다. 과중한 세금과 군대 징집은 농민들의 몫이었다.

세금과 징병에 반대하여 농민 반란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는 막강한 무력을 보유한 메이지 정부에 의해 짓밟혔다.

좌절된 농민들의 분노를, 일본은 국가주의를 주입해 대외 팽창에 몰두하게 하였다.

하지만 식민지의 확보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은 아니었다. 위장에 불과했다.

'농업 국가가 더욱 발달한 자본주의 체제로 탈바꿈하려면 농민들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인가.'

지금이야 막 개혁에 돌입하여 장밋빛 미래를 보지만, 언젠가는 냉엄한 현실에 부딪혀야 했다.

'근대화의 단맛을 전 계층적으로 맛보여줘야 해. 부의 총량이 증대하면, 누릴 수 있는 혜택도 많아진다. 거기에 마약을 주입해야 하나. 국민교육과 국민개병을 통한 국가주의라는 마약을······.'

이선이 재정 확보를 통해 무엇보다 공을 들이는 건, 국민교육과 국민개병이었다. 목표는 5년 뒤, 1890년까지 국민교육과 국민개병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흔히 근대 국민국가는 학교와 병영에서 창출된다고 하지.'

결국, 근대 국민국가는 '저들'과 다른 '우리'를 창출하는 일이었다.

'반발을 제압하고 국민통합을 위해서, 외부의 적은 필요하다. 그 실체가 있든 없든 간에.'

국내의 반발은 미래의 일이고, 현시점에서는 걱정할 일이 못 되었다.

문제는 국외의 반발이었다. 갑신경장 선포와 홍범 20조의 반포에 대하여, 각국의 반응이 점차 드러났다.

조선 개혁의 상황이 점차 명확해지자, 초기에는 어쩔 줄 몰라 했던 청국 상무위원 진수당이 창덕궁을 방문해 항의의 뜻을 드러냈다.

"어찌 이렇게 중요한 일을 상국과 논의하지 않고 멋대로 시행한 겁니까?"

"조선은 내정에서는 자주지국이 아니었던지요?"

"하지만 제후국이라는 것도 분명하지요. 이 홍범 20조의 첫 항만 봐도 그 분수를 넘는 게 분명합니다. 대조선의 국권을 확장하여 외국과 대등한 관계를 맺어, 자주독립의 터전을 튼튼히 세운다? 이게 중국을 무시하는 게 아니면 뭡니까?"

이선은 웃으면서 답했다.

"하하, 그럴 리가요. 1항은 그저 총강에 불과합니다. 외국과 대등한 관계를 맺는다는 건, 일본이나 서양 열강과 대등하다는 의미지요. 각국과의 조약으로 확인된 사항을 언급한 것뿐입니다."

"자주독립이라니, 대청에 맞서서 자주독립을 하겠다는 의미 아닙니까?"

"이런, 조선과 중국은 한집안과 같은 처지 아닙니까? 자식이 장성하여 부모에게 독립했다고 해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않겠습니까? 부모의 곤란을 자식이 어찌 지켜보고만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지금의 조선은 관례를 치르고 성인이 된 겁니다. 중국의 보호만 받는 처지가 아니라, 외적에 맞서 함께 싸울 수 있는 나라가 되려는 거지요."

"으음······."

이선의 비유에 진수당은 반론을 하지 못했다.

"법국이 안남을 노리는 것처럼, 일본이나 열강이 조선을 노릴 때 스스로 지켜야 할 힘을 키우려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말하는 자주인 게지요. 그러니 상국에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선의 달변에 진수당은 더 이상 이의제기를 하지 않고 물러났다.

이홍장은 진수당에게 상황을 면밀히 살피되, 조선을 너무 몰아세우지 말라고 전문을 보낸 터였다.

미국 공사 푸트, 러시아 공사 베베르, 영국 총영사 애스턴, 독일 총영사 젬브시는 잇달아 입궐하여 홍범 20조의 반포를 축하하고, 근대화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며 의사 표명을 유보하던 일본 공사 다케조에도 입궐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을 안'을 훈령 받은 다케조에는 조선의 개혁을 지지할 뜻을 밝혔다.

"일본국은 귀국의 개혁을 축하드리고, 조선이 진정한 자주독립국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귀국의 호의에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이선은 웃으면서 다케조에와 악수를 했다. 하지만 피차 확고한 신뢰가 있는 건 아니었다.

기본적인 외교적 조치를 마친 이선은, 바로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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