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53화 (153/812)

152화 부국강병(富國强兵)

이선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하오나 이는 비스마르크 재상의 정책과 반대되는······."

이선이 일부러 조심스러운 어조로 답하자, 빌헬름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이 나라의 황제는 짐이오! 짐이 그런 결정조차 내리지 못하겠소?"

황제라는 자의식이 강한 20대의 빌헬름에게, 노(老)재상 비스마르크도 그의 가신에 불과했다. 이선이 그걸 자극한 것이다.

"폐하의 배려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과연 폐하께서는 탁월한 결단력을 지니고 계시군요."

"군주에게 결단력은 중요한 덕목이지."

"그렇습니다. 제가 감사의 뜻으로 동양 정세에 대해서 폐하께 고하고 싶습니다만."

"좋소. 말씀해 보시오."

이선은 조선, 청국, 일본 등 동양 정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청산유수와도 같은 그의 언변은 카이저의 관심을 끌었다.

비스마르크의 유럽 중심 정책에 따라 독일은 다른 열강과 비교해 식민지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빌헬름은 달랐다. 빌헬름은 '세계 제국'을 꿈꾸었고, 동양은 그의 야망과 허영심을 자극했다.

"흥미롭군. 아주 흥미로워. 왜 니콜라이가 조선 왕자를 그토록 칭찬했는지 알 것 같소."

"황공하옵니다."

"왕자의 말처럼 독일 외교관이 귀국의 내정고문관으로 있고, 다수의 독일인 전문가들이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독일이 조선에 대해 이토록 무관심했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소."

"재상께서는 국제 정치의 중재자이시니······."

비스마르크에 대한 비교가 빌헬름을 또다시 자극했다.

"아니, 유럽에서는 그렇다 쳐도 동양에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나. 조선이 그토록 독일을 본보기로 열망한다면, 최소한 일본하고는 동등한 대우를 해 줘야지.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보시오."

"앞으로 여러 학문 영역에서 독일인 교수들을 조선으로 보내고, 조선인 유학생을 독일 대학에서 공부시켰으면 합니다. 조선의 수재들이 독일의 선진적인 학문을 익히게 해 주십시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군. 군사고문단과 교수진을 물색해서 보내겠소."

"감사합니다. 독일의 우수한 군제를 받아들이고 뛰어난 학문을 흡수한다면, 조선 또한 독일처럼 부국강병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을 거듭 본받고 싶다는 이선의 말에 빌헬름이 만족감을 표했다.

"하하, 좋지. 그렇게 되길 바라겠소."

카이저는 군부와 교육부에 명해 군사고문단과 교수진의 파견을 명했다. 그의 즉흥적인 지시는, 비스마르크와 정부 인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빌헬름은 고집을 부렸고, 결국 비스마르크가 한발 물러섰다.

"폐하께서 황제가 되었으니 뜻대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 보군. 동양의 왕자와 함께 병정놀이 하는 게 소원이라면, 이 늙은 가신이 받아들여야지."

비스마르크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만약 카이저가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라면, 그도 절대 용인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동양의 작은 나라인 조선에서 영향력을 늘리고 싶다는 정도의 정책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카이저의 명을 받은 독일 참모본부는 일본에 파견된 멕켈 소령의 군사고문단에 조선행을 제안했다. 멕켈은 1888년을 끝으로 계약이 종료되어 독일로 막 돌아왔다. 하지만 멕켈이 다시 동양으로 가길 고사함에 따라, 새로운 인물이 물망에 올랐다.

바로 프로이센 육군대학의 전술학 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소령이었다. 41세의 힌덴부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참전 경험과 전술적 재능을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호오, 힌덴부르크라. 고든 다음으로 쓰기에 충분한 이름값이군.'

이선은 후일 1차 세계대전의 국민적 영웅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힌덴부르크가 조선의 군사고문단을 맡길 희망했다.

힌덴부르크 역시 멀리 조선까지 가는 것에 난색을 드러냈으나, 카이저가 직접 그를 불러 설득했다.

"폰 데어 골츠(von Der Goltz)가 오스만군의 개혁을 이끌고, 멕켈 소령이 일본군의 혁신을 이끌었듯이, 경 또한 조선군의 교육자가 되어주시오. 영국인 고든보다 독일 장교가 더 뛰어나다는 걸 보여주었으면 하오."

영국에 대한 경쟁심이 강한 빌헬름에게 영국 장교의 후임으로 독일 장교가 간다는 건, 독일의 우월함을 보여줄 기회였다.

"폐하의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은 독일 참모본부와 힌덴부르크를 단장으로 하는 군사고문단 초빙을 체결하고, 교육부와 교수 파견 및 유학생 협정을 맺었다.

이외에도 세계 최대 군수공업 회사인 크루프(Krupp)사로부터 최신 야포 수입 계약을 맺었다. 독일의 우수한 무기 제조기술로 인해, 청국과 일본 또한 주요 수입국이었다.

'독일이라면 그 어떤 나라도 반대할 이유가 없지.'

이선이 각종 협력의 대상으로 독일로 방향을 튼 건, 현시점의 독일이 프랑스를 제외하면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러시아와 아직까지는 동맹 관계였고, 영국도 우호적으로 생각했다. 미국은 본래 중립적인 국가이니 이의를 제기할 리 없었다. 청국과 일본도 독일에서 무기를 수입하고 군사고문단을 초빙하니, 독일의 영향력 증대를 이상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단기간에 여러 가지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이선과 조선 사절단은 귀국 길에 올랐다.

1888년 가을. 이선이 조선으로 귀국하자 예전과는 다른, 개항지 인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낡은 포구에 제대로 된 접안 시설조차 없어, 대형 기선은 외해에서 멈춘 다음에 작은 배로 접안해야 했다.

하지만 접안 시설을 소규모나마 완비한 현재는 여러 나라의 기선들로 인천항이 북적거렸다. 조선 정부와 민간 소유의 기선도 부쩍 증가했다. 이들은 운송과 무역을 담당했다.

인천에서 노량진까지는 철도가 준비되었다. 이선이 막 귀국할 무렵, 인천-노량진 노선이 개통한 것이다. 난공사에 해당하는 한강 철교 건설이 늦춰짐에 따라 한성까지의 완공은 아니었지만, 인천-노량진 구간 33.8km의 완성에 맞춰 경인선 임시 개통이 이뤄졌다.

1888년 9월 18일, 경인선 개통을 선언하는 성대한 기념행사가 인천에서 열렸다.

"대조선국의 철도 역사는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한양을 출발한 기차는 압록강을 넘어 청국으로, 부산을 지나 일본으로,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로 달릴 것이며, 물류의 대동맥이 될 것입니다."

일본 철도가 1872년에 최초로 개통하고, 중국 철도가 1881년에 최초 개통된 데 이어 조선 또한 철도 보유국이 된 것이다.

이선과 조정 대표단은 경인선 객차의 귀빈석에 앉았다.

뿌우-!

기차 탑승 경험이 많은 이선으로선 놀라울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증기기관차가 특유의 경적 소리를 울리며 출발하자 승객과 구경꾼들은 깜짝 놀라 했다.

"움직인다, 움직여!"

"세상에, 이렇게 빠를 수가 있단 말인가!"

"인천과 한성을 한 시진도 안 돼서 연결한다니 원."

인천에서 노량진까지는 1시간 40분이 걸렸는데 시속 20km도 안 나오는 속력 때문이었다. 이선은 하품이 나오게 하는 속도에 낭만을 느끼며 차창 밖을 보았다.

하지만 이제까지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하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혁신이었다.

철로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철마의 움직임에 감탄했다.

"철마다! 철마가 달린다!"

"저 시커멓고 육중한 게 어찌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나?"

"순식간이네, 순식간이야!"

"우와아아아!"

새로운 문물의 출현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감탄했지만,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며 열광했다.

"아부지! 나도 철마 태워줘요!"

"야 이놈아, 한양 갈 일이 있어야 타지. 저거 한번 타는데 쌀이 얼만지 알어?"

"쳇!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매일 타고 다녀야지."

철도의 출현은 가장 상징적으로 눈에 보이는 근대의 체험이었다. 근대의 상징인 철마가 달려 전근대의 낡은 시간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경인선은 시작에 불과했다. 조정의 구상대로 경의선, 경부선, 경원선, 경라선이 한반도를 X자 형태로 연결될 예정이었다. 철도 부설에 필요한 재원 확보와 측량, 토지 확보가 착착 진행되었다.

철도는 이주를 촉진하여 교통과 상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군사적 목적도 있었다.

'징병제 이후 대규모 병력을 단기간에 소집시켜서 이동시키려면 역시 철도만 한 게 없다. 해군력이 절망적인 조선은 더욱 철도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지.'

프로이센의 승리 요인 중 하나가 철도라 평가받을 정도로, 독일은 철도의 군사적 활용에 주목했다. 독일 참모본부 산하 철도국은 핵심 부서였다. 독일 군사고문단에게 철도의 활용도 배워둘 필요가 있었다.

프로이센과 일본이 그러했던 것처럼, 갑신경장 이후 조선의 국가적 과제는 부국강병이었다.

'부국강병 중에 부국은 단기간에 달성하기 어렵겠지만, 강병만큼은 반드시 단기간에 이루고 만다.'

갑신경장 이후 조선의 세수는 크게 증대했으나, 그만큼 지출도 커져갔다. 특히 군사비에 들어가는 비용이 막대했다. 전체 예산의 4할에 육박할 정도였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국방을 중시하는 나라가 아니라서, 갑작스러운 군비 증대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열강에 의한 중립이 보장되었는데도 왜 국방력 강화에 돈을 쏟아 붓느냐는 중추원 일각의 비판에 이선은 단호하게 답했다.

"말뿐인 중립과 자주독립은 절대 보장되지 않습니다. 오직 실질적인 무비(武備)를 보유하고 있을 때, 국가의 자주독립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조정의 절대다수는 국방력 강화에 공감하고 있었으므로, 군비 증대는 착착 진행되었다.

1888년, 연무공원 1기 생도가 2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여 장교로 임관을 했다. 중도 탈락이 적지 않아, 총 120명이 장교 임관까지 마쳤다. 이들은 전원 종6품 참위(參尉)로 임명되었다.

기존의 무과 장원급제와 동등한 대우였다. 출신에 무관하게, 모든 수료자에게 무관직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신(臣)은 영예로운 조선군의 무관으로서, 몸과 마음을 바쳐 대군주와 조국을 위해 충성을······."

1기 수석 졸업을 한 이회영이 생도 대표로 연설을 마치자, 이선이 직접 관직 증서와 참위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신식 군사학을 익힌 120명의 초임 장교는, 소대장부터 시작해 신생 조선군의 기간(基幹)이 될 것이었다. 이들이 점차 낡은 군부를 대체할 예정이었다.

1기 생도의 졸업 이후, 연무공원에 변화가 이뤄졌다. 독일 군사고문단의 입국에 맞춰 학제 개편에 나선 것이다.

연무공원의 이름은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로 개칭되었다. 당장은 장교 수급이 시급함에 따라 2년제를 유지했지만, 향후 상황에 따라 3년제로 바꿀 예정이었다. 군사고문단과 교관단이 영국과 미국에서 독일로 교체될 예정에 따라, 독일식 교리를 익히게 되었다.

이윽고 조정은 해군 사관생도도 양성하기로 결정했다.

강화도에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 통칭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이라 불리는 해군사관학교도 설립되었다.

1889년부터 사관생도 100명, 수병 500명을 모집해 영어, 군사학, 항해학, 포술학 등을 가르치기로 했다.

현재 세계 최강의 해군국은 영국이니만큼, 통제영학당에는 영국 해군 장교들이 초빙되었다. 이선의 부탁을 받은 고든이 영국 정부를 설득하여, 유능한 해군 장교들을 조선으로 교관으로 보내게 했다.

'해군을 양성하고 싶지만, 정말 돈이 많이 들지.'

조선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근대적 해군이 전무했다. 해군은 육군보다 훨씬 막대한 비용과 전문성이 있어야 했고, 이는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이 어떻게 용을 써도 북양함대와 일본 해군은 못 따라간다. 현재로선 연안 방위에 필요한 소규모 해군 건설에만 주력한다.'

청국 북양함대는 아시아 최강이라는 전력을 갖췄고, 일본 연합함대 또한 이를 따라잡기 위해 본격적인 건함경쟁에 들어섰다. 조선이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신생 조선 해군은 포함과 어뢰정 몇 척만을 구입할 예정이었다. 그나마도 우선순위는 육군에 한참 밀렸다. 국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육군에 비하면 초라한 출발이지만, 근대적 해군의 첫발을 떼게 되었다.

군비 증대는 다방면으로 진행되었지만,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이선이 진짜 계획하고 있는 바는 국민개병이었다. 1890년까지 목표로 하고 있는 국민개병을 앞두고, 1889년 초 독일 군사고문단이 입국했다.

"조선은 프로이센의 사례를 참고해 징병제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조선군의 편제에 고문단 여러분의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선이 정중하게 청하자, 군사고문단장 힌덴부르크도 화답했다.

"본관은 조선군을 독일군 못지않게, 강군의 기초를 만들어놓는 것을 목표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묄렌도르프와 내정고문단에 이어, 힌덴부르크와 군사고문단은 이선과 조선 조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19세기 초의 '프로이센 개혁'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갑신경장이 시작된 지 5년, 조선의 부국강병은 일관된 정책 아래에서 힘차게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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