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41화 (141/812)

140 교육입국(敎育立國)

"자, 이제 외부적 목표는 달성했다. 앞으로 내부적 목표를 달성할 때가 왔다."

이선이 심혈을 기울이는 두 가지 사업은 바로 교육과 군대였다. 국민교육과 국민개병은 근대 국민국가를 향한 길이었다.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는 국민교육과 국민개병을 단기간에 이룰 수는 없으니, 사전작업을 충실히 다져나가기로 했다.

1886년 2월 4일, 병술년 새해를 맞이하여 어명으로 교육조서(敎育詔書)를 반포했다.

아! 백성을 가르치지 않으면 나라를 굳건히 하기가 매우 어렵다. 세상 형편을 돌아보면 부유하고 강성하여 독립하여 웅시(雄視)하는 여러 나라들은 모두 그 나라 백성들의 지식이 개명하고 지식이 개명함은 교육이 잘됨으로써 말미암은 것이니, 교육은 실로 나라를 보존하는 근본이다.

······

이제 고(孤)는 교육하는 강령을 제시하여 허명을 제거하고 실용을 높인다.

덕양(德養)은 오륜(五倫)의 행실을 닦아 풍속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지 말며, 풍속과 교화를 세워 인간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의 행복을 증진할 것이다.

체양(體養)은 동작에는 일정함이 있어서 부지런함을 위주로 하고 안일을 탐내지 말며 고난을 피하지 말아서 너의 근육을 튼튼히 하며 너의 뼈를 건장하게 하여 병이 없이 건장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지양(智養)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데서 지식을 지극히 하고 도리를 궁리하는 데서 본성을 다한다. 좋아하고 싫어하며 옳고 그르며 길고 짧은 데 대하여 구별을 두지 말고 상세히 연구하고 널리 통달하여, 한 개인의 사욕을 꾀하지 말며 대중의 이익을 도모하라.

이 세 가지가 교육하는 강령이다.

고가 정부에 명하여 학교를 널리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너희 신민(臣民)의 학식으로 나라를 중흥시키는 큰 공로를 이룩하기 위해서이다. 너희 신민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심정으로 덕성, 체력, 지혜를 기르라.

왕실의 안전도 너희 신민의 교육에 달려 있고, 나라의 부강도 너희 신민의 교육에 달려 있다.

너희 신민이여, 고의 조령(詔令)을 따를지어다.

대조선 개국기원 495년 1월 1일

교육조서의 강령 3조는 덕양, 체양, 지양이었다. 덕양은 전통적인 의미의 도덕적 수양을 의미했으나, 중요한 건 체양과 지양이었다.

체양은 '강건한 육체'를 지닌 근대적 인간을 지향했다. 지금까지 조선에서 육체노동과 신체에 대한 단련을 천시한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체양을 통해 노동과 국민개병에 필요한 인식의 변화를 불러일으킬 생각이었다.

지양은 근대적 실용학문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고, 그동안 양반 사대부 계급이 독점하던 교육을 전 국민으로 확산시키는 게 목표였다. 초등교육은 국민교육으로, 중등교육은 실무교육으로, 고등교육은 엘리트양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교육에는 또한 그 방도가 있으니, 허명(虛名)과 실용의 분별을 먼저 세워야 할 것이오. 책을 읽고 글자를 익히어 고인(古人)의 찌꺼기만 주워 모으고 시대의 형국에 어두운 자는 문장이 고금보다 뛰어나더라도 쓸모가 전혀 없는 서생이오."

"지극히 옳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건 시무를 정확히 파악하는 실용적 인재이지, 쓸모없는 서생이 아닙니다."

정부는 교육입국이 유교적 교육이 아니라, 근대적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함을 분명히 했다. 일찍이 미국과 일본의 교육을 시찰하고 온 학무독판 박정양의 주도로 교육개혁이 추진되었다.

"새로이 교육을 하려면, 새로운 학제를 이해할 수 있는 교사가 충분히 양성되어야 합니다. 사범학교의 성립이 시급합니다."

학무부는 전국 팔도에 소학교 설립을 준비했다. 전국에 국민교육을 하려면, 당연히 교사가 많아야 했다.

이에 초등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학교가 신설됐다. 먼저 한양에 국립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를 설립, 1세대 개화파인 유대치가 교장을 맡았다.

1886년 가을학기부터 학생을 모집, 본과는 2년, 속성과는 6개월 과정으로 새로운 학제에 필요한 근대학문을 익히는 걸 목적으로 했다. 본과는 25세 이하의 청년 100명을, 속성과는 교육 경험이 있는 35세 이하 60명을 선발했다.

"학비는 무료다. 기숙사를 제공한다.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교관(敎官)으로 채용하여 우대한다."

학생 모집을 위해 여러 가지 특전이 제공되었다. 국립학교이니만큼 학비는 무료요, 오히려 기숙사와 약간의 생활비까지 제공했다. 이는 출신과 빈부에 무관하게 인재를 선발하기 위함이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교사 취업을 보장함은 물론, 학무부에 소속된 9품 관리로 인정받았다. 후로도 능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더 진급할 수 있었다.

"공고 봤나? 사범학교에 지원할 생각이네."

"아니, 과거 시험 준비하던 건 어쩌고?"

"임금님께서 교육조서에 명하지 않았나. 이제 신교육이 대세가 될 거야. 자네도 과거 공부 그만두고 사범학교 준비하는 게 현명한 것 같네."

"듣고 보니 그렇군. 정 안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훈장 하는 걸 생각해봤는데, 그럴 바에야 교관이 되면 과거에 합격한 거나 진배없겠군."

"사범학교에 들어가 나라에 충성하고 후학을 양성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군."

학비 무료, 안정적인 취업 보장, 관직 임용까지 약속하니 능력 있는 젊은이들의 지원이 속출했다.

이선과 홍영식이 알렌에게 약속한 대로, 의사 양성을 위해 필요한 제중원 의학교가 설립되었다.

제중원 의학교는 국립이지만, 미국 선교사들에게 위탁을 맡겨 실질적으로 운용하게 했다.

지석영이 교장을 맡은 제중원 의학교는 3년 과정으로, 의학뿐만 아니라 각종 외국어와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과정이었다. 교장을 제외하면 모든 교수는 미국인이었다.

"학비는 무료이며, 의학교를 졸업하면 해외 유학의 기회와 내무부 산하 의관(醫官)으로 대우한다."

의학을 천시하는 풍토를 타파하고자, 졸업자에게 유학과 특채를 약속했다. 이에 신학문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들이 지원하여, 20명의 1기 학생이 선발되었다.

교육입국은 과도기적으로 반관반민(半官半民)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기초부터 시작해나가는 과정이라, 모든 걸 국가가 책임 하기엔 재정부담이 너무 컸다.

지방에서도 개항장을 중심으로, 원산학사(元山學舍)와 같은 자발적인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학무부는 근대교육을 가르칠 사립학교 설립을 지지하고 정식학교로 인가했다.

비교적 재정이 넉넉하고 선교사들의 의지가 충만한 기독교계 학교가 잇달아 설립되었다.

1885년, 한양에서 선교사 아펜젤러가 학교를 세웠다. 임금은 신학교에 배양영재(培養永才)의 줄임말인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과 현판을 하사했다. 6명의 학생이 1기로 입학하면서 새로운 교육이 시작되었다.

관립 학교가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걸 목표로 했다면, 아펜젤러는 창립식에서 기독교계 사립학교의 지향성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관리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요,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사회에 내보내려는 것이 목표입니다."

조선에는 자유라는 개념이 희박했지만, 그러한 교육 방침은 근대적 시민을 양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므로 이선은 지지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그동안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여성 교육이었다. 지금까지 조선에는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진보적 사대부만이 가정교육을 하는 정도였다.

교육조서를 반포한 후에도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계집애가 무슨 학교를 다녀? 택도 없는 소리!"

"아, 계집이야 결혼해서 서방과 시부모 잘 모시면 되는 거지, 건방지게 뭔 학교야."

미국인 여성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은 이런 풍조를 안타깝게 여겼다.

스크랜턴이 언더우드와 함께 학무부에 여학교 설립을 제안하자, 학무독판 박정양이 시기가 이르다며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진보적인 유학자 박정양도 여성교육에는 소극적이었다.

이에 이선이 박정양을 설득해 허가하도록 했다.

"새로운 시대에는 여성의 교육도 필요합니다. 이는 서양 각국에서도 추진하는 일입니다. 나는 이미 연해주의 조선 동포들로 하여금, 신분과 성별에 무관하게 교육을 받게 한 바 있습니다."

이선은 스크랜턴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당장 국가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선교사들이 나서서 해준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적극 지지할 터이니 신입생을 모집하십시오."

이로써 1886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임금은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했다. 이는 이화학당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임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아직 사회적 인식이 무르익지 않아 최초의 신입생은 겨우 2명에 불과했지만, 조선에서 여성교육이 첫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세상의 절반은 여성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교육을 받아 재능을 도야(陶冶)하는 건 남성만의 몫이 아니라는 걸 우리가 보여줍시다."

국가 운영에 필요한 고등교육기관의 설립도 중요했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문·무관을 양성하기 위해 두 개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보빙 사절단이 돌아온 이후 미국의 대학을 모델로 근대학문을 익힐 학교를 준비했다. 1885년에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의 이름은 육영공원(育英公院)으로, '영재를 육성하는 공립학교'라는 의미였다.

"육영공원을 졸업하면 해외 유학의 기회와 각종 부처에 관직 임용을 보장한다."

현직 관료 가운데 유망한 관료를 선발하여 좌원반(左院班)을 만들어 35명을 뽑고, 25세 이하의 총명한 인재를 선발하여 우원반(右院班)으로 두 학급 70명을 뽑았다.

수업은 영어로 이루어졌고, 내용은 모두 서양 고등교육에 따른 근대 학문이었다. 교수진은 미국인으로 구성되었다. 헐버트(H. B. Hulbert), 길모어(G. W. Gilmore), 번커(D. A. Bunker) 등 미국인 교수진은 열의를 갖고 가르쳤다.

좌원반은 30세 이하의 젊은 관료들을 선발해 국가 운영에 필요한 실무를 가르치게 했는데, 그중에서도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한 학기를 마친 후, 헐버트가 가장 우수한 관리를 칭찬했다.

"홍문관 수찬 이완용의 재능과 열의가 대단합니다. 특히 어학에 상당한 재능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 이완용이라. 굉장히 영민하지요."

"그 친구 능력은 진작 알아봤지."

개화파 관료들의 칭찬에도 이선은 솔직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매국노 이완용이라. 물론 이때의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지.'

이완용(李完用)은 1882년 문과 급제자로, 이 시기에는 촉망받는 20대 신진 관료였다.

'이완용은 친일파라기보다는 친미파였고, 언제나 대세에 기울어졌던 기회주의자였지.'

이완용은 능력이 뛰어났지만 철저하게 이익에 충실한 기계적인 기회주의자였다.

'흠, 바뀐 역사에서 조선이 강성해지면 충실한 관료가 될 가능성이 있으려나?'

이선은 이완용이란 이름 석 자가 주는 본능적인 불쾌감이 상당했지만, 바뀐 역사의 이완용을 한 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이선이 부른다는 말에 이완용은 관복을 입고 외무부에 왔다.

"홍문관 수찬 이완용, 완화군 대감을 뵙습니다."

"수찬의 육영공원 성적이 훌륭하더군요. 좌원반에서 가장 뛰어나기에 치하를 위해 불렀습니다."

이완용은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황공하옵니다. 조정에서 좋은 기회를 준 덕분이지요."

"기회를 줘도 잡는 건 각자의 몫이지요."

"그 말씀이 옳습니다. 하오나 군 대감께서 이 나라에 참으로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감사는 내가 아니라 성상께 돌려야지요. 교육조서를 반포하시어 교육입국을 이루고자 함은 바로 성상이시오."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모두 지극한 성은입니다."

이완용은 깍듯이 예의를 차려 말했지만, 이선은 여전히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입견인가? 다른 유망한 관리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면 반갑게 맞이했을 터인데.'

"그래, 신학문을 열심히 익혀서 어디에 쓰고 싶습니까?"

"나라에 충성하고 성은에 보답하고자 함입니다."

이선이 피식 웃었다. 이완용이 그런 말을 하니 역설적인 기분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고, 구체적으로 말이외다."

"소생은 군 대감께서 외무부를 이끌며 조선의 국익을 지켜내는 걸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습니다. 제가 열심히 외국어와 만국공법, 국제정세를 익히는 건 장차 나라의 외교에 기여하기 위함입니다."

이완용의 대답은 마치 준비한 것처럼 매끄러웠다. 이선에게 찬사를 보내는 동시에 근대학문을 익혀 조선의 국익에 기여하고 싶다는 말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특히 영어성적이 훌륭하더군. 계속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시오. 조정에서 곧 외국에 유망한 관리들을 유학 보내려 하는데, 수찬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수 있을 겁니다."

"황공하옵니다. 학업에 더욱 열심히 매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물러나는 이완용의 뒷모습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이완용도 교육으로 바뀔 수 있을까? 오히려 이완용은 지양은 흠잡을 데가 없지만, 덕양이 문제지.'

이선은 당분간 이완용의 변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만약 바뀐 역사에서도 허튼 짓을 한다면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없을 거다.'

분명 교육은 인간의 인생을 바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바뀐 역사의 변화를 체험하는 건 이완용만이 아니었다.

조선을 휩쓰는 신교육 열풍에,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 바뀌고 있었다. 바야흐로 교육입국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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