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동의(同意)
베를린에서 보낸 전보를 받은 각국 정부는,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두고 계산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미,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는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
러시아 역시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몰랐던 척하는 행보를 보였지만, 조선 중립화를 사전에 동의한 터였다.
독일의 제안 후 3일 만에, 러시아 외무부는 조선 중립화에 동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극동의 점증하는 군사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 왕국의 중립과 영토 보전을 제안한 독일제국 정부의 방안에 동의한다. 주변국과 열강이 공동으로 승인하길 희망하는 바이다."
이윽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의 성명도 발표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는······."
"이탈리아 왕국 정부는······."
단기간에 독일의 제안에 동조하는 국가가 늘어나자 영국 정부는 의심이 들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는 극동 문제에 별다른 관심도 없고, 독일의 동맹국이니 그저 거수기 역할을 했다고 칩시다. 하지만 러시아가 이렇게 신속히 응했다는 건 사전에 협의한 게 틀림없소."
"그렇긴 한데, 조선이 중립화를 이룬다면 대영제국 입장에서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러시아가 남하하여 차지하는 것보단 중립이 훨씬 낫지요."
"조선의 당국자인 왕자가 러시아 차르와 특별히 친밀한 관계 아니오? 겉으로는 중립을 외치면서 러시아가 나갈 길을 열어줄지도 모를 일입니다."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선 왕자는 우리의 고든 장군을 군사고문관으로 채용하지 않았습니까."
"조선 주재 총영사 애스턴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은 자주독립과 서구화 개혁을 원할 뿐입니다. 중국은 모르겠으나, 일본은 이를 지지할 의사가 있습니다. 조선의 개혁은 영국에 해가 될 일이 아닙니다."
"대영제국의 극동 정책의 핵심은 모두 중국에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중국에서 벌어들이는 무역흑자가 얼마입니까? 우리는 청 조정과 정책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내각 내에서 강경과 온건이 오고 가자, 총리 글래드스턴이 결정을 내렸다.
"독일과 러시아가 사전에 조선 중립을 협의한 바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무턱대고 반대할 일도 아니고, 독일과 러시아가 하는 일을 찬성하기도 그렇지요. 고든 장군이 조선에 있다는 건 우리에게 유리한 일입니다."
글래드스턴의 최대 관심사는 선거제 개혁과 아일랜드 자치 법안이었다. 대외적인 관심도 수단의 마흐디 봉기에 집중되어 있었고, 극동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먼저 애스턴 영사와 고든 장군의 의견을 청취해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반응을 보지요. 정부의 방침은 그 후에 결정하도록 합시다."
조선과 얽힌 또 다른 국가, 프랑스는 중립 제안에 호의적이었다. 프랑스는 러시아의 호의를 얻길 원했다. 다만 프랑스는 중요한 당사국인 청과 전쟁 중이었으므로, 공식적인 논평은 유보했다.
2월 3일,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에서 총공세를 개시했다. 육군의 진격에 맞춰 함대도 북진하여, 영파 인근 석포만(石浦灣)에서 청국 남양함대를 격파했다.
청군은 신식 순양함 3척을 내세웠음에도, 해군의 질적 능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지휘관은 무능하고 병사들은 전투를 두려워했다. 남양함대는 호위함 2척을 잃고 부랴부랴 퇴각했다.
1885년 2월 15일. 이날은 음력으로 을유년 새해였다.
원단(元旦)을 맞이하여, 문무백관을 조회하는 의식을 진행했다.
이윽고 미시(未時)에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각국 공사를 소견(召見)하는 예식이 있었다.
상주 외교관의 직급과 부임 순서에 따라 차례를 배정했다. 청 상무위원 진수당, 일본 공사 다케조에, 미국 공사 푸트, 러시아 공사 베베르, 영국 총영사 애스턴, 독일 총영사 젬부시가 입궐하여 차례대로 임금을 알현했다.
임금은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이고, 남쪽을 향하여 섰다. 외무독판 이선과 협판 묄렌도르프, 도승지 박영교가 시립하였다.
한 사람씩 소견 절차를 마친 후, 마지막으로 독일 총영사 젬부시가 들어섰다.
영사가 서쪽 계단을 통하여 당에 오른 다음 들어와 기둥 안에서 타공례(打恭禮)를 행하니, 임금이 손을 들어 답읍하였다. 묄렌도르프의 통역으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여기에 머문 뒤로 무사히 잘 지냈소?"
"여기에 온 뒤로 다행히 대군주 폐하께서 돌봐주고 염려해 주시는 은덕을 입어 무사히 잘 있었습니다."
"귀국의 황제께서는 태평하시며, 궁중 역시 무사하다고 하오?"
"일전에 삼가 들으니, 황상께서는 안녕하시고 궁중도 태평하다고 하였습니다."
"귀국의 소식을 조선에서 듣는 데 며칠 걸리오?"
"전보로 2, 3일이면 들을 수 있습니다."
"허허. 태서는 조선과 그토록 먼데, 이리 소식을 빨리 들을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오."
"그렇습니다. 마침 본국에서 조선으로 전해온 소식이 있습니다. 이를 삼가 바칩니다."
젬부시는 독일제국 재상 비스마르크의 명의로 된 전문을 전했다. 전문을 받아든 이선과 묄렌도르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무슨 내용인가? 아뢰도록 하라."
전문은 독일어로 작성되어 있어 임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에 묄렌도르프가 번역했다.
"전하. 현재 덕국 수도 백림(伯林), 베를린)에서 태서 각국이 모여 회의가 진행 중이옵니다. 이 자리에서, 덕국 재상이 조선의 중립과 영토 보전을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임금 역시 이선이 추구하는 중립정책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오오, 참 반가운 일이군. 그래서?"
"먼저 오지리(奧地利)와 이태리가 동의할 뜻을 보였습니다. 이윽고 아라사 역시 동의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하옵니다."
"덕국의 제안에 아라사가 동의했다면, 걱정할 일이 없겠구려. 귀국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임금의 치하에 영사가 답례했다.
"오늘은 바로 정월 초하루입니다. 대군주 폐하께서 천추만세토록 장수하시고, 동궁 저하가 만수무강하고, 궁중과 국가도 태평하기를 천만번 엎드려 축원합니다."
"과연 영사의 말과 같이 되기를 깊이 바라오."
베를린에서 온 소식에 개화파 관료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이제 외세가 조선을 위협할 가능성은 사라진 게 아니겠습니까?"
이선도 기뻤지만, 냉철한 자세를 유지했다.
"아직 영국과 일본, 청국이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 3개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중립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영국은 모르겠지만, 일본도 곧 동의할 겁니다. 청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제 코가 석 자인데, 개입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나도 그러길 바랍니다. 일단 각국의 반응을 좀 더 기다려 보도록 합시다."
독일이 조선 중립을 제안하고, 러시아가 동의했다는 사실은 주변국에도 전해졌다.
일본은 외무경 이노우에의 명의로 재빠르게 동의를 표명했다. 다케조에 공사는 이선을 만나 중립 지지를 전했다.
"이 방책이 매우 훌륭합니다. 조선은 무사할 수 있을 것이고 여러 나라는 다툼에 이르지 않을 것이니 우리 일본에서도 바라는 바입니다. 이노우에 외무경께서는 중립화가 절묘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귀국의 현명한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일본이 생각보다 온건하게 나오니 일이 편하군. 하긴, 아직 일본은 국력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시기니까.'
이선은 적어도 당분간 일본이 방어적인 외교정책을 유지하리라 보았다.
조선 중립화 제안에 청나라 조정이 처음 느낀 감정은 불쾌감이었다.
"조선은 대청의 제후국이거늘, 어찌 덕국과 아라사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말인가? 이는 종주국을 무시한 처사가 아닌가?"
"그러니 애초에 조선에 외교권을 부여한 게 잘못입니다. 이중당이 그동안 조선을 너무 관대하게 대했습니다."
공친왕이 실각하고, 청류파가 득세한 조정에서는 강경론이 지배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연패해도 이들의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이게 꼭 나쁜 일이 아닙니다. 조선의 중립과 영토 보전을 서양 열국이 보조한다면, 이중당은 조선을 지키기 위해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는 핑계를 더 이상 대지 못할 겁니다."
남양함대가 거듭 패배하고 제해권을 완전히 내주자, 이홍장에게 북양함대를 동원해야 한다는 압박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이홍장은 조선을 둘러싼 정세가 불안정하니, 일본을 경계한다는 명분으로 북양함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당연히 조정과 남양함대에서는 이홍장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때마침 적당한 빌미를 준 것이었다.
"그거 묘안이군. 조선을 걱정할 일이 없다면, 당면한 문제인 안남을 해결해야겠지. 북양대신에게 즉시 이 사안을 논의하고, 북양수사를 출진시키라고 명하시오."
조정의 명령을 받은 이홍장은 예상 밖의 전개에 당황했다.
"왜 덕국은 이 시점에 조선의 중립을 제안해서 문제를 일으킨단 말인가? 저들은 정녕 법국의 편이란 말인가?"
이홍장은 독일에 의심의 화살을 돌렸다. 이홍장은 그간 숙원 사업으로 여긴 북양함대의 근대화를 위해, 1881년 독일에 최신 전함을 발주시켰다.
전함 정원(定遠)과 진원(鎭遠), 방호순양함 제원(濟遠)은 당시 최신 기술로 만들어진 군함으로, 이를 북양함대가 인수하면 단숨에 동양 최대의 해군이 될 수 있었다.
이미 이들 전함은 완공되었지만, 때마침 발발한 청불전쟁이 문제였다. 프랑스의 압력을 받은 독일이 엄정중립을 내세워 슈테틴 조선소에 계류해 버린 것이다.
"덕국은 법국의 복수심을 피하기 위해, 법국이 더욱 동양으로 확장하길 원할 겁니다. 그러니 전쟁의 장기화를 바라겠지요."
정여창의 지적에 이홍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감스럽지만 이제 조정의 요구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게 되었네. 가뜩이나 조정에선 석포만의 패배 이후 신경이 곤두선 상황이니, 북양수사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어. 콕 집어서 초용과 양위를 남양으로 내보내라는군."
순양함 초용(超勇)과 양위(揚威)는 현재 북양함대가 거느린 최신 군함이었다. 이홍장이 그토록 내보내지 않으려고 했던 함선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초용과 양위를 이끌고 남양으로 가겠습니다."
"가능한 전투는 회피하게. 법국과의 전쟁은 무익하기 짝이 없어. 안남의 육지에서 싸우는 건 상관없지만, 바다에선 무조건 회피해야 하네."
이홍장은 전쟁이 언제 끝나는지, 속이 탈 지경이었다.
"중당의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이홍장은 북양수사의 출진 명령을 내린 후, 고향에서 휴가를 보내던 원세개를 천진으로 불렀다.
"소식 들었나?"
"예, 북양수사를 동원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어쩔 수 없게 됐네. 조선 정세가 바뀐 덕에 말이야. 덕국과 아라사, 심지어 일본까지 조선의 중립에 동의했네."
"대청이 법국과의 전쟁으로 곤란한 틈을 타 멋대로 중립을 운운하다니요. 아뢰옵기 송구한 말이오나, 이게 바로 조선과 완화군이 획책한 바 아니겠습니까?"
원세개의 지적에 이홍장이 고개를 저었다.
"완화군이 덕국과 아라사를 움직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나?"
"움직이진 못해도 놀아날 순 있지요. 아라사와 결탁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럴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순 없지. 그러니 자네를 조선으로 보내야겠네."
이홍장이 황금빛으로 장식된 문건을 전달했다.
"원세개, 자네를 주차 조선 상무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칙서일세."
원세개가 감격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중당! 하온데 그러면 진대인은?"
"진수당은 해임일세. 솔직히 말해서 그에게 실망스럽네. 조선에 미치는 영향력이 전무해. 중립에 대해서도 사전에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았나."
이홍장은 본래 진수당을 유임시키려 했으나, 강경파인 원세개를 밀어주기로 마음을 바꿨다.
"나는 완화군의 신의와 능력을 신뢰하네만, 완전히 믿진 않네. 조선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동쪽 울타리로 남아야 해. 완화군과 조선이 이를 넘지 않도록 제어할 필요가 있겠지."
이홍장은 처음으로, 완화군과 조선이 영원히 신하로 남지 않으리라는 의심이 생겼다.
"제게 맡겨 주시면 조선의 군신이 딴마음을 먹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음. 하지만 서양 열강과 척을 지는 일이 없도록 하게. 특히 영국과는 반드시 보조를 맞추도록. 전에도 말했지만,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게. 중요한 사항은 반드시 먼저 내게 보고하고 움직이도록."
"예, 명심하겠습니다. 조선에서 대청의 이익을 반드시 관철하겠습니다."
겉으로는 겸손하게 숙였지만, 처음으로 전권을 맡게 된 원세개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