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국민개병(國民皆兵)
왕명을 받아 군무독판에 취임한 이선은 즉각 국민개병 작업에 착수했다.
조선 군대는 기존의 '영(營)' 체제에서 소대-중대-대대-연대로 이어지는 서양식 군제로 변화했다. 연대는 가장 기본적인 전략 단위였다.
1889년 기준, 수도에 설치한 친·근위대는 3개 연대, 12개 대대에 병력은 약 1만 명이었다. 지금까지는 모병제를 실시하여 군사의 정예화에 집중했다. 조선에서 가장 정예인 병력으로, 군사의 훈련이나 무기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능히 청국이나 일본 군대와도 대적할 만했다.
문제는 지방에 배치된 부대였다. 지방에는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가 혼재했다. 구식 군대 중 일부는 훈련 후 재편성하고, 일부는 퇴역시켜 신식 군대 위주로 전환했다. 이른바 진위대(鎭衛隊)였다.
평안도, 함경도, 경기도, 황해·강원도, 충청·전라도, 경상도를 군관구로 하여 진위대를 설치했다. 진위대는 편제상 6개 연대가 존재했지만, 실제 병력은 채 2만에 미치지 못했다. 진위대 병력은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조선 내의 무력 독점이라는 측면에서, 조정에 감히 맞설 자는 없었다. 문제는 외세 침입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현재까지는 군대가 국가 방위보다는 정권 안보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다. 이선은 국민개병을 통해 국민군으로 전환, 국가 방위를 달성하고자 했다.
"소수정예도 좋은데, 근대 전쟁에서 3만도 안 되는 병력으로 국가 방위는 어림도 없습니다. 평시에는 병력이 5만이어도 되지만, 전시에는 수십만은 동원할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징병제가 필요합니다. 징병제는 군대 규모를 늘리는 데 모병제보다 비용이 확연히 적게 듭니다. 본격적인 징병 작업에 착수하도록 합시다."
이선은 개국 499년(1890년) 이내로 징병검사를 실시하고, 500년(1891)년부터는 실제 징집이 이루어지도록 준비했다. 징병의 실무를 맡은 군무부 산하 군무국은 모처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게 되었다.
지난 5년간, 징병제의 물적 기초는 갖추어졌다. 전국적으로 인구 조사를 진행한 결과, 조선 인구는 700만에서 1300만으로 확인되었다. 갑자기 인구가 늘어난 게 아니라, 그동안 조사에 포함되지 않은 인구를 대폭 찾아낸 덕분이다. 실제 인구는 1500만 정도로 추정이 되니, 당시 행정력을 감안하면 인구 대부분을 행정 체계에 포함한 쾌거였다.
새로운 호적 제도를 기반으로, 징병 대상자의 확보와 규모를 논의했다. 군무부는 군사고문관 힌덴부르크의 조언을 받아, 프로이센 징병제와 조선의 현실을 조화하여 '징병 조례안'을 제출했다.
「징집 연한은 18세부터 40세까지이다. 호적에 등록된 인구는, 18세가 되는 해에 지역별로 징병검사를 받는다. 징병검사에 따라 현역과 보충병, 면제를 결정한다.」
원칙적으로 모든 남성이 징집대상이었다. 다만 당분간 징병검사에는 광범위한 면제 조항을 두어, 급작스러운 변화에 따른 반발을 최소화하려 했다.
「국민군은 상비병·예비병·후비병·국민병으로 나뉜다. 상비병의 연한은 3년이며, 전역 후에도 예비병과 후비병에 소속된다. 예비병과 후비병은 전시에 동원될 것이다. 예비병은 4년, 후비병은 10년간 소속된다. 기간이 종료된 이후에도, 40세가 되는 해까지는 병적에 남아 국민병으로 간주된다.」
프로이센 징병제를 모델로 하여, 일본 징병제를 참조한 징병 조례안은 국민개병을 원칙으로 했다. 신분이나 출신에 따른 차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징병 조례안이 상정되자, 정부 내에서 갑론을박이 재개됐다. 하지만 정국을 주도하는 이선과 개화당은 징병제를 밀어붙였다.
"작금은 국가위기의 시대입니다. 내우외환을 방지하려면 징병제가 유일한 대안입니다."
이선과 김홍집, 홍영식은 조정의 중론을 모아 임금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다.
갑신경장 이후 임금은 별다른 불만 없이 충실히 옥새를 찍는 역할만 했다. 그리고 군주로서의 의례에만 충실했다. 새 중전과의 관계도 좋아서, 그 사이에 자녀가 둘이나 태어났다.
'본래 권력욕이 강한 군주가 권력에 초탈한 태도를 보이니, 역설적으로 수상하군.'
하지만 임금이 권력을 되찾기에는 국내외적 기반이 없었다. 어쩌면 체념한 것일지도 몰랐다.
징병 조례안을 읽어본 임금이 말했다.
"조선은 아직 징병제를 채택하기에 이르지 않는가? 지금의 군대는 충분히 정예한데, 굳이 징병제를 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징병제의 규모와 법제는 모병제와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세계적으로 모두 징병제를 실시하여 강국이 되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뒤처져 있습니다."
홍영식의 답변에 임금이 우려를 표했다.
"서양의 제도가 아무리 좋다고 한들, 조선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으면 무작정 채택할 수 없다."
이선은 이에 대한 대응 논리를 생각해 두었다.
"징병제는 단순히 서양의 제도가 아닙니다. 조선의 병농일치제와도 그 정신이 맞닿습니다. 태조 대왕의 오위도총제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 전기의 삼군부, 오위도총제(五衛都摠制)는 병농일치(兵農一致)였다. 5위 체제는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모든 장정을 군역에 포함하였고, 징병제와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5위는 통일적이고 집권적인 명령 체계에다가, 중앙군과 지방군과의 연계성에도 조선 후기의 5군영 체제보다 훨씬 장점이 많다고 평가되었다. 5군영 체제가 약체화되면서, 5위 체제로 복귀해야 한다는 여론은 늘 있었다.
물론 근대적 국민개병제와 병농일치의 5위 체제는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시행되었던 바 있는 5위 체제를 강조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징병제의 역사적 당위성을 설명하고 징병제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하려 하였다.
"작금은 바야흐로 건국 이래 최대의 경장 시기이니, 태조 대왕의 창업 시기를 모범으로 함이 바람직합니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병농일치는 농민과 농토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징병제는 어찌 재원을 마련하려 하는가?"
김홍집이 답했다.
"역시 토지와 관계가 있습니다. 결세를 인상하여 재원을 확보했습니다. 또한, 국방세를 내는 자에게는 군역을 면제시킬 것입니다. 징병제에 소요되는 재원은 모병제보다 오히려 적게 듭니다. 재원 확보에 만전을 기하고 있사오니 성상께서는 심려를 놓으십시오."
하지만 임금은 심려를 놓을 수 없었다. 가장 우려가 되는 건 군대의 충성이었다. 군대와 빈민이 결합하여 궁궐을 습격한 임오군란을 겪은 임금에게, 국민개병제는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징병에 동원될 백성의 충심은 믿을 만한 것인가? 난민(亂民)이 불순한 마음을 품고 군대에 들어와, 선동하여 군대가 반란을 일으키면 어찌할 것인가?"
이선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 다짐합니다. 오히려 국가와 국민의 일체성을 강화할 것입니다. 국민군이야말로 용병보다 훨씬 국가 방위에 신뢰가 갑니다."
임금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고, 징병 조례안을 허가했다.
"국민개병의 조령(詔令)을 반포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옛날에는 군대가 농군(農軍)에게 보유되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백성들이 사람들마다 무예를 익혔다. 나라에 사변이 없으면 각자 생업에 안정되어 있다가 갑자기 사변이 있으면 큰 고을과 작은 고을에서 각자 출병하였는데 천하를 지휘하여도 한 번 기를 휘둘러서 마치 팔이 손을 부리듯이 잘 되었다.
겸병(兼竝)이 일어나자 법도가 폐지되고 변혁이 무상하게 되자 일정한 제도가 없어져서, 군사를 징발할 때마다 바로 소요가 일어났고, 또 갑자기 소집하여 마치 시장 사람들을 몰아가듯이 하였으니, 어디에 그 군사를 쓰겠는가? 이것은 나라에 군대가 없는 것이니, 나라에 군대가 없으면 그 나라는 나라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고(孤)는 미리 면밀한 방비에 유념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러나 각국의 징병 제도는 옛날과 상당히 합치하는데 자세함은 보다 더한 것이 있다. 육군과 해군의 제도는 그것을 참작하여 장점을 채택하고, 대오를 편성하여 정리되자 또 우리의 제도를 참작해서 서울로부터 지방까지 관구에 소속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오위도총부의 옛 제도를 따른 것으로 건국 이래 일대 경장이다.
- 대조선 개국기원 499년 2월 25일
국민개병의 조령이 발표되자, 전국의 여론이 요동쳤다. 당장 올해 안에 징병검사가 실시되고, 내년부터 입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첫 징집이니만큼, 18세에서 20세에 해당하는 장정이 징병검사의 대상자가 되었다. 1871년에서 1873년생에 해당하는 모든 장정들이 병역대상자가 된 것이다. 더 나아가 30세까지의 장정들도 병적에는 포함되도록 했다.
"뭐야? 그럼 나도 대상자란 말인가?"
"신미년(1871)생부터는 그렇다는군."
"그럼 검사 결과에 따라 군대 가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되는 거지."
"3년이나 군대에 가면 농사는 누가 지으라고?"
"제길, 이게 뭔 헛소리야!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군대에 가라는 거야?"
농민층의 반발보다 양반층의 반발이 더 컸다.
"반상(班常)의 법도를 무너트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상놈들과 함께 군대 가라고!"
"역시 개화당 무리는 대원군보다 훨씬 징그러운 놈들이요. 대원군이 호포제 실시하고 서원 철폐한 것도 이가 갈렸는데, 이제는 군역을 지라니!"
"대체 중추원에 앉아있는 자들은 뭘 하고 있길래! 개화당의 폭주를 막아 내질 못하는 건가?"
징병제 선언 이후, 중추원 민선 의관 몇 명이 사퇴했다.
"아무도 우리의 고언(苦言)은 들어주지 않는구려. 중추원이 조정의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소. 우리는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겠소."
하지만 이 정도 반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징병검사에 응하지 않는 자, 서류를 조작하는 자는 제일 먼저 징집 대상자가 될 것이다."
징병검사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여론의 동요는 더 강해졌다. 집단으로 검사에 불응하거나, 출생연도를 속여 검사에 빠지려는 자들이 속출했다.
"정당하게 징병검사에 응하면, 상황에 따라 상응하는 조치를 받게 할 것이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검사에 응하라."
실제로 첫 징병은 광범위한 면제 조항이 존재했다. 가장(家長), 관리, 장교 지원자, 특정 학교의 교사와 학생, 신체불구자, 병약자, 형편이 어려운 자, 범죄자 등은 병역에서 제외되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갑자기 사범학교와 관립학교, 관리 임용시험 경쟁률이 폭등했다.
늘어나는 병력 충원에 대비하여 장교를 확보하기 위해 무관학교 외에도 4년간 복무하는 단기 장교제가 시행되었는데, 양반 자제들이 대거 장교 시험을 지원했다.
"어차피 군대 가야 한다면, 졸병보다야 무관이 낫지."
해당 사항이 없는 자들에게는, 국방세를 내고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신권 200원 혹은 1000냥을 내면 합법적으로 면제를 받았다. 양반이나 부유층 자제들은 돈을 긁어모아 면제를 받는 길을 택했다.
"쳇! 결국, 세금 걷으려고 이러는 거 아닌가?"
"그래도 군대 끌려가는 것보다야 돈 내는 게 낫지."
"축하하오. 그대는 자랑스러운 조선 국민군의 일원이 될 것이오."
첫 징병검사가 농번기를 피해,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징병 검사관은 각 군을 돌며 장정들을 판단했다.
이도 저도 아닌 이들은, 결국 징병검사에 나와 현역 판정을 받았다. 이들의 절대다수는 농민층이었다.
"자랑스럽긴 개뿔. 막막하다."
"우리 조상님들이 군역 끌려 나가는 것과 비슷한 신세구먼."
"그래도 지금 조정은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잖아. 신분제도 없어지고, 세금도 많이 경감됐고, 수령의 학대도 사라지고······."
"그럼 뭐해? 개화로 혜택을 보고 배를 불린 자들도 많지만, 내 처지가 어려운 건 매한가지인데!"
"이래서야 '국민개병'이 아니라 '빈민개병' 아닙니까?"
"국민적 평등을 추구하는 정부의 방향과 다릅니다."
다행인 점은, 징병제 실시 이후 전국적인 폭동이 발발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징병검사 불응과 항의시위 정도에만 머물고 있다는 점이었다. 불응자는 결국 징병검사에 끌려갔고, 항의는 산발적인 시위에 그쳤다.
전통적으로 무력을 독점해 왔던 사무라이 계급은 특권을 박탈당한다고 생각해 국민개병을 반대했고, 군역에 대한 개념이 없던 농민 계급은 군대에 가야 한다는 자체에 반발감을 느꼈다.
1873년 징병제 실시 이후 일본 전역에 징집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고, 사무라이와 농민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단호했고,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폭동은 모조리 군경에 의해 진압되었다. 초기에 혼란을 거듭했던 징병제는, 1877년 서남 전쟁 이후 급속도로 사회 전반에 확립되었다.
이선은 첫 징병검사가 큰 탈 없이 진행된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했다.
'조선에서도 징병제가 연착륙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징병이 불평등하게 진행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당장 무작위로 모두 징집하면 사회적 혼란이 클 터. 양반 자제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군비를 넉넉히 확보해두고, 징병제가 사회적으로 확립이 되면 진정한 국민개병으로 나아간다.'
1890년, 개국기원 499년. 국민개병이 실시되었다. 국민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조선은 그동안 가지 않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