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36화 (136/812)

135 그레이트 게임 (2)

조선에서 순조롭게 개혁이 이뤄지는 사이, 국제정세의 변화가 있었다.

제2차 영-아프간전쟁(1878-1880)에서 승리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친영정권을 수립하여, 러시아와 접경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북부국경을 보다 위쪽으로 끌어올려 완충지대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충돌했고,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간의 불확실한 국경선을 조정하기 위해 영국은 국제회의 소집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전에 요충지를 선점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1885년 3월 30일.

"Fire!"

아프가니스탄의 오아시스 도시, 헤라트(Herat) 근방 펜제(Panjdeh)에서 러시아군과 아프가니스탄군이 충돌했다. 결과는 러시아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얼마 뒤, 펜제에서 영국의 지원을 받은 아프간 군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이 런던에 전해졌다.

"호외요! 호외!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인도까지 침략하려 한다!"

매파 언론들은 러시아의 인도 침공이 임박했다고 떠들어 댔다.

"여왕 폐하의 정부가 더 이상 러시아의 침략행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도는 대영제국의 왕관에서도 가장 귀중한 보석이다. 보석에 손을 대려고 하는 러시아 불곰을 잡아야한다!"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

글래드스턴 총리는 러시아의 '침공' 소식을 듣고 해결책을 골몰했다.

야당인 보수당은 말할 것도 없고, 자유당 내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강경론을 주문했다.

영-아프간 조약에 따라, 영국은 아프가니스탄 보호를 위해 군대를 동원할 의무가 있었다.

'도덕 정치'의 주창자로, 제국주의 정책에 거리를 두고 있는 글래드스턴이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제국주의 시대의 정치인이었다. 총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압도적인 강경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러시아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인도 방위를 위협하는 행위요.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의회에 추가예산 안을 상정합시다."

의회에 1천만 파운드의 특별예산이 상정되었다. 이는 유사시 러시아와의 전비로 사용할 용도였다. 자유당과 보수당은 모처럼 의견을 일치하여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영국 육해군은 유사시 러시아를 공격할 방안을 모색했다.

"크림전쟁과 같은 전면전은 안 되고, 국지전으로 제약해야 합니다."

이에 따라 유럽 전선은 처음부터 제외되었다. 그럼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이 전선으로 논의되어야 했지만, 이도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 군대로는 절대 러시아를 못 막습니다. 인도 주둔군을 아프가니스탄까지 파병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압도적인 우위가 있는 해군으로 타격을 가해야 합니다."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는 함대 중 발트해와 흑해는 유럽이니 제외되고, 남는 건 태평양뿐이었다.

"현시점에서 러시아에게 가장 쉽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곳, 우리 해군이 공격할 수 있는 항구는 바로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입니다."

"그렇지만 극동함대의 모항은 홍콩에 있지요. 유사시 홍콩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는 건 너무 멉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최적의 항구 후보지가 있지요."

지도에서 가리키는 곳은 한반도의 남해, 바로 거문도였다.

"포트 해밀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포트 해밀턴은 동양의 몰타고, 조선해협은 동양의 보스포루스 해협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를 선점해야 합니다. 1854년 이래 그동안 계획으로만 있었던, 포트 해밀턴 점령을 실행으로 옮길 때가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충돌이 엉뚱하게도 조선을 향해 튕겨 나가는 순간이었다.

군부의 계획에 정부에 보고되자, 글래드스턴은 우려를 표했다.

"불과 얼마 전에 독일이 조선의 중립과 영토보전을 제안하고, 러시아가 이에 동의했소. 그런데 우리가 이를 깨트리면 저들이 받아들이겠소?"

"애초에 대영제국은 조선의 중립과 영토보전에 동의한 바가 없습니다."

"독일이 조선 중립을 제안하자마자 러시아가 동의한 게 수상합니다. 이는 조선이 러시아의 영향권 하에 들어갔기에, 표면적인 중립을 승인한 겁니다."

"조선의 집정자인 왕자는 러시아 차르와 특별한 관계입니다. 그들 간에 분명히 밀약이 있었을 겁니다."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밀약이 있다는 어떠한 근거도 없지만, 군부 강경파는 거문도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밀어붙였다.

"하지만 조선은 고든 장군을 군사고문관으로 채용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정책이 딱히 러시아에 기울어진 적도 없습니다. 이는 조선이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조선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을 내리지요."

"조선의 의도가 대체 뭐가 중요합니까? 동양의 비문명국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건 대영제국이 포트 해밀턴을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영제국이 홍콩을 원하니 거대한 청나라도 굴복했습니다. 조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계최강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영국 군부에, 조선의 의견 따위는 알바 아니었다.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는 차치하더라도, 중립과 영토보전을 약속한 독일과 러시아를 생각하자는 말입니다!"

"바로 그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인데 대체 왜 그들을 신경을 써야 한단 말입니까?"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오가자, 총리 글래드스턴이 결단을 내렸다.

"먼저 조선의 의견을 청취해보는 게 맞습니다. 애스턴 총영사와 고든 장군에게 훈령을 내리겠소. 그들의 답변을 기다려봅시다."

4월 10일, 조선 외무부.

"어서 오십시오, 애스턴 총영사. 고든 협판. 두 분이 함께 어쩐 일이십니까?"

고든은 영국군 소장이었지만 동시에 조선의 군무협판이었다. 공정한 성격의 고든은 조선의 관직을 받은 시점에서 일부러 모국인 영국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영국 외교관과 함께 움직이는 일은 드물었다.

"영국 정부의 제안을 전해드리기 위해 외무부를 찾았습니다. 지금부터 드리는 이야기는 극비사항이며, 오직 외무장관 각하와 최고위급에서만 공유되기를 바랍니다."

"호오, 어떤 제안인지 궁금하군요."

이선은 주위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단독으로 애스턴과 고든을 맞이했다.

"각하께서는 러시아군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는 걸 아십니까?"

"아니오, 금시초문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은 오지나 다름없는 곳이었고, 영국에 전보가 전해지는데도 1주일이나 걸렸다. 조선에서는 아직 알 수 없는 정보였다.

"대영제국 정부는 이를 전쟁에 준하는 도발행위로 받아들였습니다.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그 답변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선은 깜짝 놀랐다.

'설마 그레이트 게임이 전쟁이 되는 건 아니겠지?'

"영국 정부는 조선에 특별히 제안하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설마······.'

"혹시 거문도를 조차해달라는 겁니까?"

이선의 질문에 애스턴이 오히려 놀랐다.

"어찌 짐작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영국 정부는 포트 해밀턴, 거문도의 조차를 원합니다."

'너네들 요구사항이야 뻔하지. 근데 역사가 바뀌었는데도 이렇게 되나?'

이선은 맞은편에 앉은 고든을 쳐다보았다. 고든은 역사대로라면 이미 수단에서 죽었어야 했다. 그리고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상징하는 순교자가 되어야 했다. 고든의 죽음에 쏟아지는 비난에 글래드스턴 정부는 대외강경책을 써야 했다.

하지만 고든은 죽지 않고, 조선에서 군의 근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조선도 역사와 달리 대개혁을 시작하고, 중립을 선언했다. 독일과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 4개국이 승인했다.

그럼에도 영국의 침략적 행보는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열강의 의도를 얕보았나? 약소국이 아무리 용을 써도, 저들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한다 이건가?'

실제 역사를 보면, 거문도 사건은 갑신정변 직후의 '조러밀약설'에 따른 대응책으로 흔히 언급된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조러밀약설은 문자 그대로 설이었고, 러시아는 부담을 느껴 조선의 제안을 거부했다. 오히려 영국이 조러밀약설을 인지하게 된 건 거문도를 점령한 이후의 일이었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건 펜제 사건의 연장선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기 위함이었고, 조러밀약설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가 되어주었다. 조선이 러시아와 밀약을 맺건 말건,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이 중립을 선언하건 말건, 영국은 뜻대로 행동하려는 것이었다.

"그래, '영국'이 '영국'한 거네. 혐성국 본성이 어디로 가나."

"Pardon, your excellency?"

이선의 조선어를 알아듣지 못한 애스턴이 되물었다. 이선이 빙긋 웃으면서 계속 말하라고 했다.

"영국 정부는 조선이 거문도를 조차해준다면,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드릴 것을 약속했습니다. 매년 1만 파운드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조선의 중립과 영토보전을 보장······."

애스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선이 끊었다.

"아니, 그게 무슨 모순입니까? 영국이 조선의 영토를 점령했는데 어떻게 중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해주는 겁니까?"

이선은 외교적 수사조차 쓰지 않았다. 영국의 제안은 그만큼 어처구니가 없었다.

"러시아와 청국,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영토를 보장해준다는 의미입니다."

"영국은 제외하고?"

"저 세 나라와 달리 영국은 거문도 이상의 욕심은 없으니까요."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영국은 거문도 이상을 차지할 생각은 없겠지. 하지만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는 걸 허용하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거다. 이를 명분삼아 주변국이 모두 조선의 중립과 영토보전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겠지.'

이선은 고든을 쳐다보며 말했다.

"조선은 열강 간에 균형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고든 장군을 조선의 군사고문관으로 모셔온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고든 장군을 높이 평가해서입니다만, 조선이 러시아와 결합하려 한다는 세간의 속설을 불식시킬 목적도 큽니다. 그런데 영국은 어찌 조선의 노력을 이렇게 짓밟으려 합니까?"

"각하, 저는 군인입니다. 정치나 외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영국 군인인 동시에 조선 정부의 녹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영국과 조선을 중재해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든은 난처해했다. 그는 1880년 청과 러시아 간의 전쟁 위기가 임박했을 때, 관여하지 말라는 영국 정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귀화할 의사까지 드러내며 청을 위해 노력했다.

이번에도 고든은 조선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태 해결을 위해 골몰했다.

"대영제국은 세계 최고의 강국입니다. 청이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도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영국에게 거문도를 조차하는 조건으로 그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중립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리라 생각합니다."

"중립이 아니라 영국의 보호를 받으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각하.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국가도 감히 조선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더 많은 고문단을 보내 조선의 근대화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장군 본인의 의견입니까, 영국 정부의 의사입니까?"

애스턴이 재빨리 답했다.

"본국의 훈령을 받아 현지에 있는 저희가 재량껏 정한 제안입니다만, 본국에 상신하여 허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세계 최강인 영국의 보호를 받는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하군.'

분명 19세기 후반의 영국은 세계 최강이고, 그 어떤 나라도 대적할 수 없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하지만 이선은 이게 감언이설에 불과하고,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라는 걸 알았다.

'고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약속을 지킬 사람이지만, 런던에 있는 당국자들은 절대 지키지 않는다. 신의의 문제가 아니라 국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국에게 중요한 건 상업적 이익이었다. 영국 아시아 무역의 두 축은 인도와 중국이었고, 중국 대외무역의 대부분은 영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영국이 각종 수출품의 판매로 중국 시장에서 누리는 이익은 어마어마했다.

그에 비하면 조선에서 누리는 영국의 이익이란 미미한 것이었다. 중국과 달리 조선 시장이 크지도 않을뿐더러, 영국에게 '불리한' 조항이 여럿이었다. 영국은 중국에서 아편판매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었지만, 조선은 아편을 엄금했다. 5%에서 7.5%인 주변국의 관세와 달리, 조선의 관세는 10%에 달했다. 영국 자본가들이 관세에 불만을 품고, 계속 조약 개정을 시도했지만 이선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런데 영국이 뭐가 아쉬워서 조선을 보호하겠나? 만약 청과 조선이 충돌할 일이 있으면, 영국은 99%도 아니고 100% 청을 지지한다. 그게 영국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선은 결정을 내렸다.

"조선은 이미 대외중립을 국가의 기조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특정 일국에 영토를 내주고, 그 보호를 받으려 하겠습니까?"

"그럼 영국 정부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말씀입니까?"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니, 조정에 상신하여 토의하겠습니다. 일단 답변을 기다려주십시오."

이선은 잠시 시간을 벌어두고, 대안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고, 귀국의 좋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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