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50화 (150/812)

149화 필연과 우연

1887년 3월, 조선에서는 최초의 철도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이 철도는 한양과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철도(京仁鐵道)였다. 러시아식 광궤나 일본식 협궤가 아닌, 국제 기준인 표준궤로 부설할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 기술자들이 초빙되었다.

조속한 철도 부설을 원하는 조선과, 조선에 진출을 원하는 미국 자본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조-미 합작 회사인 조선기계 주식회사가 출범했다. 회사는 철도, 전기, 상수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경인철도를 시작으로, 조선 방방곡곡에 철마가 달리게 될 것입니다."

노량진에서 열린 기공식에는 내·외빈이 참석하여 축하했다. 난구간인 한강 철교 구간은 뒤로 미루고, 일단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공사를 완료하기로 했다.

'근대의 상징인 철도를 통해 신속한 근대화를 보여줄 것이다.'

경인철도는 실제 역사보다 10년 빠른 부설이자, 일본에 의한 타율적 근대화가 아닌 조선에 의한 자율적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철도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근대화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기공식을 마친 직후, 이선은 박영효가 보낸 전문을 받았다.

"군 대감, 아라사에서 온 급보입니다."

전문을 읽던 이선의 표정이 흔들렸다. 주위 관료들이 놀라서 물었다.

"아라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시급한 변고가 있소. 자세한 이야기는 외무부에서 이어나갑시다."

이선은 심각한 표정으로 속히 외무부로 돌아갔다.

1887년 3월 13일(러시아력 3월 1일), 황제 알렉산드르 2세 피격. 피격 직후 황제는 급히 겨울궁전으로 후송되었으나 그 날을 넘기지 못하고 붕어(崩御). 현재 수도의 상황은 극히 혼란스러움. 상황 변화에 따라 계속 보고하겠음.

알렉산드르 2세는 재위 32년, 향년 68세로 서거했다. 러시아의 대개혁을 이끈 군주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황망한 최후였다.

예상치 못한 일에 이선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이럴 수가 있나. 알렉산드르 2세가 결국 암살로 죽을 줄이야. 결국, 암살이 필연이었나? 내가 막은 암살은 겨우 6년을 미뤘을 뿐인가?'

전문은 시간별로 계속 쏟아졌다.

14일, 황태자가 제위를 계승했음. 피격 당일은 극도로 혼란스러웠으나, 황태자의 지휘 아래에 수도는 평온을 되찾음. 범인과 배후 조직은 조속히 검거됨. 주모자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급진파로······

이선은 후속 전문을 통해 범인의 이름을 보고 더욱 놀랐다.

'알렉산드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즉 레닌의 형? 실제 역사에서는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미수 사건으로 처형됐지. 그래서 블라디미르도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허, 결국 울리야노프가 차르를 잡는 데 성공했군.'

이선은 지독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꼈다.

'이게 바로 역사의 복원력인가? 그렇다면 내가 바꾼 역사도 그대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으나,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역사에 필연이란 없다. 바뀐 역사의 복원력이란 것도 없어. 그저 우연일 뿐이다. 테러리즘이 러시아 급진파들 사이에서 뿌리 깊이 박혀 있는 탓이지.'

이선은 알렉산드르 2세의 부재 이후를 고민해야 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자신과 상부상조의 관계였다. 이선이 차르의 생명을 구해 러시아의 대개혁이 지속하도록 했고, 차르는 이선에게 연해주 고려인의 자치권을 맡겨 조선으로 돌아가 개혁을 시행할 원동력을 주었다. 이선이 정권을 잡고 조선의 중립과 자주독립을 지키려 할 때도, 차르는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다.

하지만 새로 즉위할 알렉산드르 3세에게 특별한 관계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 할 때가 왔군. 차르의 생명이 무한하지 않을 바에야, 어차피 각오했던 바가 아닌가. 당장 조선을 둘러싼 구도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황제 한 사람이 바뀐다고 해서 크게 변화할 일은 없었다.

'오히려 러시아나 일본이 문제지. 그런 점에서 조선은 테러 걱정은 적어서 다행이군.'

러시아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에 배제되고 좌절한 사무라이나 급진주의자들이 테러리즘의 길을 택했다. 메이지 정부의 1인자인 오쿠보 도시미치가 불평 사족에게 대낮에 암살되고, 자유 민권운동이 좌절되고 급진화되면서 정부 각료에 대한 테러 기도가 빈번히 있었다.

그에 비하면 조선은 무풍지대였다. 홍영식과 김옥균에 대한 암살 미수가 한 차례 있었으나, 그 외에 별다른 동요는 없었다. 조정이 군사력과 경찰력을 독점한 덕도 있었지만, 불평세력이 무기를 잡을 정도로 과격한 상황으로 몰리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선은 즉각 러시아 공사관을 찾았다. 검은색 상복을 입은 베베르는 침통한 표정이었다. 이선은 최상의 예우를 갖춰 조문했다.

"황제 폐하의 갑작스러운 붕어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 신민들뿐만 아니라, 저와 조선 국민들 역시 폐하의 붕어를 마음 깊이 슬퍼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각하의 말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러시아와 조선이 우호를 만대에 이어나가는 것이야말로, 황제 폐하의 유지(遺旨)를 잇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와 조선은 가장 힘들고 슬플 때에도 귀국과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본국에 꼭 그리 전하겠습니다. 러시아는 각하와 조선의 호의를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조문을 마친 이선은, 조선 국왕의 명의로 된 장문의 추도문을 작성해 러시아에 전문으로 보냈다.

추도문을 받은 박영효는 황태자 알렉산드르, 아니 새 황제 알렉산드르 3세에게 전달했다. 새 황제는 극히 비통해 보였지만, 정중한 예의를 갖추어 추도문을 받았다.

"러시아와 슬픔을 같이 하려는 귀국 국왕 폐하의 마음을 결코 잊지 않겠소."

"황공하옵니다."

박영효는 선제(先帝)의 유해 앞에 허리를 깊게 숙여 조의를 표했다.

유학의 나라답게 죽은 자에게 경의를 표하기로는 조선만큼 갖추는 나라도 없었고, 국왕과 이선, 공사 박영효 등이 잇달아 최상의 예를 표해 애도를 표하니 러시아 측에서도 감격할 정도였다.

차르 암살의 충격은 전 러시아를 덮었다. 혁명가들이 기대했던 급진적 혁명의 분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우리 어버이 차르께서 돌아가셨다!"

농노해방과 대개혁으로 인해 알렉산드르 2세는 여전히 '해방자 차르'로 통했다.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개혁의 성과가 떨어져 유대감도 점차 사라졌지만, 비참하게 테러로 죽자 추모의식이 전국을 물들었다.

"페테르부르크의 대학생 놈들이 범인이라는군. 이런 은혜도 모르는 놈들!"

1881년 테러 미수 이후로는 정치개혁에 나섬에 따라 자유주의자도 체제 내로 포섭한 상황이고, 일부 급진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차르의 통치에 큰 불만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반역의 배후에는 틀림없이 유대인이 있다! 유대인은 러시아의 위대함을 원하지 않는다!"

분노의 화살은 엉뚱하게 유대인을 향했다. 러시아 각지에서 포그롬(Pogrom)이 일어나 유대인을 덮쳤다. 포그롬이 폭동의 상황에까지 확산할 분위기를 보이자 그때야 경찰들이 단속에 나섰다.

볼가 강변에 있는 도시, 심비르스크(Simbirsk).

심비르스크의 울리야노프 가문은 신흥 귀족 가문이었다. 일리야 울리야노프는 존경받는 교육자로, 당대에 관료제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세습 귀족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1886년 일리야가 갑작스럽게 죽은 건 가족의 비극이었지만, 그래도 울리야노프 가문의 몰락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미래가 촉망받던 장남 알렉산드르가 전 러시아를 충격에 빠트린 차르 암살의 주모자로 지목받으면서, 울리야노프 가문은 완전히 몰락하고야 말았다.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우수한 화학도였던 알렉산드르는 인민의 의지 급진파에 가담했고, 차르 암살에 필요한 폭탄을 제조했다.

"나의 행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차르에게 어떤 개인적인 감정도 없다. 그러나 러시아가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전제군주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그 수뇌를 제거해야 한다. 나는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나의 피가 미래의 혁명에 기여하길 바란다."

체포된 알렉산드르는 혐의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종일관 당당했다.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는 주모자 5인과 함께 페테르부르크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교수형 당했다.

알렉산드르의 처형 이후, 울리야노프 가문은 완전히 불가촉천민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다. '대개혁'의 사법개혁에 따라 반역죄라 할지라도 연좌제는 적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따가운 시선과 사회적 차별은 면할 길이 없었다.

졸지에 가장의 역할을 맡게 된 17세의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는 김나지야(인문계 중고등학교)의 우수한 학생이었다. 차르 암살과 형의 죽음에도 블라디미르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고, 김나지야 졸업 시험도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김나지야 교장 케렌스키(Kerensky)가 극찬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어떤 대학도 '반역자의 동생'에게 입학 허가를 내주기를 꺼렸다.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최종 심사 단계에서 모두 탈락하고야 말았다.

"반역자가 무슨 대학이야? 대학에 가서 또 반역을 획책하려고?"

"심비르스크에 사는 것만으로도 황제 폐하의 은혜지."

"반역자를 키운 집안도 반역자지! 전부 시베리아로 보내 버려야 해!"

사람들은 울리야노프 가문에게 공공연히 모욕을 주고 천대했다.

울리야노프 가문 사람들은 의연히 버텼지만, 똑똑하고 자존심 강한 블라디미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는 걸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웠다.

"형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거야. 형은 다른 식으로는 행동할 수 없었던 거겠지."

블라디미르는 자신과 가족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게 한 형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알렉산드르가 인민주의 노선을 택했다면 블라디미르는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블라디미르는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우리 가문은 러시아에서 어떠한 미래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 박해를 감내하며 비참하게 살던가, 아니면 다른 나라로 이주해 새로운 길을 찾던가 해야겠죠. 저는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블라디미르의 어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차남의 앞날마저 망치길 원치 않았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원하는 대로 하거라."

어렸을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은 데다 총명한 블라디미르는,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유창했다.

블라디미르가 자발적으로 해외 유학을 희망하자, 대학 진학을 방해하던 당국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국은 잠재적 위험분자가 알아서 나가준다니 환영하는 모양이었다.

"유럽에서 정통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길 희망합니다."

블라디미르는 주변국 중에서 비교적 검열이 약하고,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택했다. 비스마르크 지배하의 독일에서는 사회민주당을 탄압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느슨하게 허용해주고 있었다.

해외 출국을 허가 받은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헝가리령 크라쿠프에 도착했다. 블라디미르가 먼저 정착에 성공하면, 가족들도 모두 이주할 예정이었다.

"차르의 러시아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으리라."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와 러시아의 관계는 실제 역사보다 빨리 단절되었다. 현재로선 블라디미르가 러시아 급진조직이 가담할 일도, 시베리아에 유배될 일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지도부가 될 가능성도 희박했다.

1887년, 세계사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요동을 쳤다.

"짐은 신성한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서, 오직 신과 조국 앞에서만 책임을 다할 뿐이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과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알렉산드르 3세는 부친의 개혁정책을 폐기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계획했던 두마(의회) 선거는 무한정 연기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는 만기가 다가온 독-러 재보장 조약을 연장했지만, 농업 관세를 일방적으로 올려버리고 러시아 투자를 제한한 독일의 태도에 실망했다. 프로이센 융커들의 압력에 비스마르크가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양보를 포기한 것이다.

대신 프랑스가 러시아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리면서,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자본의 대규모 투자를 받게 된 알렉산드르 3세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 러시아의 숙원 사업을 실행으로 옮길 생각을 했다.

바로 역사적인 대사업,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시선은 동쪽으로 향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