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31화 (131/812)

130 안전장치

이선은 이홍장에게 미리 전보를 보내 양해를 구했고, 갑신년 동지사(冬至使)로 간 김윤식을 통해 재차 설득했다. 조선 개화파 관료 중, 이홍장이 가장 친밀하게 생각하는 이가 김윤식이었다.

북경에서 황제를 알현한 후, 김윤식은 곧바로 천진으로 가서 이홍장을 만났다.

"완화군께서는 거듭 말씀하시길, 조선이 중국의 동쪽 울타리가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조선에서 변화가 있더라도 중당께서는 심려치 마십시오."

"흐음. 나야 완화군과 귀국의 선의를 믿고 싶소. 하지만 북경의 조정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많을 것이오."

"지금 시급한 건 법국과의 전쟁입니다. 중당께서 서양 오랑캐를 안남에서 몰아내어 중화의 위엄을 떨친다면, 감히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말뿐만이 아니라, 김윤식을 따라온 상인 장여원이 거액의 자금을 내밀었다.

"소소하나마, 조선에서 보내온 군자금입니다."

이홍장이 살펴보더니 짐짓 거절의 뜻을 밝혔다.

"작금의 정세에서 내가 조선에서 보내온 돈을 받으면 오해의 여지가 많소."

청류파들로부터 '이홍장이 조선으로부터 뇌물을 받는다'고 탄핵을 받은 상황이라 몸을 사렸다.

"중당께서는 부디 오해하지 마십시오. 법국과의 전쟁에서 필요한 군자금입니다. 조선의 군신은 대청의 승리를 기원해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북경의 조정으로 보내면 될 일 아니겠소?"

"완화군께서는 북경으로 보내면 군자금이 아니라 엉뚱한데 쓰일까봐 걱정하십니다. 실질적으로 대청의 군사와 외교를 전담하는 건 중당이신데, 가장 필요한 분에게 드리는 게 맞다하셨습니다."

장여원은 은밀히 이선의 말을 전달했다.

"완화군 대감께서는, 조선이 부강해지면 중당의 호설암이 될 수 있다 하셨습니다."

호설암(胡雪巖). 청말을 대표하는 상인이자 정1품 벼슬에까지 이른 전설적인 거상이다.

상인 호설암은 개인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정경유착으로 대성공할 수 있었다. 태평천국 전쟁 시기, 상군(湘軍)을 이끄는 좌종당과 친분을 맺어 서양식 군대인 상첩군의 조직과 군자금을 보탰다.

좌종당이 최초의 서양식 조선소인 복주조선소를 건설할 때도 실무를 담당한 건 호설암이었다. 서양인들과 교류하면서 호설암은 국제적 거상이 되었다.

좌종당이 신강 정벌을 단행할 때도, 군자금과 각종 군수품을 대는 건 호설암의 몫이었다. 신강 정벌에 성공한 후, 호설암은 공을 인정받아 서태후로부터 황마괘를 하사받아 정1품 대우를 받았다. 상인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양무운동을 이끄는 한 축이자 육방파를 대표하는 좌종당의 힘에는, 호설암의 부가 있었다.

"호설암이 조정으로부터 처벌 받은 건 알면서 하는 소리인가?"

육방해방 논쟁으로 엣 동지였던 이홍장과 좌종당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정적이 되었고, 이홍장은 좌종당을 등에 업고 있는 호설암을 점차 눈엣가시로 여기게 되었다.

청불전쟁 직전, 호설암은 전국의 생사(生絲)를 매점매석하여 서양 상인들에게 비싼 값을 강요했다. 서양 상인들은 중국 생사를 선호했고, 전쟁이 일어나면 더욱 가격이 뛸 것이라 판단해서였다.

하지만 서양 상인들이 거부하면서 서로 버티기 작전에 돌입했다. 다음 해, 이탈리아에서 생사 생산이 대량으로 늘어나자 호설암의 몰락이 시작됐다.

생사는 썩어들기 시작했고, 호설암은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 헐값에 팔아야 했다.

때마침 좌종당이 병사하면서 호설암은 보호자마저 잃고 말았다. 그러자 이홍장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이홍장의 사주를 받아, 청나라 정부 자금 회수가 고의로 지연되면서 호설암은 자금 부족에 빠졌다.

1884년, 결국 호설암은 파산하고야 말았다. 그 과정에서 호설암이 행했던 각종 부정행위가 드러나면서 삭탈관직에 처해지고 가택연금되었다. 거상의 몰락은 덧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그러니 더욱 새로운 호설암이 필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중당과 회군, 북양수사를 위한."

좌종당의 정치·군사적 성공은 본인의 탁월한 능력이 있었지만, 호설암의 후원도 큰 역할을 했다.

이홍장은 정적인 호설암을 제거했지만, 거상의 필요성에는 공감했다. 그 자신이 엄청나게 공을 들이고 있는 회군과 북양수사의 근대화에는 거액이 필요했는데, 조정에서는 이홍장의 군벌화를 우려해 예산을 제한적으로 투입했다.

이선은 이전부터 홍삼 판매 대금의 일부를 이홍장에게 정치자금으로 주었다. 이선이 조선의 정권을 잡고, 조선이 부유해지면 보내올 돈이 더 많아진다고 설득하는 셈이었다.

"완화군 대감께서 말씀하시길, 조선이 믿는 건 북경이 아니라 천진임을 꼭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북경의 조정이 아닌 천진의 북양대신을 의미했다.

"위험한 말이로군.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만큼 중당을 신뢰한다는 뜻이지요."

이선의 제안은 조선과 청의 전통적인 사대관계라기보다는, 개화당과 북양군, 혹은 이선과 이홍장이 맺는 개인적인 동맹이었다.

이홍장은 점차 청의 충신이라기보다는, 회군과 북양수사의 수장처럼 사고하게 되었다.

청 조정의 요구에도 이홍장은 핑계를 대가며 회군과 북양수사의 안남 파병을 거부하고 있었다.

회군과 북양수사를 근대화시켜, 북양군과 북양함대라는 신식 군대를 구상하고 있는 이홍장에게 병력 소모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법국과의 전쟁에 반대했는데, 태후와 청류파놈들 좋으라고 병력을 소모시키라고?'

사실상 명령불복종이었지만, 그럼에도 조정은 이홍장을 내칠 수 없었다.

좌종당이 죽자, 적어도 군부 내에서 이홍장을 견제할 인물은 사라졌다. 군부와 양무파들의 이홍장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서태후가 공친왕은 실각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이홍장은 몰아낼 수 없는 이유였다.

"흥미로운 제안이군. 검토해보도록 하겠소."

이홍장은 이선이 내민 손을 뿌리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홍장이 보기에, 이선은 청의 양무운동을 지지하고 뒷받침해줄 동맹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 자금성의 태후와 북경의 청류파들보다는, 차라리 조선에 있는 이선이 훨씬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 조선의 경장 소식을 들은 원세개는 이선이 위험인물이라 경고했다.

"완화군은 어리지만 야심만만하고 유능합니다. 다루기 극히 어려운 인물입니다. 군대를 파병해 몰아내고, 다루기 쉬운 조선 왕을 내세워야 합니다."

이홍장은 혀를 찼다.

"쯧, 생각을 하고 말하게. 그렇게 되면 일본과 아라사가 구경만 하고 있을까?"

"대청이 어찌 왜노 따위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아라사는 영국의 힘을 빌려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영국을 끌어들여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단 말인가? 가만히 있는 조선을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대청이 얻는 이익이 무엇인가?"

"소위 개화당이라는 자들은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대청과의 충돌은 필연입니다. 대청에 언제 반역하여 주인의 손을 물지 모릅니다. 힘이 약할 때 몰아내야 합니다."

"원세개. 완화군에게 한 평가는 자네에게 그대로 돌려줄 수 있네. 자네도 젊지만 야심만만하고 유능하지. 대청에 언제 반역하여 주인의 손을 물지 몰라. 그러니 지금 미리 자네를 제거해야겠는가?"

실제 역사를 생각하면, 기묘할 정도로 정확한 경고였다. 원세개는 광서제와 변법파를 배신하고, 서태후와 보수파를 배신하고, 최종적으로는 청조 전체를 배신했다.

"주, 중당! 어찌 저의 충성을 의심하십니까?"

원세개가 당황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자네를 다루기에 따라 자네가 대청의 충신이 될 수도, 역적이 될 수도 있겠지. 완화군을 다루기에 따라 동맹이 될 수 있고, 적이 될 수 있네. 적어도 지금은 법국과 전쟁 중이니, 적으로 볼 때가 아니야. 앞으로도 마찬가지. 위험요소는 일본이지 조선이 아니야. 조선을 키워서 일본을 견제하는 데 써야하네. 그러려면 완화군이 필요해."

원세개는 불만족스럽지만, 상관인 이홍장의 뜻을 받아들여야했다.

"하지만 완화군과 조선이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견제와 감시도 필요하지. 자네에게 잠시 휴가를 줄 터이니 고향에 다녀오게. 을유년 새해가 되면 자네를 승진시키겠네. 조선으로 돌아가, 대청의 이익을 관철시키도록."

"가, 감사합니다!"

"단, 진수당과 논의하여 사안에 따라 신중히 판단하게. 중요한 사항은 반드시 내게 보고를 하고 재가를 받은 후에 움직이고. 알겠나?"

"중당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홍장의 용인술이었다.

'완화군을 지지하되, 멋대로 움직이지 않도록 원세개를 보내 견제한다. 그렇다고 해서 강경파인 원세개가 함부로 나서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원세개의 우려처럼 조선이 일본이나 러시아와 손을 잡을 경우에 대비한 대책도 대비해두었다.

이홍장은 자신이 중시하는 조선에 대해 여러 안전장치를 만들어두었다고 만족했다.

하지만 조선의 진정한 안전장치를 만들어놓고 있는 건 이선이었다.

가장 우려했던 청과 일본이 경장을 승인하고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갔지만, 이선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885년 2월 1일, 조선 주재 독일 부영사 부들러가 외무부로 개칭된 옛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을 찾았다. 외무부는 예조나 외아문과 달리, 독립된 근대적 외교 전담부서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관 각하."

각국 외교관은 독판외무부사 이선을 '외무부 장관(ministre des Affaires étrangères)'으로 지칭했다. 독립국가의 외무 장관으로 대우한다는 의미였다.

"어서 오십시오, 부영사. 어인 일이십니까?"

"조선에 처음 부임한 이래, 제가 늘 마음속에 담아둔 것입니다. 특히 청일 간에 전쟁 소문이 도는 지금이야말로 시급하다 여겨, 귀국과 동양 전체를 위하여 제가 감히 준비한 문건이 있습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내용이 궁금하군요."

이선은 내용을 짐작하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말했다.

"한 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이선은 부들러가 전하는 서한을 받았다. 한문에 능통한 부들러는 조선 조정에서 회람할 수 있도록 한문으로 작성했다.

태서(泰西)를 살펴보면 2, 3개의 작은 나라들이 있는데, 태서의 큰 나라들과 각기 서로 조약을 수립하여 영원히 보호하면서 서로 아무 일 없이 편안히 지내니, 그것이 소국에게 더해 주는 이익이 참으로 많습니다. 만일 다른 날에 두 대국 사이에 전쟁이 나더라도 소국은 천여 명의 군사만을 국경에 주둔시켜서 자신들의 울타리를 지키면 됩니다.

예컨대 서력 1870년에 일어난 독일과 프랑스 간의 전쟁에서는 프랑스군 8만이 패퇴하여 프랑스 변경 지역의 스위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대저 스위스는 하나의 작은 나라입니다만, 즉시 문구를 갖추어 약조에 따라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또 각국이 상호간에 맺은 조약 안에는 만일 다른 나라와 전쟁이 벌어지게 되더라도 땅을 빌려 쓸 수 없다는 내용을 수록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군이 프랑스를 공격할 때에도 벨기에에게 길을 빌리면 더 가깝고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멀리 돌아서 전진하였으니, 각국과 서로 수립한 약조를 위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서로 보호하기로 약조하는 것이 이익만 있고 손해는 없음을 이를 통해 명백히 증험할 수 있습니다.

부들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스위스와 벨기에의 사례를 들어 중립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어서, 조선의 사례에 접목했다.

오늘날 조선의 정형으로 논하자면, 조선은 청국의 이웃이오, 러시아와 일본과도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형세상 서로 물러나지 않고 있으니 필경 다툼에 이를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만국공법에 비추어 청·러시아·일본과 영원히 조선을 보호하는 조약을 서로 수립한다면, 설혹 나중에 다른 나라를 공격하게 되더라도 조선에 길을 빌릴 수 없을 것이며, 조선은 스스로 수천 명의 병사만을 파견하여 국경을 방비하고 나라 안을 순찰하면서 영원히 화약한 각 나라들과 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조선으로서는 영원히 보호받으면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청국으로서는 불확실한 걱정거리를 덜게 되어 양국에게 손해될 것이 없으니,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이선은 서한을 읽어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 지극히 옳은 말씀입니다. 조선의 안전과 동양 평화를 염려하는 귀국과 귀공의 호의에 감격할 따름입니다."

"독일 제국은 정직한 중재자로서, 조선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간절히 희망하는 바입니다."

외무협판 서광범이 한 가지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청국에서 조선의 중립을 승인하겠습니까? 청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조선과 청은 원래 한 나라가 아닙니다. 종전에 영국·독일·미국·일본·러시아 각국과 약조할 때에도 모두 조선 조정에서 스스로 주관하였습니다. 청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을 때에도 프랑스가 조선의 토지를 빼앗으러 공격해 들어오지 않았으며, 청나라에서도 조선에게 원조를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조선은 군사를 파견하여 청국을 지원하지 않아도 되며, 손을 놓고 바라보기만 해도 됩니다."

"과연 그렇군요."

이선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귀국의 제안을 조선 조정에서 진지하게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의견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문건을 독일 제국의 명의로 발표할 수 있겠습니까?"

"예. 조선 주재 독일 총영사 젬브시의 이름으로 발표하고, 청국 주재 독일 전권공사 브란트가 보조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귀국의 호의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사전에 모두 합의된 사항이었지만, 지금 결정된 것처럼 이선과 부들러는 웃으면서 악수를 나누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