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축출(逐出)
원세개는 민영익의 보호를 약속한 바 있었다. 민영익 체포령이 떨어지자, 즉시 항의하기 위해 경복궁을 찾았다.
"대청 상무위원이 국왕 전하를 알현하고 싶다! 어찌하여 길을 막는 것이냐?"
궁궐 무관들이 제지하자, 원세개가 버럭 화를 냈다.
"성상께서는 고뿔에 걸리시어 옥체 미령하시니, 당분간 정무를 쉬고 계십니다. 대인께서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임금이 아프다는데 원세개가 억지를 부릴 순 없었다. 결국, 원세개는 가마를 돌려 법무부와 경무청으로 갔으나, 역시나 법무독판과 경무사는 모두 출타 중이었다.
"아무래도 작정하고 나를 따돌리는 모양이군. 좋다,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원세개는 즉시 운현궁으로 향했다.
"국태공께서는 근래 편찮으시어 외부인을 접견하지 않으십니다."
운현궁의 집사인 천희연이 정중하게 방문을 거절하자, 원세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 갑자기 왕실 전체가 아프기라도 한 모양이오? 급한 일이니 뵙게 해주시오!"
"이러신다고 한들 소용없습니다."
"조선이 망해도 상관없다 이겁니까?"
원세개가 멈추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들어 대니, 결국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을 했다.
대원군을 접견한 원세개가 형식상 예를 표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원 대인, 이게 무슨 무례요? 이 늙은이가 아파서 쉬겠다는데."
"그 무슨 말씀입니까? 이토록 정정하신데."
"내 나이가 예순일곱이오. 겉보기만 그렇지, 좋은 곳이 없소. 대인도 늙어 보면 알 거요."
"아무리 늙었다 해도 국태공께서는 조선의 호랑이지요. 조선의 앞날이 국태공께 달려 있지 않습니까?"
원세개의 말은 묘하게 조롱 조였다. 대원군은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미 은퇴하여 죽을 날을 기다리는 늙은이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본론이나 말하시오."
"좋습니다. 국태공께서 아끼시는 손자가 결국 사고를 쳤습니다. 아라사와 밀약을 맺고 조선을 팔아넘기려 했지요. 국태공께서 조선의 국권을 지키기 위해 그리 노력하셨거늘, 어찌하여 그 후계자라는 손자가 이럽니까?"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다 아시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시지요."
"내가 보기에 사고는 완화군이 아니라 원 대인이 치는 것 같소이다만? 민영익이 말을 믿고 이런 일을 꾸미다니, 너무 어설프지 않소?"
대원군의 말에 원세개가 씩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민영익이 내세운 밀약의 문서가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임오년에 군란이 터졌는데, 어찌하여 국태공께서 집권하실 수 있었습니까? 대청이 이를 승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대청이 군대를 몰고 와 국태공에게 변란의 책임을 물었더라면, 결코 오늘날은 없었겠지요."
원세개의 말은 노골적으로 협박 조였다. 실제 역사에서 그렇게 진행된 바 있었고, 대원군 납치와 갑신정변 진압을 주도했던 건 원세개였다.
"가소롭구나. 네가 나를 겁박하는 것이냐? 그래서 군대라도 끌고 오겠다는 것이냐?"
대원군은 표정을 엄하게 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소위 경장과 중립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청이 용인해주었기에 조선은 멋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래 완화군과 개화당 무리들의 행태는 도가 지나칩니다. 중국의 종주권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요."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요구사항이나 말하거라."
"완화군만 물러나면 됩니다. 김옥균, 박영효와 같은 개화당 과격파들이 파직되면 더 좋지요. 그리고 주상께 정권을 돌려주십시오. 그게 모양새가 좋지 않겠습니까? 실질적으로는 국태공께서 다시 섭정하셔도 좋습니다."
임금이 친정을 선포하고, 대원군이 섭정을 다시 맡으라는 말이었다.
"그럼 완화군은 어찌하고?"
"국태공께서 아끼시는 손자이자 국왕의 장자인데, 뭐 어쩌겠습니까? 완화군이 아라사를 좋아하니, 아라사에 공사로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서양 열강과 개화파의 반발이 클 터인데?"
"그까짓 것, 대청의 힘으로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섭정을 맡게 되면 청국과 그대는 무엇을 얻나?"
"천병의 파병을 피하고, 조선이 중국과 한 몸과도 같다는 걸 만국에 알리는 것이지요."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군."
"하하,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제안이지요."
대원군이 씩 웃었다. 늙은 권력자의 욕망을 자극했다고 생각한 원세개가 따라 웃었다.
대원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원세개도 따라 일어섰다. 그때였다.
철썩!
대원군은 갑자기 원세개의 뺨을 때렸다. 노인답지 않은 완력에 원세개는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건방진 되놈 같으니, 조선이 네놈 속국으로 보이느냐? 네놈이 무엇이건대 조선의 일을 함부로 농단하러 드느냐?"
원세개는 황당하다 못해 어안이 벙벙해서 대원군을 쳐다보았다.
"이 무슨 짓이오!"
"왜, 한 대 더 때려주랴? 헛소리하지 말고 운현궁에서 썩 꺼지지 못할까!"
"대청을 이리 무시하고도 조선이 무사할 것 같소? 10만 대병이 조선으로 가기 위한 명령을 기다리고 있소!"
"같잖은 소리 하지 마라. 그까짓 허세에 속을 것 같으냐?"
"북양군의 위세가 허세로 보인단 말이오? 일본과 아라사조차 벌벌 떨고 있거늘!"
"바로 내 그 북양대신 이홍장과 회담하여 조선의 중립을 보장받았다. 네놈이 멋대로 일을 꾸며서 이 난리를 치고 있으니, 이홍장도 기분이 좋지 못할 것이다."
대원군은 차갑게 내뱉었다.
"나는 네놈과 더 할 말이 없으니, 썩 꺼지거라! 천 서방, 손님 나가신다!"
대원군의 명에 천하장안이 들어와 원세개를 강제로 운현궁 밖으로 끌어냈다.
관저로 돌아온 원세개에게 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체포령이 떨어진 민영익이 갑자기 인천으로 떠나 영국 상선을 타고 홍콩으로 도주해 버린 것이다.
"내가 보호를 약속했거늘, 왜 대청 군함도 아니고 영국 상선을 타고 도주했단 말이냐?"
민영익의 도주는 증인의 신빙성을 한없이 떨어트렸다.
"이걸 보십시오! 민영익이 아무런 잘못도 없다면, 어찌하여 갑자기 도주한단 말입니까? 원세개와 짜고 음모를 꾸몄다가, 일이 어려워 보이자 도망친 것입니다!"
이선은 역공을 퍼붓기에 적절한 기회를 확보했다.
얼마 전, 이선은 민영익과 밀담을 나누었다.
"원세개가 나와 개화당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조정 내에 동조자가 필요하겠지요. 내 생각에 반드시 민 공과 접촉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여흥 민문과 나는 본래 정적이었으니까, 이를 파고들려 하겠지요."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선은 민영익에게 러시아와 밀약을 맺었다는 역정보를 흘리라고 제의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오명을 쓰게 될 겁니다. 일단 홍콩을 경유해 미국으로 가서, 당분간 거기 머무르며 공부를 하도록 하십시오. 비용은 넉넉히 내드리겠습니다. 한 3년 정도면 잠잠해질 터이니, 그때 조선으로 불러들이겠습니다."
민영익은 고민 끝에 제의를 받아들였다.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군 대감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민 공의 충정을 잊지 않겠습니다."
"단,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민영익이 고개를 조아리며 읍소했다.
"이제 여흥 민문, 아니 외척 전체가 정치적으로 소멸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안 그래도 공의 부친을 유배에서 해제하려고 했습니다. 세자의 장인께서 유배를 지속하는 건 모양새도 좋지 않으니."
이선도 민태호의 죄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꼭 제 부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흥 민문 중에서 충성스럽고 능력 있는 자는 조정에 등용하게 해주십시오."
민영익을 제외하면 여흥 민씨는 조정에서 사라진 상황이었다.
"경장이 이뤄지는 새 조선에서, 특정 가문 출신이라 하여 배제될 이유가 없습니다. 예컨대 민겸호의 장자인 영환은 영특하니, 죄인의 아들이라 하여 가능성을 꺾을 이유가 없지요. 당장 중책을 맡길 수는 없으나, 외국 유학을 보내 신학문을 익히고 돌아오는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 말 나온김에, 민 공이 있는 곳으로 함께 보내도록 하지요."
민영익은 생각 이상으로 큰 이선의 배포에 감격했다. 민겸호는 임오군란의 책임자이자 완화군을 죽이려 한 역적으로 지목되어 참살되었다.
하지만 이선은 그 자식인 민영환과 민영찬에게 연좌를 묻지 않았고, 오히려 재기의 기회를 주었다. 민영환은 육영공원에서 수학 중이었고, 심지어 유학까지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군 대감의 관용에 진심으로 감복하였습니다. 저희는 가문과 무관하게, 나라와 성상을 위해 충성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 역시 경들의 충정을 믿어 의심치 않겠습니다."
그리하여 민영익은 악역을 자처한 것이었고, 원세개를 낚는 데 성공하자 즉시 도주해 버렸다.
각국 공사는 원세개의 주장보다 이선의 해명이 훨씬 논리적이라 받아들였다.
"이선 공이 외교적 균형을 위해 그리 노력했는데, 인제 와서 러시아와 밀약을 맺을 이유가 뭐겠소?"
"원세개가 오만무도하더니, 북양함대의 위세를 믿고 멋대로 일을 꾸민 게 틀림없소."
"평안한 조선에 문제를 일으킨 건 원세개요. 조선에서 축출되어야 할 건 이선 공이 아니라 원세개라는 걸 증명했소."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와 데니는 소위 '조러 밀약'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통렬한 문서를 작성해 각국 공사관에 보내고, 청 조정과 이홍장 앞으로도 발송했다.
이홍장은 천진에서 주청 러시아 공사 라디젠스키와 단독으로 회동했다.
"소위 밀약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황제 폐하와 이선 공의 관계는 사적으로 특별한 관계일뿐으로, 국가 간의 일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한 건, 중국의 조야에 러시아가 조선을 삼키려 한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귀국이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러시아는 조선의 주권과 중립을 존중하며, 그 영토를 침해할 의사가 없습니다."
"청국과 조선이 종주국과 조공국의 관계임도 인정하는 바이지요?"
"청국과 조선이 특수한 관계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게 조선의 내정을 간섭할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러시아 위협론이 허구라는 걸 증명하였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책임자는 소환하도록 하겠습니다. 양국 간에도 조선의 영토를 보전하고, 자주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협정을 맺지요."
이홍장과 라디젠스키의 회담은 공식 외교문서로 작성되지는 않았으나, 구두로 3개 조항을 합의했다.
1. 조선의 상황을 현상 유지하고, 장래에 변경하지 않는다.
2. 러·청 양국은 조선의 평화와 영토를 보장하며, 제3국이 그 국토의 점령을 하지 않도록 막는다.
3. 조선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장래 조선에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 조선이 자주적으로 이를 처리케 한다.
천진 조약과 유사한 러·청 합의가 이뤄지자, 총리아문은 이홍장의 편을 들어 조선 문제를 마무리 짓기로 결정했다.
그 직후, 조선이 보낸 천진 진주대원 남정철이 이홍장을 찾아 이선의 뜻을 전했다.
"조선은 청국과 불화를 빚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단지 공에 눈이 먼, 한 인물이 본분을 저버리고 풍파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 인물만 사라진다면 조선과 청국의 관계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이홍장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을 견제하라고 보낸 원세개가 오히려 이홍장의 조선 정책을 방해하는 일을 한 셈이니, 이홍장도 원세개를 더는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알겠소. 주조선 상무위원을 교체하겠소. 나는 귀국의 진의를 믿는다고 전해 주시오."
"감사합니다. 중당의 뜻을 반드시 전해드리겠습니다."
원세개는 이선을 축출하겠다는 뜻을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조선에서 축출되었다.
들어올 때의 당당한 기세와 달리, 원세개는 초라한 상태로 청국행 배에 올랐다.
"두고 보자. 반드시 조선으로 돌아와 이 원한을 갚을 것이다."
원세개는 이를 뽀득 갈았다. 여전히 자신의 잘못보다는 이선의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원세개가 조선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당장 원세개를 추천한 이홍장의 신임을 잃고, 문책을 받을 예정이었다.
원세개가 생각보다 빨리 무리하게 일을 꾸미다 제 무덤을 팠으니, 이선으로선 앓는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잘 가라, 다시는 조선에 오지 말고. 이걸로 원세개라는 이름 석 자가 역사에서 사라지길 바란다.'
실제 역사에서, 과거에 불합격했음에도 오장경의 빈객 자격으로 조선에 왔다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기회를 잡아 '조선 감국'을 자처하며 한동안 위세를 부렸던 원세개였다. 조선의 자주를 방해하면서도 일본의 침략은 막지 못했다.
하지만 원세개는 조선에서의 활동을 토대로 이홍장의 뒤를 이어 북양군의 수장에 올랐고, 마침내 최고 권력에까지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옛 은인과 동지들을 배신하고, 광서제를 배신하고, 청조를 배신하고, 마지막으로는 혁명과 공화국까지 배신했다.
중국의 황제가 되겠다는 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달성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 결과 국가는 거듭 배신당했다.
바뀐 역사에서는, 조선에서 축출된 원세개에게 그런 기회조차 박탈될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