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차도살인(借刀殺人)
"러시아 제국 정부는, 황태자 피습 사건이라는 중대한 사태에 대한 책임으로, 일본 제국 정부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통보한다."
러시아 공사가 전한 통첩문의 내용을 읽는 순간, 외무대신 에노모토는 충격으로 쥐고 있던 펜을 떨어트릴 정도였다.
에노모토는 내각에 러시아 정부의 통첩문을 전달했다. 마쓰가타는 통첩문을 읽으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이번 사태를, 광인 1인에 의한 사건으로 여기지 않는다. 범인 쓰다 산조는 단순한 실행범에 불과하며, 진정한 원인은 일본 정부와 군부 일각의 집요한 반러시아 책동과 대륙팽창론에 책임이 있다.
······ 총리대신, 육군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을 러시아의 침략 정책이라 의도적으로 곡해하고, 마치 만주와 조선, 일본을 침략할 의사가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이는 일본의 군비 확대와 팽창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함이다.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는 청일동맹론을 제기하여, 러시아의 정당한 영토인 시베리아 점령을 요구하는 극단적인 주장에까지 이르렀다. 팽창정책을 추구하는 건 러시아가 아니라 일본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육군대신 오야마 이와오는 명백히 러시아를 목표로 하여, 육군 사단의 대대적인 증설과 대륙 침략전쟁을 준비했다.
······
작년의 러시아 공사관 습격에 이어 황태자 암살 미수는, 러시아에 대한 일본 정부 일각의 악의를 드러내는 일련의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제위 계승자에 대한 실체적인 위협만큼, 러시아에 대한 중대한 악의도 없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이와 같은 악의가 일본 천황 폐하나 정부 전체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군주의 성총을 어지럽히고, 국가 간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부 국수주의자들의 행태가 문제인 것이다.
이에 러시아는 자국의 안보, 동양의 평화와 균형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한다.
1.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이나 경멸감을 조장하거나, 그 영토의 보존에 반대하는 경향을 띤 일체의 출판물을 금지.
2. 러시아에 반대하는 선전 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국수주의 단체들을 즉시 해체하고 그 선전수단들을 몰수. 예컨대 흥아회, 동방협회, 현양사.
3. 러시아를 적국으로 삼은 계획을 선동한 자들을 정부와 군부에서 배제할 것. 대표적으로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 육군대신 오야마 이와오.
4.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의 독립과 중립을 준수하고, 청국과 조선의 영토를 보전할 것.
5. 러시아와 일본은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준수하여, 일본은 사할린이 확고한 러시아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다시는 이의를 제기하지 말 것. 불응 시에는 러시아 역시 쿠릴열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재개하겠음.
6.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월동기지로 쓰시마 섬 아소(浅茅) 만의 토지를 조차할 것.
이에 대한 답변은 5월 31일(율리우스력 19일)까지 러시아 정부에 제출되어야 한다.
알렉산드르 3세
러시아의 강경한 요구에, 일본 정부는 모두 경악으로 물들었다.
외무대신 에노모토는 러시아 공사 셰비치에게 사정했다.
"설마 범인을 사형에 처하지 않았다고 하여 이러는 건 아니겠지요? 만약 그렇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즉각 사형을 집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범인의 양형은 러시아 정부의 요구와 전혀 무관합니다. 처벌은 뜻대로 하십시오. 개의치 않습니다."
공사는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분개하는 건 범인 한 개인이 아니라, 범인에게 러시아 황태자를 공격할 사상을 불어넣은 정부 당국자의 책임입니다."
"오해입니다. 실체 없는 소문에 근거하여, 암살과 일본 정부의 관계를 주장하면 어찌 받아들이겠습니까?"
"실체 없는 소문이라니요? 러시아는 확실한 정보를 토대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따지지 말고, 야마가타 총리와 아오키 대신에게 직접 확인해보시지요."
러시아가 당초 태도를 바꿔 강경론으로 선회한 건, 황태자의 변심이 결정적이었다.
"나는 일본의 러시아 침략 계획의 연장선으로 황태자 암살을 노린 게 아닌가 싶네. 생각을 해보게. 러시아는 전제군주국이야. 제위 계승자의 안위가 진정 중요하네. 만약 황태자가 피습으로 서거했다면, 어떻게 되나? 큰 혼란이 발생했겠지."
니콜라이는 시베리아를 지나가면서 이선의 말을 떠올리며 거듭 생각에 잠겼다.
대외적으로는 극비이지만, 황제는 근래 들어 건강이 악화하고 있었다. 동생 유리 대공도 어린 나이에 폐결핵 증세가 있어서 동양 여행도 함께 하지 못하고 도중에 귀국해야 했다.
만약 자신이 죽으면 막내 미하일뿐인데, 미하일은 너무 어렸다. 러시아 제국에 혼란이 닥칠 수 있었다.
니콜라이는 이선에게서 들은 정보와 자신의 의견, 주변 인사들의 조언을 종합하여 부황 알렉산드르 3세에게 직소했다.
부친을 암살로 잃은 알렉산드르 3세는, 아들이자 후계자마저 외국에서 암살될 뻔하자 격노했다. 더욱이 일본 정부 일각이 음모와 관여되어 있다라면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러시아는 대응 수위를 논의한 끝에, 영국을 자극할 수 있다는 외무부의 소극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뜻대로 강경한 통첩문을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일본 정부는 패닉 상태였다.
"아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어떻게 러시아가 정부 내에서 극비리에 논의한 사항을 알고 있지?"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의 의견서를 읽은 사람은 소수 아니오? 대체 누가 러시아에 누설한 거요!"
러시아는 일본이 은밀히 논의했던 사항을 모두 꿰고 있었다. 누군가 스파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부 내에 로탐(러시아 스파이)이 있다!"
"야마가타 경이 실각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자가 아니겠소?"
"대체 그게 누구요?"
"야마가타 경과 군부의 팽창 정책을 반대하는 이토 경이나 마쓰가타 총리겠지."
"그러고 보니 이토 경이, 천황 폐하께서 러시아 군함을 방문하기 직전에 은밀히 완화군을 만났다던데······."
소문이 돌자 이토가 격분하여 외쳤다.
"그럼 내가 러시아에 내통하여 극비 정보를 팔기라도 했다는 건가? 대체 사람을 어찌 보고 그따위 망언을 지껄이는가! 내가 완화군을 만난 건, 러시아와 일본 사이를 조선이 원만하게 중재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었소!"
이토는 역공을 펼쳤다.
"애초에 야마가타 경과 군부가 무리하게 팽창정책을 추진해서 이런 환란에 부딪힌 게 아니오? 책임은 야마가타 경이 져야 하오!"
마쓰가타도 소문에 불쾌감을 느꼈다.
"러시아의 요구는 부당하기 짝이 없으나,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잡게 된 이상 대응하지 않을 수가 없소. 어떻게든 전쟁은 막아야 하오.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은 끝장이오."
오쿠보의 내정우선주의 정책을 계승한 이토는 야마가타와 육군의 팽창 정책에 반대했다. 이토는 '언젠가 대외 팽창을 해야겠지만, 지금은 근대화에 집중해야 할 시기'라고 판단했다.
재정 전문가로서 긴축정책을 추진하는 당사자이자인 마쓰가타는 대외전쟁을 더욱 무익한 것으로 여겼다. 대외 팽창은 상업적 이익에 집중해야 하며, 사쓰마 파벌로 조슈 파벌의 대륙 팽창 정책을 반대하는 마쓰가타의 생각으론 일본이 추구해야 할 해외 영토는 대만이었다.
만약 이번 일로 야마가타가 실각할 수 있다면, 이토와 마쓰가타 입장에선 나쁜 일이 아니었다.
야마가타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러시아의 무도한 요구에 저항하지는 못할망정 나를 희생양 삼으려고 해? 러시아에 굴복한다면, 군부가 순순히 받아들일 것 같은가!"
러시아가 회신일로 지정한 5월 31일이 다가오는 가운데, 일본 정부 내에서는 극심한 분열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영국에 중재를 부탁했다.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밖에 없어 보였다. 사정을 잘 모르는 영국으로선, 러시아가 일본에 부당한 요구를 강요한다고 생각했다.
영국 공사가 일본에 대한 관대한 처우를 요청하자, 황제가 버럭 화를 냈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봅시다. 귀국의 웨일스 공(영국 왕태자)께서 중국을 방문했는데, 반영 사상에 물든 중국인이 홍콩 탈환을 요구하며 암살하려 했소. 그럼 영국은 참을 수가 있소?"
"······ 그냥 넘기기 어렵겠지요."
"그렇소. 영국은 더 사소한 이유로도 전쟁을 하지 않소? 짐은 평화를 원하기에, 결코 전쟁을 원치 않소. 그러나 정당한 대가는 받아낼 것이오."
알렉산드르 3세의 강경한 태도에, 영국도 한발 물러섰다. 영국은 일본에 6안을 제외한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
영국은 다시 수정안을 중재했다.
"1안에서 5안은 모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쓰시마 해군기지 조차 요구는 너무 과도합니다. 동양 평화를 흔들 수 있는 사안입니다."
러시아가 쓰시마 조차를 요구한 건, 30년 전인 1861년에 선례가 있었다. 그때도 에도 막부를 대신한 영국의 압박으로 러시아는 철수해야 했다.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에서 거문도를 빼앗으려고 한 적도 있지 않소? 왜 영국의 요구는 괜찮고, 러시아의 요구는 과도한 것이오?"
"······ 영국도 결국 거문도에서 철수하지 않았습니까? 쓰시마 조차는 동양 평화를 위해서 안 됩니다."
"러시아의 쓰시마 조차는, 일본의 대륙 침략을 막기 위한 중요한 견제가 될 것이오."
"반대로 러시아의 남하는 견제할 방법이 없게 되겠지요! 만약 쓰시마가 러시아에 점령된다면, 영국도 응당한 조치를 할 것입니다."
영국의 압박에, 러시아도 결국 쓰시마 조차는 철회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사실 러시아로서는 쓰시마 조차는 그냥 던져본 것에 가까웠기에 큰 손해는 아니었다.
"러시아의 분노가 대단합니다.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입니다. 쓰시마 조차를 제외하면 일본이 크게 손해 볼 사안은 없습니다. 받아들이십시오."
영국은 일본에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조언, 아니 압박했다. 군부 일각에서는 전쟁 불사론까지 떠들었지만, 이토가 일갈했다.
"그러면 뭐, 러시아랑 전쟁이라도 하잔 말이오? 제국이 끝장날 일이오! 유신의 대업을 몇몇 정치인의 알량한 자존심으로 무너트려야겠소?"
정치적으로 존재감이 없는 천황이라지만, 정부가 극심한 분열상을 보이는 상황에서 최종 결정은 천황의 몫이었다.
메이지는 총리 마쓰가타를 황거로 불러들였다.
"이번 러시아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은 국가의 대사이니, 짐도 고민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소."
"황공하옵니다. 신등이 무능하여 폐하께 근심을 끼치고 있습니다. 대죄를 청합니다."
"아니오. 짐은 경들의 노고를 알고 있소. 의견이 다르더라도, 모두 나라를 위한 충정이오."
메이지는 마침내 본심을 말했다.
"짐은 황조황종을 받들어 사직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소. 짐은 결단코 전쟁을 원치 않소. 짐의 신민이 전쟁으로 희생되리라 생각하면 실로 마음이 아프오. 때로는 와신상담하여 물러나야 할 순간이 있소. 짐은 바로 지금이 그런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소."
"예, 폐하! 삼가 황명을 받들겠나이다."
천황의 '칙어'가 떨어지자, 마쓰가타는 각료회의를 소집했다.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 성단을 내려주셨으니, 신하된 입장에서 모두 따르도록 합시다."
"성지(聖旨)가 그러하시다면······."
천황이 지엄한 성단이 내려졌는데, 책임자로 지목된 이들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제일 먼저 육군대신 오야마가 정계 은퇴의 뜻을 밝혔다.
"신자(臣子)된 자로서 천황 폐하께 누를 끼쳤으니 할복으로 갚아야 마땅할 따름인데, 폐하께서 관대히 처분하시니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신은 다시는 군복을 입지 않을 것입니다."
오야마는 애초에 사쓰마 파벌에 속했고, 야마가타와 더불어 육군의 두 축이지만 대륙 팽창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단지 군비 증대를 책임진 육군대신이라는 이유로 러시아의 의혹이 집중된 것뿐이었다.
외무대신 아오키도 정계 은퇴의 뜻을 밝혔고, 처가가 있는 독일에 칩거하기로 했다.
결국 육군의 대부, 조슈 파벌의 우두머리 야마가타도 백기를 들고야 말았다.
야마가타는 사실상 일본 육군과 동일시되던 인물이었다. 근본적인 문제가 된 '야마가타 외교정략론', 그 기밀을 누설한 정부 내의 배신자를 원망했지만 더 이상 손을 쓸 여지가 없었다. 야마가타는 결국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야 말았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영원히 물러나겠으니, 부디 러시아 정부가 관대한 처분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일본 제국 정부는 러시아 제국 정부에게 회신합니다. 6안을 제외한 모든 요구 사항을 받아들입니다."
일본은 이토와 다케히토 친왕을 대표로 하는 사죄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러시아에 반대하는, 아니 대륙 침략을 웅비하던 모든 극우 국수주의 성향 단체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지도부는 도쿄에서 추방했다.
일본은 러시아의 존엄과 영토를 침해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고, 청국과 조선의 독립과 중립을 보장했다.
책임자로 지목된 야마가타, 아오키, 오야마는 불명예스럽게 정계에서 은퇴해야 했다. 이들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칩거에 들어갔다.
참으로 역설적인 순간이었다. 러시아 황태자를 노린 한 미치광이의 칼날이, 역으로 일본 팽창론자들의 정치적 생명을 끊는 칼날이 되고야 만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차도살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