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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132화 (132/812)

131 조선 중립화

갑신경장을 개시한 1885년 1월 15일(갑신년 11월 30일)부터, 갑신년의 마지막 달은 개혁은 쉴 새 없이 진행되었다.

임금이 즉위한 이래, 아니 조선이 개국한 이래 제일 빠르게 개혁이 이뤄지고 있었다.

정책을 입안해서 제정한 사람들도, 바뀐 정책에 적응해야 할 사람들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는 세상에 정신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아이고, 잠시 쉬었다가 합시다. 오늘도 꼬박 날을 새는군요."

"허어, 벌써 시간이 이리되었나. 다들 잠시 쉬었다가 정오에 회의를 재개하도록 합시다."

의정부 당상들은 퇴궐조차 하지 않고 업무에 매진했다. 당상관들이 쉬질 않으니, 실무를 집행할 당하관들도 업무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육신은 피곤해도 정신은 또렷하오."

"우리가 원하던 대경장이 진행되고 있으니,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런 일이라면 마땅히 과로를 할 용의가 있지요, 하하하."

개혁을 주도하는 개화파 관료들은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진작부터 '대경장'을 추구하던 탁지독판 김옥균, 내무독판 홍영식, 경무사 박영효, 탁지협판 서광범, 군무참의 서재필과 같은 급진 개화파만 열성을 보이는 게 아니었다.

좌의정 김홍집, 농상공독판 어윤중, 법무독판 김윤식, 학무독판 박정양 등 온건 개화파도 자신이 구상하던 개혁안을 실행으로 옮겼다.

이들은 낡은 조선을 바꾼다는 생각에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게 일을 추진했다.

외무독판 이선은 외교적 상황, 특히 중립의 선포와 승인 여부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전통적인 중화 질서와 이른바 '만국공법' 체계인 근대 국제법 사이에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자 했다.

묄렌도르프 외에도, 보빙사로 다녀온 이후 국제관계를 연구하게 된 서광범과 변수가 이선의 보좌관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법학 공부를 개시한 유길준도 조선으로 전보를 보내 최신 국제법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다.

"조선은 조공국(朝貢國, Tributary State)인 동시에 자주국입니다. 부들러 부영사는 중립 논의에서 스위스와 벨기에의 사례를 참조했습니다만, 내 생각에 주목할 사례는 또 있습니다."

이선은 1878년 베를린 조약의 원본과 번역문을 꺼냈다.

Article I. Bulgaria is constituted an Autonomous and tributary Principality under the suzerainty of His Imperial Majesty the Sultan; it will have a Christian Government and a national militia,

(제1조. 불가리아는 기독교적인 정부와 국민군과 함께 술탄의 종주권 아래에 있는 자치적인 조공 대공국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 문서를 당시 청국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당시 주유럽 3개국 공사였던 증기택이 총리아문에 보낸 번역문입니다."

第1款. 불가리아(博魯哦利亞)는 자주지국(自主之國)으로 삼아 오스만 황제(土帝)가 통할(統轄)하는 부용후작(附庸侯爵)에 속한다. 예수교(耶蘇敎)를 정부의 주의(主義)로 삼아 민병제도(民兵制度)를 정한다.

"원문에서는 'Autonomous', 즉 자치라고 되어 있는 걸 자주지국(自主之國, Sovereign State)으로 번역했단 말이지요. 즉, 오스만 제국에 속한, 자치와 조공을 겸하지만, 자주국으로 받아들였단 의미지요."

이선은 이 문서에 방점을 찍었다.

"스위스와 벨기에는 완벽한 주권 국가로서 청국이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불가리아 사례는 청국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불가리아 독립은 러시아의 승전과 오스만의 패전으로 이뤄진 것이지만, 불가리아가 자주국이 된 것은 오스만에게도 유리한 점이 있었다.

불가리아가 주권을 획득한 이상 러시아군의 장기간 주둔은 허용할 수 없었다. 이로써 오스만은 불가리아를 자신의 종주권 아래에 두면서도 주권 국가임을 내세워 러시아군을 불가리아에서 철수시키고, 자신의 수도를 방위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점을 청으로서도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청에게 조선은,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만주의 접경이자 수도 북경 방위를 위한 요충지였다. 불가리아가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니예(이스탄불)와 맞닿은 것과 같았다.

조선이 타국의 손으로 넘어가면 청은 수도 앞에 적을 두게 된다. 따라서 청은 불가리아와 같이 조선을 청의 조공국으로 유지하면서도, 외세가 조선을 무단으로 점령하지 못하도록 조선에 주권을 부여해야 했다.

"아주 적절합니다. 러시아의 후원을 받아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고, 독일이 중재해 베를린에서 조약을 주선한 불가리아의 사례는 조선과 매우 유사합니다."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을 자신이 동아시아까지 확장시켰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군 대감의 식견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체 어떻게 변방의 신생국 역사까지 알고 계신 건지······."

서광범과 변수가 솔직히 감탄을 표했다. 이들은 '불가리아(博魯哦利亞)'란 나라가 있다는 사실도 보빙사로 유럽을 간 이후에나 알게 되었다.

"알다시피 내가 한동안 아라사에 있지 않았소? 그때 연구할 기회가 있었지요."

설명은 그렇게 해도, 지식을 익힌 건 21세기의 일이었다.

"과연 군 대감의 아라사 행은 나라를 위해 큰 결단이었습니다."

'뭐, 내 전공이 근대 외교사니, 이런 건 꿰고 있어야지.'

이선은 지금까지 외교사를 전공한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각국의 가장 내밀한 비밀 정책까지 알고 있는 이선의 지식은 조선의 행보에 분명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요새는 사회사나 경제사, 기술사를 전공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모든 외교적 장치를 만들어놓은 후, 국내 개혁에 돌입하자 이선은 아쉬움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이 피상적으로 알았던 조선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실제 상황이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사회 경제사를 전공했다면 유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쩝, 아쉬우려면 한도 끝도 없지. 난 내가 할 일에 충실하면 된다.'

대신 이선은 역사적으로 능력이 검증된 개화파 관료들에게 각자의 전문영역을 부여해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이선이 거시적인 영역에서 총체적인 방향성을 계획한다면, 이들은 미시적인 영역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했다. 이선이 모든 영역을 만기친람(萬機親覽)하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청의 조선 종주권을 명문화하게 되는 게 아닐런지요?"

서광범은 급진 개화파답게 청으로부터의 독립에 집착했다.

"나는 실질적인 자주를 취할 수 있다면, 형식적인 종주권은 양보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선 역시 자주독립을 열망했지만, 지금은 그럴 단계가 아니었다. 청의 지배층은 조선의 지배층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명분론에 집착했다.

중화제국이 붕괴 직전에 놓이자, 제후국 조선과 안남은 이들에게 있어 최후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조선의 '자주'는 받아들여도 '독립'은 결코 용인할 리 없었다.

'뭐, 불가리아도 결국 오스만 지배를 걷어차고 이스탄불까지 진격하는데. 조선도 못할 게 없지.'

바로 얼마 뒤가 될 1885년 가을. 불가리아는 산 스테파노 조약에서 불가리아 영토로 보장되었으나 베를린 조약에서 오스만 자치령으로 격하된 동(東)루멜리아 공국을 병합한다.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의 동의 없이 이뤄진 일로, 이미 이 단계에서 불가리아는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

불가리아의 막가는 행보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가 불가리아를 공격했는데, 오히려 불가리아에 참패하고 말았다.

명목상 '자치국'인 불가리아는 '종주국'인 오스만을 무시하고, '독립국'인 세르비아에 승전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동루멜리아는 불가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신생국가지만 효율적인 군대를 보유해 '발칸의 프로이센'으로 불리게 되는 불가리아는, 훗날 오스만과의 전쟁도 승리하여 독립을 쟁취한다.

'결국, 외교로 자주와 중립을 보장받아도, 실질적인 독립은 군사력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이선은 중립을 보장받는다고 해도 영세중립이 아니라, 약 10년간의 평화를 보장받는 거로 생각했다. 그 10년간 최대한 국력을 키우는 게 목표였다.

"독일 정부에서 곧 조선 중립화에 대한 공식적인 제안을 하겠지요?"

이선의 물음에 묄렌도르프가 답했다.

"독일 총영사의 명의로 중립 제안이 나왔으니, 곧 베를린에서도 반응을 보일 겁니다."

2월 5일, 조선 주재 독일 총영사 젬부시는 조선 중립화 안을 발표했다. 개인적인 의견임을 전제로 했기에 각국 정부의 반응은 아직 없었지만, 독일을 시작으로 반응이 나올 예정이었다. 그리고 마침 베를린에서는 국제회의가 개최 중이었다.

1885년 2월 10일, 독일제국 베를린.

베를린에서는 1884년 11월부터 시작된 아프리카 분할 회의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참여국은 의장국인 독일과 영국·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네덜란드와 같은 전통적인 제국주의 국가, 이탈리아·벨기에와 신흥 제국주의 국가 외에도, 아프리카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스웨덴, 덴마크, 미국, 심지어 오스만 제국까지 참여하는 국제회의였다.

아프리카를 멋대로 분할하려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모습에는 그들이 내세우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도덕성'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등 겉으로는 인도주의를 내세웠으나, 그건 단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각국은 아프리카 분할의 원칙을 합의하고 공식화하여 대서양 연안에서 인도양 연안에 걸친 광대한 지역에 누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할지를 놓고 국경선을 긋고 있었다.

모든 아프리카가 열강들에 의해 분할되었고, 살아남은 건 독립국으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에티오피아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라이베리아 정도였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갈등이 심해서, '정직한 중재자' 노릇을 하는 비스마르크는 내심 즐거워했다.

"신사 여러분, 오늘은 회의 안건과 무관한 특별한 제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의장 비스마르크의 발언에 좌중이 집중하였다.

"우리는 이 회의를 통해 각국의 세력권을 결정하고,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의 독립을 승인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천천히 대표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아프리카보다 아시아에 대해서 더 걱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도, 실제로 전쟁이 발생하고 있는 건 아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대표를 쳐다보며, 청과 프랑스의 전쟁을 상기시켰다.

"또한, 열강이 충돌할 가능성이 무척 큰 지역도 아시아입니다. 그 전선은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까지 확장되고 있지요."

비스마르크는 영국과 러시아 대표를 쳐다보며, 이들의 '그레이트 게임'을 상기시켰다.

"나는 최근 조선에 파견된 독일 외교관으로부터 흥미로운 제안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조선은 얼마 전에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극동의 반도 국가입니다. 하지만 그 지정학적 중요성은 발칸 반도에 필적합니다. 극동의 주요국인 청과 일본 외에도, 영국과 러시아라는 세계적 열강의 이익이 충돌하는 곳이지요."

"러시아가 부동항에 야욕을 보이지 않는다면, 영국이 먼저 나설 일은 없습니다."

영국 대표 말레(Edward Malet)의 말에, 지금까지 거의 발언을 하지 않던 러시아 대표 카프니스트(Pyotr Kapnist)가 반박했다.

"조선 영토에 야욕을 보이는 건 러시아가 아니라 영국입니다. 극동 외교가에는 포트 해밀턴(거문도)을 영국이 점령하리라는 풍문이 파다합니다."

"근거없는 뜬소문으로 대영제국을 모략하는군요."

"부동항 운운하며 근거 없는 러시아 공포증을 불러일으키는 건 영국 아닙니까?"

영국과 러시아 대표의 대립은 비스마르크의 우려가 타당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나는 두 제국이 작은 영토를 점령하여 긴장을 촉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우려가 됩니다. 두 세계 제국의 대립은 자칫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1878년의 발칸 문제처럼 말입니다."

비스마르크는 영국이 러시아에 대한 전쟁까지 거론했던 1878년 상기시키고, 본론을 꺼냈다.

"독일 정부는 평화를 원합니다. 독일 정부는 각국의 대립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조선의 중립을 제안합니다. 조선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각국이 보장하는 것이지요.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발칸 신생국의 독립 보장과 평화를 정착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선의 예측대로,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조선의 중립을 지지하는 데 동의했다.

발칸에서 좌절된 러시아의 관심을 아시아로 돌려,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대립을 방지할 수 있었다.

더욱이 청이 조선 문제를 안심하고 베트남에 추가 파병해 프랑스와의 전쟁을 장기화한다면 바라던 바였다.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복수심이 식민지 확장으로 약해질 수 있다면, 비스마르크는 얼마든지 프랑스의 확장 정책을 지지할 용의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조선 중립화 제안에 영국 대표가 이의를 제기했다.

"본관은 오직 아프리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파견된 대표입니다. 극동 문제에 대한 권한은 없습니다. 본국의 훈령이 필요합니다."

"물론입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이 자리를 빌려 제안을 한 것입니다. 각국 정부의 협의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날 중으로, 각국 대표는 비스마르크의 새로운 제안을 보고하기 위해 전보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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