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중재(仲裁)
암살범 쓰다 산조에 대한 경찰 조사가 시작됐다. 쓰다는 세이난(西南) 전쟁에 참전한 적 있는 경찰이었다. 조사에는 러시아 외교관이 동석했다.
쓰다는 흠씬 두들겨 맞은 몰골이었다. 경찰이 옛 동료라고 해서 봐주지 않은 게 분명했다.
문 :
"감히 러시아 황태자 전하를 노린 이유가 무엇인가?"
답 :
"일본에 왔으면 천황 폐하를 먼저 알현하는 게 예의다.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서 도쿄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황태자가 이곳저곳 놀러 다니는 데에 분노했다."
문 :
"그 이유 하나만으로 암살을 꾀하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다른 이유도 있을 터. 순순히 말해라."
답 :
"러시아는 일본으로부터 가라후토(樺太, 사할린)를 강탈했다. 다음은 일본 본토를 노릴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놓는 이유는 결국, 동양을 침략하기 위함이라고 알고 있다. 황태자가 일본에 방문한 목적은 침략을 위한 사전 정찰이 아닌가? 그래서 죽이려고 했다."
문 :
"너에게 그런 사상을 심어준 자가 누구냐? 사전에 모의했던 자가 있는가?"
답 :
"없다. 나 혼자 판단하고 결정했다."
수사 결과를 보고받은 니콜라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왔다고? 완전히 미친놈 아닌가?"
"물론 쓰다는 미친놈이지. 하지만 그 미친놈들에게 미친 사상을 불어넣는 자들이 있네. 이번 사건은 결코 우연이 아니지."
이선은 니콜라이에게 일본 정부와 군부 내의 대륙 진출론자들에 관해 설명했다. 니콜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자네 조언은 잘 알겠네. 하지만 이 일은 나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닌 듯싶네. 일단 일본을 떠난 후에 본국과 협의해서 대응을 결정할 생각일세."
"알겠네. 그럼 내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함께해도 되겠는가?"
니콜라이는 껄껄 웃었다.
"이 친구야,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함께 가야지.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는 러시아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같이 철도 기공식에 참석하세나."
"고맙네."
황태자 일행은 고베로 향했다. 메이지 천황은 직접 황실 열차를 제공해서, 황태자와 같은 객차에 탔다. 천황은 러시아 군함이 있는 부두까지 황태자와 함께했다. 부두 앞에서 천황은 니콜라이에게 악수를 청하고 헤어졌다.
황태자는 '황제 폐하의 명으로 5월 7일에 일본을 떠난다'라고 일본 측에 통보했다.
"그렇다면 송별연을 해야지요. 황태자 전하를 관저에 초청하겠습니다."
황태자는 정중히 거절하고, 역제안했다.
"주치의가 배를 떠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했습니다. 대신, 폐하의 호의에 감사하는 뜻으로, 배에 오르셔서 함께 오찬을 했으면 합니다."
"전하의 초청이라면 감사히 받아들이지요."
메이지는 흔쾌히 초청을 받아들였지만, 일본 대신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화, 황공한 일이오나, 연회에 초청한다는 명목으로 폐하를 군함에 모셨다가, 그대로 러시아로 실어간다면······."
"고베에 있는 러시아 군함만 6척입니다. 저들이 폐하를 납치하려는 흉측한 마음을 먹는다면 제국 해군이 막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거절하시옵소서."
대신들은 러시아에 대한 공포의 마음으로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했다. 오히려 천황이 더 합리적이었다.
"러시아는 선진 문명국이다. 어찌 그런 야만적인 짓을 하겠는가? 더욱이 황태자는 대범하고 점잖은 사람이다. 분명 좋은 뜻으로 짐을 초대한 것이다."
"하오나······."
"경들이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것이오. 짐이 이미 초대를 받아들인 이상, 인제 와서 거절할 수는 없소."
메이지의 뜻에도, 대신들은 여전히 걱정이었다. 황태자 피습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천황을 납치한다면, 일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상황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대표로 교섭을 하기 위해 항구로 왔다. 이토는 니콜라이가 아니라 이선을 찾았다.
"늦은 밤에 회견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완화군께서 흉도(凶徒)로부터 황태자 전하를 구해주신 덕에, 러시아와 일본 모두 난처한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토는 나이로 치면 아들뻘인 이선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천하의 이토 히로부미가 내게 머리를 조아리는 날이 오다니.'
이선은 내심 즐거웠지만, 냉철함을 유지했다.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공께서 이 늦은 시간에 일부러 감사를 표하러 오진 않았을 터. 어떤 용무입니까?"
"역시 영명하십니다. 그럼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일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 러시아 군함을 방문하는데, 정부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천황 폐하를 납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러시아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황태자도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일본 정부는 이번 사건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요구하는 사항은 될 수 있는 대로 따르려고 합니다. 흉도를 엄중히 처벌하고, 사죄사를 러시아에 파견······."
이선은 이토의 말을 끊었다.
"잠시만요. 그런 말씀을 굳이 내게 하는 이유가?"
"그야 완화군께서 황태자 전하의 벗이자,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완화군께서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중재를 해주십시오."
이선은 빙긋 웃었다.
"나는 조선의 왕자이자 당국을 대표합니다. 조선이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일을 중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조선이 중재해 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지난 일을 생각해주십시오. 천진 조약을 체결할 당시에도, 일본이 청국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의 중립과 불간섭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습니까? 일본이 조선을 중요한 이웃 나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토는 천진 조약을 맺은 당사자가 자신이라는 걸 강조했다. 하지만 이선은 어이가 없었다.
'마치 자기 덕에 천진 조약을 맺은 것처럼 말하는군. 판은 열심히 내가 깔고 다녔는데.'
"지난 일을 생각해 보니, 일본이 조선을 상대로 부당하게 무역 제재를 한 게 생각나는군요. 방곡령은 조선의 권리인데도, 배상금을 요구하다가 뜻대로 안 되니까 금수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까?"
이선의 지적에 이토가 당혹감을 느꼈다.
"이는 양국 간에 오해가 쌓여서 그렇습니다. 대화로 해결 가능한 일입니다."
이토는 본래 야마가타 내각의 대조선 강경책에 반대하는 태도였다.
"그렇다면 이토 공께서 나서주시지요. 일본이 조선을 정말로 중요한 이웃 나라로 여긴다면 말입니다."
"내각에 요청해 가능한 즉시 조선에 대한 조치를 해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조선 강경책은 야마가타가 주도한 만큼, 그가 물러난다면 해결될 문제였다.
암살 미수 직후, 야마가타는 미증유의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 사퇴의 뜻을 밝혔다. 후임 총리로는 대장대신 마쓰가타가 유력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동양 평화를 위해 힘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러시아를 설득해 보지요."
"감사합니다, 완화군 대감! 힘써 주신다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랄 게 있겠습니까? 동양 평화를 위해서 적절한 세력 균형은 꼭 필요하니까요."
"과연 완화군께서는 외교에 관해 아십니다. 외교를 이해하시는 분이 조선을 이끌게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토의 입에 발린 칭찬에 이선이 씩 웃었다.
"별말씀을요. 우리 모두 비스마르크 재상으로부터 외교에 대해 배운 사람 아닙니까, 하하."
"아, 그렇지요. 우리 모두 비스마르크 재상의 제자로군요. 하하하."
이토와 이선은 웃으면서 헤어졌다. 하지만 이선의 말은 중의적이었다.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 내 팽창론자들이 제거되어야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이토가 생각하는 '동양 평화'는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여 동양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고, 이선이 생각하는 동양 평화는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여 동양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토는 이선이 '합리적인' 인물이기에, 지금 일본보다 훨씬 막강한 러시아의 편을 들어 일본의 힘을 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팽창론자들은 조선을 원치 않지만, 일본의 팽창론자들은 조선을 원하지. 내가 러시아를 선호하고 일본을 경계하는 건 그 차이야. 일본의 팽창론자들이 제거된다면, 그다음에 파트너 관계를 고려할 수 있겠지.'
다음 날. 메이지 천황은 군함 아조프를 방문했다. 천황이 외국 군함에 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황태자는 정중하게 천황을 맞이했다.
"폐하께서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초대에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일본의 우려와 달리, 오찬 분위기는 유쾌하고 즐거웠다. 메이지는 오히려 긴장을 풀고 황태자와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구중궁궐에서 신하들 사이에 둘러쌓여 엄숙하게 지내던 천황에게, 러시아 군함 방문은 오히려 즐거운 외유였던 것이다.
"황태자께서 이렇게 떠나게 되니 아쉽군요. 부상은 좀 어떻습니까? 짐의 영토에서 불행한 사고가 발생한 것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어떤 나라건, 황족을 증오하는 미친 인간은 있기 마련입니다. 부상도 깊지 않으니, 폐하께서는 너무 심려 마십시오."
니콜라이는 관대한 기분이었다. 일본 전국적으로 황태자 피습을 사죄하고, 쾌유를 기원하는 선물과 전보가 쏟아졌다. 황태자의 거처로 쏟아진 갖가지 선물을 모으니 수십 상자나 됐고, 편지와 전보는 수만 통에 달했다.
황태자가 떠난 다음 날에는, 어떤 젊은 여성이 교토 부청으로 와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일본인의 죄를 대신해서 갚기 위함'이었다. 하녀였던 여인은 암살자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다.
일본은 여인의 죽음을 칭송했지만, 오히려 러시아 측에서 일본의 광적인 사죄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메이지 천황의 행동도, 전례가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애연가인 황태자는 러시아 관습대로 식사 중에 담배를 피웠다. 니콜라이가 담뱃불을 붙이려는 차에, 천황이 직접 성냥으로 불을 붙여 담배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본 일본의 대신과 시종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살아있는 신' 천황이 러시아 황태자의 담배 시중을 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오찬이 끝나고, 천황은 황태자의 환송을 받으며 배에서 내렸다. 2시간 후, 군함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면서 황태자의 일본 방문은 종료되었다.
천황부터 일개 백성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총단결하여 러시아에 애걸하는 모습을 보는 이선은 묘한 기분이었다.
'조선에 대해서는 그렇게 고압적으로 굴더니, 정말로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군.'
하지만, 실제 역사대로라면 불과 13년 뒤에 일본은 러시아를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 공격한다. 그리고 차르와 제정 몰락의 역사가 시작된다.
황태자를 구한 공로로, 인력거 마부 2인은 훈장과 거액의 은사금을 받았다. 일본 내에서도 영웅이라고 칭송받았다. 하지만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사회는 이들을 '로탐(露探, 러시아 스파이)'으로 몰아 따돌렸다. 그때 황태자가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니콜라이가 베풀었던 관용은 배신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 안에서, 이선은 니콜라이를 거듭 설득했다.
"암살범 쓰다 산조는 단독범이지만, 암살을 꾀한 사상적 배경에는 일본 정부와 군부 일각의 러시아에 대한 증오가 담겨있네. 쓰다가 한 말을 보았지? 러시아의 모든 행동은 동양 침략을 위한 전 단계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러시아는 일본이든 조선이든 침략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 시베리아 철도 부설은 문자 그대로 유럽과 아시아를 잇기 위함이라고."
아직 본격적인 정치적 훈련을 받지 않은 니콜라이의 정세 인식은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러시아의 국력과 덩치 그 자체가 무서운 거야. 철도 부설은 유럽의 군대를 아시아까지 신속하게 보내는 길이라 생각하고. 일본 일각에서는 연해주 다음은 만주, 만주 다음은 조선, 조선 다음은 일본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일본은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삼아, 군비 확장을 위한 명분으로 삼고 있지."
"으음······. 믿기지 않는군. 일본이 감히 러시아와 패권을 다투려 한다니?"
니콜라이는 일본이 감히 러시아에 맞서 싸우려 한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확보한 극비 정보일세."
이선은 일본 정부의 가장 내밀한 정략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니콜라이에게 기밀을 공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