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34화 (134/812)

133 빛과 어둠

원세개는 조선으로 입국하여 외무부를 찾았다.

"신임 주차 조선 상무위원 원세개,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조선에 오게 되었음을 알립니다."

"조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원 대인."

이선은 별로 환영하지도, 축하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외교적인 수사를 썼다.

"흠, 외무부라. 기존의 예조와 통상교섭아문은 어찌 되었습니까?"

원세개가 '外務部' 현판을 보며 물었다.

"예조와 통상교섭아문은 폐지되었습니다. 조선의 외교는 앞으로 외무부에서 전담합니다."

"본래 남의 신하 된 자는 외교를 할 수 없고, 제후국이 각국과 통교하는 것도 분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외교를 전담하는 외무부라니요?"

"원 대인. 조선이 국제법에 근거하여 외교를 한다는 건 청국에서도 동의한 바입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형식적 이야기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본론이 뭡니까?"

이선은 외교적 수사를 집어치우고 냉정하게 말했다. 원세개가 빈정거리듯 웃으며 답했다.

"덕국이 조선의 중립과 영토 보전을 제안했다더군요. 아라사와 이태리, 오지리, 그리고 일본도 동의하고."

"그렇다고 합니다."

"조선이 사전에 모르지는 않았겠죠. 덕국, 아라사, 일본과 결탁한 게 아닙니까?"

"결탁이란 단어가 매우 불쾌하게 들리는군요. 아닙니다. 덕국 재상 비스마르크는 본래 외교의 달인이자 국제적인 중재자로서, 이번에도 직접 나서게 된 것이지요."

"하하! 완화군과 여기 계신 목 협판이 덕국 영사를 자주 만난 걸 내가 모를 것 같습니까? 목 협판, 귀공을 조선으로 보낸 건 북양대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모르고 이런 일을 꾸미다니요."

묄렌도르프가 불쾌감을 표했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중립화 제안은 덕국 정부가 추진한 일입니다. 그리고, 조선의 중립은 결코 청국에도 해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일본이나 기타 열강이 조선 영토를 점유하는 걸 막으니, 오히려 청국에도 도움이 되지요."

"그걸 판단하는 건 대청이지, 조선이 아닙니다. 상국을 무시하고 멋대로 일을 추진하다니, 북양대신께서도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선이 빙긋 웃었다.

"조선의 위험이 줄어든 덕에, 북양수사가 안남으로 출동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대청은 육지에 이어 바다에서도 승리하리라 기대합니다. 대청의 전쟁 승리에 조선이 기여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지요."

북양함대가 거느린 최신 군함인 초용과 양위가 황해를 떠나 남쪽으로 향한 건, 청의 조선에 대한 개입력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걸 의미했다. 실제 역사에서, 임오군란에서 초용과 양위가 군대를 싣고 조선에 온 덕에 신속히 진압할 수 있었다.

"대청이 법국과의 전쟁으로 조선에 신경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입니다. 앞으로 본관이 조선에 주재하며 내정과 외교를 감독할 것입니다."

"상무위원의 권한에 그런 게 있었던가요?"

"북양대신께서 내게 전권을 맡기셨습니다."

"조선은 북양대신의 관할이 아닙니다. 그리고 대인은 북양대신 휘하의 상무위원에 불과합니다."

"조선 국왕은 대청 황제 폐하의 신하요, 북양대신도 신하이니, 독판외무부사 완화군과 나는 동급이라고 할 수 있지요."

원세개의 망언에 외무부 관리들이 분개하여 일제히 원세개를 노려보았다.

"말을 삼가시오! 그따위 무례한 태도는 용납하지 않겠소."

이선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이런, 실례. 아무튼, 본관은 조선의 군신이 대청에 충성을 바친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앞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겠습니다."

조선국왕과 북양대신이 동급이라는 원세개의 망언에 조정 신료들 모두가 격분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임금조차도 불쾌감을 드러낼 정도였다.

"조선은 세계 각국이 공언한 자주의 나라이다. 원세개가 감히 무엇이건데 나와 조선을 이토록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원세개의 무례함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청국에 사람을 보내 항의를 해야 합니다."

"아니, 아예 추방해버리지요."

독립 의식이 강한 급진 개화파 관료들이 일제히 원세개를 규탄하며 강력한 대응책을 주장했다.

"저런 싸구려 도발에 응한다면 그게 바로 원세개가 노리는 바일 겁니다."

이선의 냉철한 태도에 법무독판 김윤식이 동의를 표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세개는 그렇게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조선을 도발하여 평지풍파를 일으키려는 속셈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법무독판께서는 원세개와 친분이 있지요?"

이선의 물음에 김윤식이 답했다.

"예, 나이는 젊지만 유능하고 야심이 많은 자입니다."

"원세개와 교류하며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살펴봐 주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원세개 단독으로 모험을 벌일 리는 없지만, 지켜볼 필요는 있다.'

1885년 3월 1일(을유년 정월 대보름).

정월 대보름은 동양에서 특별히 여기는 날로, 조선 역시 왕실과 민간 차원에서 크게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 해의 대보름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의 빛 외에도, 새로운 빛이 조선 땅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경복궁 깊숙한 곳, 건청궁 향원정 앞.

벽안의 서양인이 기계를 움직이자, 물이 끓는 소리와 벼락과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궁전 내의 전등에 휘황한 불빛이 대낮같이 점화되어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밤중에 이렇게 환할 수도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기술일세."

"정신이 없군. 도깨비불을 보는 것 같소."

이날은 바로 동양 최초로, 왕궁에 전기가 설치된 날이었다.

보빙사가 미국에서 에디슨 전기회사와 체결한 계약에 따라, 1884년 말 미국인 전기 기술자들이 조선에 입국했다.

경복궁 전체에 750개의 16촉 전등을 설치하고, 이에 필요한 발전 설비를 갖추는 대형 사업이었다. 40마력의 전동기 한 대와 엔진에 연결할 25KW 직류 발전기가 발전 설비로 도입되었고, 경복궁 내에 있는 향원정의 물이 발전기를 돌리는 데 이용되었다.

총 3만 달러라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선은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보빙사도 유독 전기를 좋아했지. 전등만큼 확실한 근대의 상징이 없지. 밤에 불빛을 환하게 비추는 것보다 확실한 게 어디 있겠나.'

임금부터 신료, 궁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전기라는 신기술에 감탄했다.

그동안 밤에 불을 켠다고 해 봤자 호롱이나 등잔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불빛과 달빛 외에도, 전깃불이 환하게 비추게 되었다.

불면증이 심한 임금도, 밤에도 지치지 않고 업무를 계속하던 이선과 관료들도 밤을 비추는 전깃불에 만족했다.

"이제 밤이 늦었다고 하여 일을 멈출 수가 없게 되었구려, 하하."

"너무 과로하는 거 아닙니까? 하하."

"우리 신료들이 열심히 일하는 만큼 조선의 개화가 하루라도 당겨질 것이니, 쉴 틈이 없지요."

김옥균의 말에 모두가 숙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경복궁뿐이지만, 앞으로 한양, 전국에 전기를 보급할 계획이 있었다.

전기 발전소는 단순히 전등을 점화할 목적으로만 설치한 게 아니었다. 신설된 전보총국과 기기국에도 사용되기에 충분한 전력량이었다.

서로 전선에 이어 남로 전선이 신설되어, 각지에 전신을 통보하려면 많은 전기가 필요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기창에서는 노벨의 지원을 받아 무기와 각종 기계의 생산에 돌입했는데, 증기가 아니라 전기를 활용해 생산에 돌입할 계획이었다.

최초의 동력원은 수력이었지만, 향후 건설될 발전소에는 19세기에 주로 쓰이던 석탄이 아니라 석유를 활용하기로 했다.

이 역시 브라노벨과의 특수한 관계가 도움이 됐다. 바쿠유전에서 채취한 석유가 조선으로 들어와, 인천에 석유창고를 세워 비축했다.

'전기와 석유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 될 것이다.'

환하게 빛나는 전등을 보면서, 이선은 새 시대 그 자체를 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새 시대의 빛을 모두가 환영하는 건 아니었다. 망국의 징조로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일단의 무리가 어둠 속에서 회동을 했다.

"그 전기라는 걸 보았소? 아주 신묘하기 짝이 없더군."

"전깃불이 묘하다고 해서 묘화(妙火), 괴상하다 해서 괴화(怪火)라고도 하오. 불이 건들거리면서 자주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니 건달불(乾達火)이라고도 하지."

"바로 서양의 무리는 그 건달불과 같소. 사람들의 정신을 현혹하는 거지. 나라의 정궁인 경복궁이 서양의 무리에 현혹되었으니, 참으로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오이다."

"이대로 가면 500년 조선은 무너지고야 말 것이오. 더 이상 개화당 연소배들이 나라를 망치는 꼴을 지켜만 볼 수 없소. 움직입시다."

"어떻게 말이오?"

"삼흉오적은 나라를 어지럽히는 간신이니, 충신들이 나서 벌하는 것이 하늘의 도리를 지키는 일이오."

엄청난 발언에 좌중이 경악했다.

"서, 설마. 대원군과 완화군을?"

"삼흉은 왕족이니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겠지만, 오적은 처단해야 하오. 특히 완화군을 등에 업고 나대는 개화당 연소배들을 제거해야 하오."

"그, 그게 가능하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오."

우두머리가 하늘을 가리켰다. 중의적인 의미였지만, 무리는 의미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은 계엄 상황이니, 경계가 엄중하지 않소? 군대 외에도 새로이 순검이라는 게 생기지 않았소."

"오적을 모두 벌할 수는 없겠으나, 경고의 의미로 한두 명은 벌할 수 있을 것이오."

"좋소. 해봅시다. 그렇다면 누구를 노려야겠소?"

"내 생각에는······."

어둠 속에서 음습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며칠 뒤. 탁지독판 김옥균은 밤늦게까지 업무를 마치고 퇴궐하였다.

재정 업무를 다루는 김옥균의 책무는 무거웠다. 국내 행정을 총괄하는 내무독판 홍영식, 산업 전반을 관할하는 농상공독판 어윤중과 밤낮을 새워가며 개혁에 몰두했다.

"대감,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음, 집으로 가지."

"알겠습니다."

김옥균을 태운 사인교가 북촌의 자택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김옥균을 노려보던 이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복궁은 훤한데 도성은 어둡기 짝이 없군. 하루빨리 도성에도 전등을 놓아야할 터인데 말이야."

"곧 그리되지 않겠습니까?"

"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갈 길이 머네. 한양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 개화의 빛을 비추려면······."

김옥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호쾌한 어조로 말했다.

"어둠 속의 빛이라면 역시 기방만 한 곳이 없지. 여인들의 아름다운 얼굴이 곧 빛이 아니겠나? 격무의 피로도 풀 겸 모처럼 가봐야겠군."

김옥균의 말에 동행하던 부영관 윤경순이 껄껄 웃었다.

"하하, 역시 고균 대감다우십니다. 좋습니다, 가시지요."

김옥균 일행이 갑작스럽게 운종가 쪽으로 방향을 틀자, 어둠 속에서 뒤따르던 무리들이 당황하다가 뛰어나왔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간신 김옥균! 천벌을 받아라!"

"웬 놈이냐!"

어둠 속에서 복면을 쓴 사내 셋이 문답무용으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윤경순이 칼을 뽑아 들었다.

"어딜 감히!"

챙! 챙! 푸쉭!

"크억!"

"으윽!"

자객들이 간과한 점은, 윤경순의 검술 실력이었다.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마치고 신군의 지휘관을 맡고 있지만, 본래는 김옥균이 조직한 사조직인 충의계에서도 손꼽히는 검객이었다.

김옥균이 요인암살용으로 발탁했던 이들은, 지금은 암살로부터 김옥균을 보호하는 처지가 되었다.

"한 놈은 죽이지 말고 생포하게."

김옥균의 명령에 윤경순이 둘을 베어 넘기고, 한 명은 팔에 상처를 입혀 칼을 떨어트렸다.

"크읏······."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요인은 늘 암살에 대비해야 하는 법. 네놈의 배후가 누구냐?"

"배후가 어디 있겠느냐? 나라를 어지럽히는 간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가 조선 천지에 가득하다!"

김옥균의 눈짓에 윤경순이 칼로 자객의 목젖을 압박했다. 칼 놀림 한 번이면 목이 베일 터였다.

"나를 죽이고 싶어 할 자가 적진 않겠다만, 그래도 알고 싶군. 배후가 누구냐? 지금 말하는 게 경무청에 끌려가는 것보단 나을 거다. 우린 아직 법전을 교체하지 않았거든. 그말인즉슨, 대명률대로 네놈을 고문하고 참할 수 있단 말이다."

김옥균의 이죽거림에, 자객이 냉소했다.

"네놈은 운이 좋았다. 하지만 조선 땅에 죽여야 할 간신이 너뿐이겠느냐? 내가 죽으면 다른 의사(義士)들이 대기하고 있다!"

자객은 스스로 윤경순의 칼에 목을 그어 버렸다. 윤경순이 칼을 거들 틈도 없이, 그대로 피가 흩뿌려졌다.

"지독한 놈······. 설마!"

김옥균은 자객의 시체를 쳐다보다가, 무언가 섬광처럼 번뜩 지나가는 것 같았다.

"어서 금석에게 가세!"

김옥균의 명에 윤경순은 칼을 뽑은 채로 내달렸다. 방금 전에 함께 퇴궐한 동지, 홍영식의 안위가 걱정된 것이다.

홍영식의 자택으로 가는 길 앞에, 피를 철철 흘리는 관복 차림의 사내가 보였다.

"빌어먹을!"

김옥균은 홍영식을 알아보고 욕설을 내뱉었다. 불길한 예상이 들어맞은 것이다.

"금석! 나 김옥균이오! 괜찮소?"

"고, 고균······."

홍영식은 단말마의 외침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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