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새로운 시대
천진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대원군은 이선과 사절단을 치하했다.
"그대들이 조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준 덕에,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맺을 수 있었소."
"국태공의 위엄 덕입니다."
조약의 실무는 이선, 김윤식, 어윤중이 도맡아 보았지만, 조선을 대표하는 대원군이 외교 무대에서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준 공도 컸다. 조선을 은근히 낮추어보던 이홍장과 이토도 대원군의 당당한 위엄에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작금의 국제 정세가 절묘하여, 청국과 일본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토와 이노우에의 주도로 당분간 조선 불개입 정책을 정했기에, 조선이 중립을 선포해 외세 간섭을 줄이고 외국군의 주둔을 막는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선이 염려하던 건 오히려 청국이었다. 이홍장과의 개인적 친분은 차치하더라도, 청은 중화제국이라는 지위와 북경에서 지척에 있다는 지리적 요인을 감안해 조선을 확실한 통제하에 두고 싶어 했다.
지금까지는 조선의 양무파를 자처하는 이선의 정책으로 인해 내버려 두고 있었지만, 조선이 중립을 선언해 청의 영향권 밖으로 이탈하는 걸 우려했다.
이선은 '자주와 부국강병을 이룬 조선'이 결코 청국에 위험이 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걸 거듭 이홍장에게 설득했다.
"내가 이번 회담에서 조선을 많이 배려해 준 건, 그만큼 조선과 완화군을 신뢰하기 때문이오. 나의 기대, 아니 중국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시오."
이홍장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생색을 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기대에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이 어서 힘을 키워 중국의 울타리가 되기를 기대하겠소."
그럴 목적으로 부국강병을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이선은 웃으면서 답했다.
"그리 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이홍장은 이번 회담에서 이토와 이선에게 밀렸다는 걸 내심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홍장은 총리아문에 보내는 보고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이토는 유능하고 교활한 자입니다. 이토가 일본을 이끌게 되면, 일본은 향후 10년 안에 중국을 위협하는 강국이 될지도 모릅니다. 일본이 지금은 잠시 물러날지라도, 일본에 대한 경계를 늦춰선 안 됩니다. 섬나라인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선 반드시 해군의 강화가 필요합니다.
- 조선인은 대체로 문약하나, 이하응은 과연 늙은 효웅(梟雄)이라 할만합니다. 그 손자인 이선은 어리지만 조부의 능력을 물려받아, 왕자(王者)로서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국은 조선을 관대히 품어 안아 그 군신(君臣)이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조선 문제를 신에게 맡겨주시면, 조선이 중국의 동쪽 울타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조선 문제에 대해 너무 양보했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라 예상한 이홍장은 미리 연막을 쳤다. 그리고 천진에서 다음 조약을 준비했다.
1885년 봄, 랑선의 승리 이후 청군은 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공세와 방어가 뒤바뀐 것이다.
여전히 제해권은 프랑스에 있었으므로, 프랑스 함대는 대만을 다시 포격하고 팽호제도(澎湖諸島)를 점령했다. 하지만 청은 최소한 지상에서는 물러날 뜻을 뵈지 않았다.
"서양 오랑캐를 두려워하지 말고 전진하라!"
방어하는 프랑스군보다 청군의 희생이 훨씬 컸지만, 병력 소모를 아까워하지 않는 청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도 거듭 전진했다.
청권의 공세에 맞춰 베트남 저항군과 유영복의 흑기군은 유격전으로 프랑스 식민지 군대를 괴롭혔다. 현지 군대만으로는 도저히 막을 처지가 되지 못했다. 프랑스는 추가 파병을 하든가, 협상을 하든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프랑스는 일본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지만, 천진 조약이 체결되면서 그럴 가능성도 사라졌다.
페리의 후임 총리인 앙리 브리송(Henri Brisson)은 확전과 협상 중에서 후자를 선택했다.
천진 조약 체결 직후, 6월 프랑스와 청은 휴전을 합의했다. 주청 프랑스 공사 파르트노트가 천진으로 와서 이홍장과 새로운 조약을 논의했다.
프랑스 공화국과 대청국은 베트남의 주권과 독립을 보장한다.
중국은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특수한 이해관계가 있으며,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임을 인정한다. 프랑스는 중국이 베트남에서 누리는 존엄성을 해치지 않으며, 그 관계를 존중한다.
베트남의 수도 후에와 중부 일대는 베트남 국왕의 직할령으로 둔다. 베트남의 남부, 즉 코친차이나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직할령으로 둔다. 베트남의 북부, 즉 통킹은 프랑스와 중국의 완충지대로 삼아 어느 쪽도 군사 주둔을 하지 않는다. 양군은 6개월 이내로 통킹에서 철수한다.
프랑스는 중국의 남부 국경을 존중하며, 중국 영토를 침해하지 않는다.
상호 간에 배상금은 지불하지 않으며,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복귀한다.
······
청국으로서는 절반의 승리였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세력권임을 인정했지만, '베트남의 독립'과 '중국의 존엄성'을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절반의 승리였다. 특히 베트남 북부, 통킹 일대를 완충지대로 보장받은 점은 전쟁 전의 간명 조약보다 훨씬 발전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청으로서는 서양 국가와 처음으로 대등한 평화조약을 맺었으니 양무운동의 성과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0억 냥에 달하는 막대한 전비와 수많은 사상자를 얻고 낸 결과라고 치기엔 실질적으로 얻은 게 별로 없어서, 절반의 패배였다.
베트남 입장에서도, 간신히 실낱같은 독립의 끈은 유지했다는 점에서 저항의 결실을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청군과의 전투에서 패했다는 데 굴욕감을 느꼈지만, 베트남의 세력권을 보장받고 실질적인 이권을 챙겼으므로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었다.
"이는 서양을 상대로 한 전쟁과 외교에서 모두 성과를 거둔 덕이다. 이에 마땅히 공로자들을 치하하노라."
서태후는 전투를 승리로 이끈 풍자재와 조약을 성공적으로 맺은 이홍장을 치하하고, 무턱대고 전쟁을 주장했지만, 막상 전쟁 수행 과정에서 무능함을 보인 청류파 대신들을 모조리 파직했다.
'그거 봐라. 쓸데없이 조선에 집착하지 않으니까 청도 위신을 지키고, 전쟁의 성과를 거두지 않나.'
이선은 청-불 천진 조약의 사본을 입수하고, 바뀐 역사에 만족감을 느꼈다.
역사대로라면 청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을 넘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전쟁의 승기를 잡고도 프랑스에 모든 걸 내주는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베트남의 완전한 상실은 중화제국의 위신에 큰 상처가 되고, 일본이 앞으로 청을 상대로한 전쟁을 해볼 만하다는 확신을 주었다.
'베트남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군.'
남부는 프랑스의 직할령에 속하고, 외교권은 프랑스에 귀속된 보호국 신세였지만 베트남은 중부의 통치권을 인정받아 간신히 독립은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의 개혁이 만들어낸 나비효과로, 베트남의 역사까지 바뀌게 된 것이다.
'자, 그럼 조선도 바뀐 역사의 이점을 한껏 누려볼까.'
"청과 일본도 조선의 중립과 영토보전을 승인했으니 이제 거칠 것이 없습니다. 영국군의 즉각적인 철병을 요구합시다."
이선은 삼국 회담과 천진 조약의 내용을 공표하고, 각국 공사관에 알렸다.
주변국이 모두 조선의 중립과 영토 보전을 승인한 이상, 영국은 더 이상 거문도를 점령할 명분이 없었다.
때마침 1885년 6월, 아일랜드 자치법안 문제를 놓고 자유당이 분열하여 글래드스턴 내각이 사퇴하고, 보수당의 솔즈베리(Salisbury) 후작 로버트 게스코인-세실(Robert Gascoyne-Cecil)이 총리에 취임했다.
솔즈베리는 귀족이자 보수당 지도자답게, 글래드스턴보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확장을 지지하는 정치가였지만, 이번에는 러시아와의 타협을 추구했다.
영국과 러시아 간에 전쟁 위기를 만들었던 아프가니스탄 국경 문제도 8월부터 국경협의회가 이뤄지면서, 양국 간 긴장도 완화되었다.
하지만 거문도 점령을 감행하고도 무작정 철수하자니 체면을 구기게 된 영국은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러시아가 앞으로 조선의 영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한다면, 영국도 포트 해밀턴에서 철수를 하겠다."
영국의 요구에 러시아는 외무대신 기르스의 명의로 성명을 발표했다.
"러시아 제국은 조선 왕국의 중립을 지지하며, 그 영토를 침해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
이에 더해 주조선 공사 베베르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친서를 전했다.
조선의 중립과 영토 보전뿐만 아니라, 앞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확고히 지지하고 후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라사 황제 폐하의 호의를 조선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친서를 전해 받은 임금은 크게 기뻐하며 감사를 표했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지하는 러시아의 정책에, 임금과 신료들도 러시아에 우호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다.
"아라사가 무조건 영토를 확장하려 들고, 조선까지 노리는 침략자라는 건 믿지 못할 소문이었소."
러시아를 경계대상 1호로 삼는 『조선책략』을 갖고 온 김홍집도 반성할 정도였다.
"오히려 믿을만한 나라라던 영국이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고, 주권을 침해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외교가에는 '러시아 공포증(rusophobia)'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대개 영국이 만들어내서, 동양에서는 일본이 퍼트린 개념이지요."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부동항에 대한 집착. 절반은 사실이지만, 절반은 허깨비와 같은 허상이었다.
그레이트 게임의 당사자라고 해도, 러시아는 국력의 한계를 깨달아 영국과의 대립을 가급적 피하려 했지만, 영국이 러시아를 경계해 루소포비아를 만들고 퍼뜨렸다.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여기는 일본은 이를 받아들여 충실히 전파했고, 조선은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과연 그렇군요. 영국이 아라사를 경계하여 만들어낸 헛소문이군요."
"뭐, 그래도 아라사가 특별히 조선을 아끼는 건 역시 완화군 대감의 덕이지요."
"하하, 맞습니다. 군 대감께서 아라사 황제의 생명을 구했으니, 마땅히 보은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뿐입니까? 청과 일본이 중립을 승인하게 만든 것도, 완화군 대감의 능란한 외교술 덕입니다."
정작 찬사의 당사자인 이선은 겸손히 대응했다.
"성상의 현명함과 국태공의 위엄 덕이지, 내가 칭찬을 받을 일이 아닙니다."
이선의 겸손한 처신에 신료들은 더욱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이선은 진짜로 자신만의 공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국가 간의 세력균형이 이뤄졌기에 이룰 수 있었던 일이지, 어찌 개인적 감정으로 국사를 결정하겠나? 러시아가 영국보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건, 패권 경쟁에서 러시아가 영국보다 수세적인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청국보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건, 현시점에선 일본이 청국보다 수세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선의 공이 있다면, 이를 정확히 직시하면서 외교정책을 구사, 세력균형을 이룬 것이었다.
러시아가 조선의 중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청국과 일본도 지지하였으니 영국도 명분이 없었다. 중립적 위치에 놓인 미국의 중재를 받아, 영국은 거문도 철수를 선언했다.
"포트 해밀턴 점령을 야기한 위기가 해소되었으므로, 대영제국 해군은 포트 해밀턴에서 1885년 이내로 철수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위신이 구겨지는 일이었다. 지금껏 영국이 원하는 점령지에서 이렇게 신속히 철수해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세계 최강의 국력만 믿고, 약소국인 조선을 우습게 여기고 거문도 점령을 감행한 영국은 외교적 고립을 느끼며 철수해야 했다.
1885년, 을유년, 대조선 개국기원 494년.
청일 양군이 한성에서 철수를 완료하고, 영국 해군도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이제 조선 땅에 외국군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조선의 중립과 영토 보전도 열강과 주변국에 의해 보장받았다.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른 국면이었다. 실제 역사의 1885년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의 주체성이 종속되고, 근대화 정책은 파행으로 점철됐다.
조선은 근 20년간 가속되었던 외세의 압력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