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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149화 (149/812)

148화 갈등

초대 프랑스 주재 조선 공사 김옥균은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 사디 카르노(Sadi Carnot)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외교관으로서 소임을 시작했다.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없었고, 유일한 갈등 사유였던 가톨릭 전교 문제도 무난히 넘어감에 따라 김옥균의 외교관 생활은 평탄했다.

이선이 김옥균에게 내린 지침은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 정계는 독일에 대한 복수를 위해 러시아에 접근하고 싶어 하오.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고립 전략에 따라 정치적 접근은 못 하고 있지만, 근래 들어 러시아에 대한 투자가 부쩍 늘었지. 러시아 황제와 나의 특수한 관계가 프랑스에 관심을 끌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오. 유럽 금융시장의 중심이자 대외투자에 적극적인 프랑스 자본가들에게, 조선에 대한 투자나 차관 가능성을 탐지해보시오."

프랑스는 보불전쟁 패전 이후의 혼란을 딛고, 경제가 회복되는 1880년대 후반부터 이른바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절)라 불리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아니, 유럽 전체가 벨 에포크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이선은 그 번영의 일부를 조선으로 끌어들이길 희망했다. 대외투자에 적극적인 프랑스 자본은, 미지의 국가인 조선에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근래 들어 미국 자본이 조선에 투자하는 게 상당한 흥미를 끌고 있는 듯 했다.

김옥균은 프랑스 정재계 인사들과 사교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업무에 충실하는 중국이나 일본 외교관들과 달리 김옥균은 사교생활에 거리낌이 없었다.

사교성이 뛰어난 김옥균은 조선에 있을 때도 서양 외교관들과 속을 터놓을 정도의 절친한 관계였다. 프랑스에 오기 전부터 열심히 프랑스어를 익히고, 서양 문화를 연구한 김옥균은 프랑스 사교계에서도 환영받는 인사가 되었다.

"나는 늘 조선이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길 바란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했습니다. 직접 프랑스에 오고 나니,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 프랑스에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김옥균의 아첨에 가까운 칭찬은,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인들을 만족시켰다.

"하하, 공사께서는 식견이 탁월하시군요."

"프랑스는 정말로 아름답고 위대한 나라입니다. 프랑스 남성들은 세계에서 가장 멋지고, 여성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입니다."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는 프랑스답게, 파리 부르주아지의 옷차림은 하나같이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식견만 탁월한 게 아니라 보는 눈도 정말로 높으시군요, 하하하!"

김옥균은 '빛의 도시' 파리의 온갖 생활을 다 즐기고 다녔다. 그 과정에서 여러 정재계 인사들과 절친한 관계를 맺었고, 심지어 유흥업소에 다니며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공사관 직원들을 제외하면 파리의 유일한 조선 교민이자 유학생인 홍종우는 김옥균의 행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홍종우는 작정하고 오페라 극장에 있는 김옥균을 찾아갔다. 한복 차림의 홍종우는 만인의 주목을 받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때마침 1막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단발하고 양복을 입은 김옥균과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홍종우는 복장만으로도 대비가 되었다.

"공사께서는 프랑스에 어떤 목적으로 오신 겁니까?"

"당연히 외교를 하러 왔지요."

"그런데 어찌하여 프랑스인들과 놀러 다니는 데 여념이 없단 말입니까? 공사께서 쓰는 돈은 모두 조선의 돈이 아닙니까?"

김옥균이 술잔을 놓고 답했다.

"프랑스인들은 유희와 사교생활을 즐긴다고 합디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익숙해지려고 하는 거요."

"우리는 조선인입니다. 서양인이 아닙니다. 왜 저들과 똑같이 되려 하십니까?"

홍종우는 김옥균의 서양인이나 다름없는 복색, 즉 단발과 양복 차림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왜 홍 선생은 프랑스까지 와서 한복과 갓을 고수하는 거요? 그렇게 주목을 받고 싶소?"

"내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프랑스에 조선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홍종우가 정색하자, 김옥균도 똑같이 정색했다.

"우리는 서양을 배우러 왔소. 서양의 기술, 제도, 정치, 경제, 사상, 문화 모두. 저들의 성공사례를 받아들이려면, 우리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변화해야 하오. 단발과 양복이 대수겠소? 머릿속까지 철저하게 뜯어고쳐야지."

김옥균의 급진적인 발언에, 홍종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조정을 이끄는 고관의 입에서 조선의 전통을 저버리자는 말이 어떻게 이리 쉽게 나올 수가 있습니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지. 나는 프랑스의 국민개병과 국민교육, 의회제를 조선에 접목시키고 싶소. 프랑스처럼 모든 조선 아이들은 국립학교에 가고, 군대에 가야하오. 양반·상놈 구분 없이, 모두 평등하게 말이오!"

김옥균은 프랑스 제3공화국의 국민교육과 국민개병을 조선에서 도입해야 할 선결 과제로 꼽았다. 본래부터 조선 사회의 '평등'을 개화당의 목표로 내걸었던 김옥균이니만큼, 프랑스의 '평등'한 국민동원에 크게 공감했다.

이선은 1890년을 목표로 조선의 국민교육과 국민개병을 추진했고, 김옥균은 프랑스를 모델로 하는 사례 조사도 맡고 있었다.

"공사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결코 우리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조선인의 영혼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조선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서양인이 되려 한다 한들, 우리는 결코 저들이 될 수 없습니다. 조선의 혼을 지켜가며, 서양을 흡수해야 합니다."

"홍 선생의 말이 틀렸다고는 하지 않겠소. 하지만 내가 추진하는 방향과는 좀 다른 것 같군. 나는 최대한 이른 시일 내로 조선이 개화하길 바라오. 그러기 위해선 전통의 희생은 불가피하오."

김옥균과 홍종우는 똑같이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꿈꾸었지만, 현격한 방향성의 차이를 느꼈다. 하지만 당장은 그 차이가 대립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튼, 프랑스에 온 이상, 저들의 방식을 철저히 이해하고 연구하려고 합니다. 피차 각자의 영역에서 잘해 보도록 합시다."

김옥균은 홍종우에게 서양식으로 악수를 청하고, 프랑스인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홍종우는 멀어져가는 김옥균의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초대 러시아 주재 조선 공사 박영효는 상당한 환대를 받으며 외교관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짐은 조선이 러시아에 상주 외교관을 파견한 걸 기쁘게 생각하고 있소. 앞으로도 양국의 관계가 우호와 평화로 가득하길 기원하는 바이오."

알렉산드르 2세의 환영에 박영효는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양국 우호의 기틀 위에서, 조선은 자주독립을 지켜나갈 것입니다."

이선의 공으로 러시아 황실은 조선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박영효는 그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공사께서는 조선 공주님의 부군(夫君)이 된다지요?"

황제의 손자, 니콜라이 대공과 황태자비 마리야가 박영효를 반갑게 맞이했다.

"예, 선왕의 사위가 됩니다."

철종의 부마(駙馬)로 자신의 신분에 대해 자부심이 있는 박영효였다. 비록 부인 영혜옹주(永惠翁主)는 결혼 3개월 만에 병사하여 후사는 얻지 못했지만, 박영효는 정1품 부마도위의 예우를 받았다. 본래 부마는 부인이 죽어도 재혼이 불가했지만, 임금은 12살에 홀아비가 된 박영효를 딱하게 여겨 궁녀를 보내 후실로 삼게 했다.

"그럼 조선의 고위 귀족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그에 맞는 예우를 해드리는 게 맞겠습니다."

"황공할 따름입니다."

박영효는 러시아의 예우에 크게 만족했고, 러시아와의 외교를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공사가 부임함으로써 러시아와 조선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졌으니,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조선의 부마' 박영효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사교 매너도 세련되어 러시아 사교계에서도 환영받는 인사가 되었다.

박영효는 러시아 고위 귀족으로 예우를 받았고, 박영효 본인도 이선으로부터 지침을 받은 바가 있었다.

"러시아는 전제군주제입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황제와 대신, 황족과 그 측근들이 모든 정사를 결정하지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 황제 및 정계 인사들과 가까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선의 명대로, 박영효는 조선의 외교 정책을 총괄하는 이선과 알렉산드르 2세 사이에서 충실한 전달자 역할을 했다.

1886년 육로 통상 조약의 체결 후에도 러시아와 조선 사이에 경제적인 관계는 적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의존도를 갖고 있었다.

조선의 중립과 자주독립을 지지하고, 조선에 야욕을 갖는 주변국을 견제하는 나라로 러시아만 한 나라가 없었다.

이는 이선과 알렉산드르 2세의 특수한 관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지만, 러시아와 조선 간에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점이 더 중요했다.

아직 극동에 미치는 힘이 미약한 러시아는, 청이나 일본이 강해져서 러시아와 대립하길 원치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조선이 자주독립을 지키고 주변국에 흡수되지 않아야 한다.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조선이 스스로 강해져서 청국과 일본을 견제하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알렉산드르 2세의 극동 정책은 이와 같은 기조로 진행되었다.

1881년의 암살을 면한 후, 알렉산드르 2세는 국내 정책에도 변화를 주었다. 젬스트보(지방의회)의 대표성을 강화하여 대의제를 일부 허락하고, 전제군주제의 견제장치를 만들었다.

차르와 고관에 대한 테러리즘으로 대표되는 급진 혁명가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혁명운동은 된서리를 맞았다.

이후 급진파가 배제되어 인민주의자들은 대개 온건한 농민운동으로 전환했고, 산업화의 여파로 서유럽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가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맹아 단계인 사회주의는 아직 주목받는 세력이 아니었다.

특히 지난 6년간 어떠한 테러 기도가 사라지자, 알렉산드르 2세는 자신의 통치에 만족하며 경계심을 놓았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이 테러라는 고유의 방식을 완전히 폐기한 건 아니었다.

1887년 3월 1일(그레고리력 13일), 이날은 황제가 암살을 면한 지 꼭 6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황제는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신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테러를 면한 바로 그 자리에 성당을 지었다. 이른바 '피의 구세주 성당'이었다.

매년 3월 1일이 되면 황제는 황실 가족들과 함께 피의 구세주 성당으로 가서 감사기도를 올렸다.

올해 행렬에는 특별한 손님도 있었다. 황제는 암살을 막은 이선의 공을 잊지 않았고, 이선을 대리해 공사 박영효를 초대했다.

"짐은 이선 공작과 그 가신들의 공로를 잊지 않고 있소. 공사가 공작 대신 참석해 주었으면 하오."

"황공하옵니다.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

황제와 황실 일가를 태운 마차가 순차적으로 성당을 향해 움직이고, 박영효와 외빈을 태운 마차가 행렬의 마지막에 움직였다.

박영효는 황실 행렬의 화려함, 아직 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웅장한 모습, 피의 구세주 성당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박영효와 외빈을 태운 마차를 끝으로 일행이 모두 목적지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 일원이 일제히 늘어선다.

지난 5년간은 혹시나 있을 테러에 대비해 엄격한 경비 속에 비공개로 진행되었지만, 자신감을 되찾은 황제의 명으로 올해는 공개적으로 성대하게 행사가 열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황제의 생존을 기뻐하는 의식에 참여하여 환호를 보냈다.

"신이여, 황제를 보호하소서!"

"황제 폐하 만세!"

장중한 러시아 국가가 연주되고, 신민들의 환호에 단상 위의 황제는 모자를 벗어 정중히 화답했다.

뎅- 뎅- 뎅.

12시 정오가 되자 성당에서 웅장한 종소리가 울렸다. 황제 이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종탑의 시계로 향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갑자기 행렬에서 뛰쳐나와, 품 안에 있던 무언가를 힘껏 던졌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근위대가 제지하려 할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쾅!

"으아아악!"

"꺄아아악!"

비명과 함께 단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떠밀려 튕겨 나갔던 박영효는, 다행히도 자신이 무사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신의 안전이 아니었다.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황제는 피투성이였다. 그 끔찍한 몰골에 사람들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짐은······. 괜찮다······. 어, 어서 황궁으로······."

"폐하를 어서 모셔라!"

극도의 혼란 속에서 피투성이 황제는 급히 겨울궁전으로 후송되었다.

암살을 면한 황태자 알렉산드르 대공은, 즉각 비밀경찰을 동원해 암살자들에 대한 체포 작업에 들어섰다.

암살 조직은 곧이어 정체가 드러났다. '인민의 의지(Narodnaya Volya)', 즉 6년 전 황제 암살을 획책했던 바로 그 급진 인민주의 파벌의 재건 조직이었다.

6년의 시차를 두고, 황제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결국 실현된 것이다.

폭탄을 던진 암살자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생 바실리 오시파노프(Vasili Osipanov), 강력한 위력의 폭탄을 제조한 자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우수한 화학도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Aleksandr Ulyanov)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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