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복제 개혁
바다 건너 조선에서는 일본의 상황을 매우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강 건너 불구경이 제일 재밌어. 팝콘 있으면 먹고 싶은 기분이구만."
이선은 팝콘 대신 꿀떡을 먹으며 주일 공사관 전보문을 읽었다.
이선은 자신이 놓은 불에 만족감을 느꼈다. 불이 생각보다 더 커지고 있어서 내심 놀라기도 했지만, 상황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고 있었다.
이선이 다른 의미로 '중재'를 했다는 건 모르는 마쓰가타 내각은 조선에 대한 금수 조치를 해제했다.
일본은 이선이 일본 정부 내의 극비 정보를 속속들이 파악하여 러시아에 전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방곡령 분쟁도 종결됐고. 일본이 러시아의 요구를 얼마나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분위기 봐서는 전부 다 받아들일 것 같은데.'
이선의 목표는 야마가타와 일본 군부의 팽창론자들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똘똘 뭉쳐 저항한다면 러시아도 강요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토나 마쓰가타도 야마가타의 실각을 은근히 원하고 있지 않을까?'
이선은 일본 정부 내의 역학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가 되든, 조선이 손해 볼 일은 없어 보였다.
6월, 모든 상황이 정리되어 바다 건너 조선으로 전해졌다.
"야마가타 총리가 정계 은퇴를 했다는군."
"야마가타가 일본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역시 러시아의 힘이 세긴 세군."
일본 정치에 대해 알고 있는 개화당 관료들이 놀라움을 표했다.
이선은 아무 말 없이 그저 회심의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피습한 사건이 보통 일이오? 누군가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당연하지."
김옥균은 돌아가는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선에게 찬사를 돌렸다.
"군 대감께서 황태자 전하를 구해 주신 덕에, 조선이 덕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뭐, 운이 좋았지요."
"군 대감과 황태자 전하의 운만 아니라, 조선의 운도 폈습니다."
"그 운을 앞으로 어떻게 쓰느냐는 우리에게 달렸지요. 이제 외부 요인은 거의 사라졌으니, 내정에 몰두합시다."
'야마가타와 조슈파가 몰락했으니, 적어도 당분간은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계획은 안 세우겠군.'
하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부국강병을 부르짖는 일본은 곧 전쟁 기계가 될 것이다. 이토나 마쓰가타가 상대적 온건파라지만, 대외 팽창을 마다할 위인이 아니다. 다만 그 방향이 조선에서 대만으로 틀어지겠지.'
일본 육군과 조슈 파벌이 조선을 노린다면, 일본 해군과 사쓰마 파벌이 대만과 '남양(南洋)'을 노린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일본은 경제적인 이유에서라도 대만을 원했다.
'결국, 수년 내로 청일간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겠지. 그때를 대비하여 군비를 충분히 축적해 놔야 한다.'
1891년, 신묘년, 개국기원 500년.
외부 요인이 모두 안정되자, 조선 정부는 그동안 미루었던 일에 착수했다. 바로 생활 분야의 개혁이었다.
개화당 정부는 그동안 여론의 추이를 살피느라 공식적인 책력 교체와 복제개혁을 미뤄두었다.
이미 정부 내에서는 태음력과 태양력을 병용해서 쓰고 있었다. 외교관과 유학생의 단발과 양복 착용에 이어, 군무부와 경무청에 소속된 무관과 경찰에 한하여 단발과 서양식 제복 착용을 명했다. 새 군복은 프로이센식이었다.
"새 군제에는 전통복장이 불편하니, 서양식 제복 착용이 필수이다."
군·경은 개화당 정부에 가장 충성스러운 집단이었으므로, 대부분 불만 없이 단발과 서양 제복을 받아들였다. 반발하는 자들은 모조리 퇴직 처분을 내렸다.
군경에 대한 단발과 양복은 보수파도 문제 삼지 않았다. 보수파도 서양식 군제의 도입으로 필요성에는 동의했고, 실용적인 필요성으로 인지한 것이다.
하지만 개화당은 단발과 양복을 무관으로 한정할 생각이 없었다.
제일 먼저 논의가 된 건 책력 변경이었다.
"내년, 임진년은 태조대왕께옵서 나라를 건국하신 지 꼭 5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실로 국가적 경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크게 경축할 일이니, 정삭(正朔, 책력)의 변화를 줄 때가 되었습니다. 태음력을 태양력으로 교체해야 합니다."
"정삭은 쉽게 바꿀 수 없는 일입니다. 음력은 지난 수천 년 간 내려온 전통입니다."
"더욱이 책력의 교체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청국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보수파뿐만 아니라 김윤식과 같은 온건 개화파도 우려를 표했다.
외무독판 김옥균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청국에 보내는 문서에는 그대로 광서 연호와 음력을 쓰면 될 일입니다. 우리가 쓰는 음력도 청나라의 시헌력(時憲曆)을 그대로 쓰고 있으니, 어찌 고유의 전통이라 하겠습니까? 청국을 제외한 전세계가 양력을 쓰니, 음력을 쓰면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음력을 고수할 이유가 없습니다."
탁지독판 어윤중이 실용적인 이유를 댔다.
"아시다시피 음력은 주기적으로 윤달이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관원의 급료 지불이 13개월 치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마침 내년이 윤년입니다. 양력으로 교체하면 12개월분의 급료만 주어도 되니, 정부 예산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예산 소모가 워낙 많았기에, 이는 현실적인 이유가 되었다.
"정삭 변경을 성상께 고하도록 합시다."
"개국 501년을 기해 태양력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또한, 국가의 경축일을 정하고자 하오니 성상께옵서는 가납해 주시옵소서."
궁내부대신이 임금에게 고했다.
"성상의 만수성절(萬壽聖節)인 임자년(1852) 7월 25일을 양력 9월 8일로, 중궁전의 경절(慶節)인 정묘년(1867) 1월 25일은 3월 1일로, 왕세자의 경절인 갑술년(1874) 2월 8일을 3월 25일로, 태조대왕께옵서 조선을 창업하신 날인 임신년(1392) 7월 17일은 8월 14일로, 성상께옵서 즉위하신 날인 계해년(1863) 12월 13일은 1월 21일로 삼아 국가적으로 기념할까 하옵니다."
왕조 창건일, 임금의 즉위일, 임금과 중전, 세자의 생일을 5대 공휴일로 제정하자는 말에 임금은 동의를 표했다.
"청국에서 문제로 삼지 않는다면, 정삭을 양력으로 교체해도 무방하다."
"청국에 보내는 문서에는 광서 연호와 음력을 따를 것이니, 그들이 문제 삼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경들의 뜻을 가납한다."
임금의 조령이 반포되었다.
"정삭을 고쳐 태양력을 쓰되, 개국 500년 12월 2일을 501년 1월 1일로 삼으라."
마침 신묘년 12월 1일은 1891년 12월 31일이었다. 한 달을 건너뛰어 바로 1892년 1월 1일이 되게 한 것이니 계산하기도 쉬웠다.
각 관공서와 학교에 양력 사용의 지침이 내려졌다.
"개국 500년 12월은 하루뿐이다. 바로 501년 1월이 되니 모두 유의하도록."
"내년부터 5대 경축일은 쉬는 날이다. 성상과 나라의 은혜에 감사하며 편히 쉬도록 한다."
관공서가 양력을 쓰기로 하였으나, 민간에서는 오랫동안 써온 음력을 바꾸는 데 불편함을 느꼈다.
"뭐여, 그럼 앞으로 음력은 쓰지 말라는 거여?"
"농사짓는데 음력이 훨씬 편한데 그게 뭔 소리여."
"그럼 설날과 추석도 바뀐다는 거여?"
조정은 민간에서 양력을 쓰든 음력을 쓰든 관여하지 않기로 했으므로, 민간의 자율에 맡겼다.
"아니오. 민간에서는 오래 내려온 전통에 따라 그대로 음력을 써도 무방하오. 단, 공무와 관련된 일은 반드시 양력을 써야 할 것이오."
"뭐, 그렇다면 상관없지.
백성들은 조정의 융통성 있는 조치에 만족감을 표했다.
더 폭발적인 문제는 복제(服制) 개혁이었다. 신정왕후의 국상 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조정은, 마침내 1891년 말 결단을 내렸다.
"문무관의 복장 규칙을 제정한다. 내년부터 모두 서양식 제복을 착용한다."
문무관의 제복은 프랑스와 프로이센을 모범으로 했다. 일본이 복제개혁과 단발령을 단행한 게 메이지유신 4년 뒤인 1872년의 일이었다. 조선은 경장 이후 7년 만의 일이니, 훨씬 고심했다는 증거였다.
무관에 이어 문관의 관복까지 서양 복제로 한다는 건, 곧 단발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격렬한 반대가 쏟아졌다.
"어찌 서양의 것을 그대로 답습만 하려 하십니까?"
전 영의정 김병시가 앞장서서 반대했다. 김병시를 따라 연명으로 상소가 올라왔다.
"성인들은 중국을 따랐지만, 오랑캐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단호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백성들에게 8가지 조항을 가르친 때로부터 문물제도가 찬연히 크게 갖추어져서 소중화라고 불렸습니다. 우리 왕조에 이르러서는 훌륭한 임금들이 서로 이어 거듭 빛내어서 오늘과 같은 경사에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이전의 훌륭한 조상들의 아름다운 규범과 선대 임금들이 남긴 제도를 버리고 그만 이 지경에 이르게 하겠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
개화당 관료들도 찬성 논리를 펼쳤다. 특히 미국 유학파인 학부독판 유길준이 앞장서서 밀어붙였다.
"넓은 소매와 큰 관은 외국에서 유래한 습관이며,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는 것도 일시의 편의로, 처음 시행할 때에는 역시 신규였습니다."
"우리가 입는 관복도 명나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어찌 중국의 것을 받아들이는 건 법도에 옳다 하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는 건 그르다 합니까?"
"기자는 실존한 인물이 아니며, 조선은 중국과 다르거늘 어찌 아직도 소중화를 운운한단 말입니까?"
"일하기에 불편하며 양생에 불리한 것은 고사하고, 배와 기차가 왕래하는 오늘에 와서는 쇄국하여 홀로 지내던 구습을 고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선왕의 법도를 어찌 한순간에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거듭되는 선왕의 법도 운운에 이선은 짜증을 느꼈다.
"부국강병을 이뤄내지 못하면 선왕들의 종묘사직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옛 제도에 얽매여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을 돌보지 않는 것은 때에 맞게 조치하는 도리가 아니니,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단발, 양복 하지 않으면 종묘사직을 지킬 수 없단 말입니까? 선왕의 시제(時制)를 고치지 않고도 종묘사직을 지킬 방도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어떻게 흡수하냐에 따라 국운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의복과 습관도 바꿔야지요."
이선은 보수파 대신들 앞에서 어느 때보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예전부터 말했습니다. 바야흐로 서세동점, 제국주의 시대입니다. 서양 열강은 우리보다 50년에서 100년은 앞서 있습니다. 서력으로 20세기까지 꼭 10년이 남았습니다. 우리가 10년 내로 그 격차를 최대한 줄이지 못하면, 우리는 파멸할 것입니다. 단, 한순간도 멈출 수 없습니다. 조선은 총체적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이선의 연설에 개화당 관료들이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김병시 이하 보수파 대신들은 이선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감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우리는 물러나겠습니다."
"말리지 않겠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직시하십시오."
의정부 내에서 격렬한 논의 끝에, 온건 개화파를 대표하는 영의정 김홍집도 동의를 표했다.
"내 개인의 의견을 말하자면, 나는 단발과 양복 착용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부국강병에 기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못하겠습니까? 성상께 고하도록 하지요."
영의정 김홍집, 좌의정 홍영식, 군무독판 이선, 외무독판 김옥균, 내무독판 박영효, 학부독판 유길준이 연명으로 복제 개정의 불가피함을 임금에게 고했다.
"정말 불가피한 일인가?"
"세계의 대세가 그러하옵니다."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다. 그런데도 강행하겠다는 것인가?"
가장 강경한 단발, 양복 지지자인 유길준이 답했다.
"성상께서 모범을 보이시면, 저들도 감히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김홍집이 놀라서 유길준을 쳐다보았다. 임금이 개탄하듯이 말했다.
"과인더러 단발하고 양복을 입으란 말인가?"
홍영식이 재빨리 중재했다.
"어찌 신하 된 자로서 성상께 그와 같은 처사를 요청하겠습니까? 학부독판의 말은 개인적 의견이니, 너무 개의치 마시옵소서."
"성상께서는 이 나라의 군부이시온데, 성상께서 본을 보이시면 어찌 신자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선이 개입하려던 차에, 옆에 있던 김옥균이 손으로 유길준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선은 귀중한 유학파인 유길준의 능력을 꽤 높이 평가했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인해 정치적 감각이 떨어졌는지 의심했다.
'조선이 미국인 줄 아나? 왕은 대통령이 아니라고.'
유길준은 경고를 알아들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자, 이선이 나섰다.
"위로는 성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단발과 양복은 오직 자신의 판단과 자유에 맡기고자 하옵니다. 다만 문무관은 국정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일이니, 복제 개정은 불가피한 일임을 아뢰옵니다."
"그러하옵니다. 부국강병과 종묘사직의 보호를 위하여 꼭 필요한 일이옵니다."
임금은 한숨을 푹 쉬더니, 결국 동의를 표했다.
"복제 개정이 종묘사직의 안위와 연결된다고 하니, 종묘사직을 이어야 할 과인이 어찌 반대하겠는가? 시행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조령으로 문무관 복장 규칙과 문무관 대례 복제식을 반포하는 바이다."
문무관 복장은 대례복(大禮服), 소례복(小禮服), 상복(常服) 3종으로 정하며, 모두 서양의 예복을 받아들였다.
복제개혁에 동의하는 개화파 관료들만 조정에 남았기에,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조정에서 사임했다. 조정에 남은 이들은 모두 단발하고 제복을 입었다.
일선의 중하급 관리들은 대부분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미 단발과 양복 착용을 한 군인과 경찰이 조정으로부터 상당한 우대를 받고 있기에, 이들의 심리적 저항은 크지 않았다.
이번에도 민간 차원에서는 단발, 양복 착용 여부를 개인의 자유에 맡겼기에, 당장 격렬한 반발로 이어지진 않았다.
개국 500년, 경장 7년 만에, 마침내 문무관의 외관이 일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