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간도 분쟁
1891년 12월. 태양력으로 역법을 전환할 때가 이르자, 청국의 항의가 있었다.
"정삭(正朔)을 정하고 널리 반포하는 건 천자의 고유한 권한입니다. 제후국인 조선에서 어찌 상국의 허가도 없이 책력을 멋대로 변경한단 말입니까?"
청국 상무위원 마건상이 외무부를 찾아와 항의했다. 원세개의 후임으로 온 마건상(馬建常)은 조선 내정과 외교에 불개입했으나, 천자의 위엄이 걸려있는 이번 일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오해이십니다. 중국을 제외한 세계가 태양력을 쓰고 있으니, 다른 나라와의 통상과 교섭에 있어 편의를 위해 양력을 쓰기로 한 것입니다. 청국에 보내는 국서에는 여전히 시헌력(時憲曆)을 쓰고 있습니다."
외무독판 김옥균이 논리를 들어 답했다.
"청국에 보내는 국서에만 대청 광서(光緖) 연호와 시헌력을 쓰고 있는 걸 모를 것 같소? 내부에서 쓰이는 문서, 서양에 보내는 국서에는 모두 조선 개국기원 연호를 쓰고 있잖소!"
마건상의 지적대로였다. 조선의 문서와 국서는 모두 청의 광서 연호를 쓰지 않고 '대조선 개국기원' 연호만 썼다. 올해 전환국에서 새로 발행된 은화와 백동화에도 '대조선 개국기원 500년'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조선에서는 조선의 연호를 쓰는 게 당연합니다. 외국에 보내는 국서에 광서 연호만 쓰면, 저들도 혼란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조선 연호와 서력을 병행해서 쓰고 있습니다."
김옥균은 크게 인심 쓴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청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부정한 것도 아니고, 여전히 청국에 신하의 예를 다하지 않습니까? 올해 동지사도 북경으로 떠나 황제 폐하를 알현할 터입니다."
"그저 허울뿐인 신하 노릇이 아니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오. 북경에서 분명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마건상은 경고를 하며 외무부를 나갔다.
동지사 남정철과 사절단은 북경에 도착했으나, 황제는 예년과 달리 알현을 거부했다.
"조선이 신하의 분수를 저버리고 제멋대로 구니, 황상께서 저들의 알현을 허용할 이유가 없다."
황제의 알현을 거부당한 동지사는 전통적으로 조선을 상대하는 예부(禮部) 방문도 거절당했다. 그나마 총리아문과 접촉을 취할 수 있었다.
"단순히 조선이 역법만 변경해서 이러는 게 아니오. 조선이 대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지 않으니, 황상께서 진노하시는 게 당연하오. 조선으로 돌아가 총리아문의 조언을 전하시오. 소국이 대국에 맞서는 건 옳지 않소. 이대로 대국을 홀대하면 분명히 뒤탈이 있을 것이오."
총리아문은 '조언'을 했지만, 사실상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동지사는 황제를 알현하지 못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 예상한 조선 조정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청국이 말로는 위협을 가했지만, 체면 때문에 조선을 상대로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동지사를 받아들이길 거부하니, 우리도 굳이 조공의 허례를 유지할 이유가 없겠습니다. 북경으로 보내는 사절을 중단하지요."
진작부터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던 김옥균이 강경론을 내놨다. 개화당 관료들이 일제히 지지했다.
"맞습니다. 이미 세계가 만국공법으로 통하거늘, 어찌 청국과 조선만 조공이라는 허례를 고수한단 말입니까?"
"기왕에 이리 된 것, 아예 청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합니다."
온건 개화파이자 친청 성향의 김윤식이 반대했다.
"청국과 주종관계를 유지하는 건 형식적인 것입니다. 외부의 침입을 받으면, 유사시 협력할 수 있는 나라는 청국뿐입니다. 헛된 자존심 때문에 청국을 적으로 돌리려합니까?"
"헛된 자존심이라니요? 지금 조선을 위협하는 외국은 다른 나라가 아닌 청국입니다!"
"실리를 따져야지, 형식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외다!"
"형식에 집착하는 건 조선이 아니라 청국이지요!"
영의정 김홍집이 중재에 나섰다.
"진정들 하시지요. 내 생각에 청국이 이렇게 나오는 건, 분명히 청 조정 내부의 역학관계에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한 이래, 황제의 주변으로 근황파들이 결집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북양대신 이홍장이 서양 열강을 상대로 너무 저자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홍장은 조선에 대해서도 관대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지요. 그러니 근황파가 가장 만만해 보이는 조선을 먼저 건드려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선의 분석은 정확했다. 이른바 '제당(帝黨)'이라 불리는 신진 근황파 관료들은, 북양함대라는 가장 강력한 군권과 외교권을 손에 쥐고 있는 이홍장을 경계했다.
근황파의 궁극적인 목표는, 광서제의 친정 이후에도 여전히 배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서태후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홍장은 서태후의 신임을 받고 있으니 더욱 눈엣가시였다.
이선은 매년 이홍장에게 은밀히 거액의 정치자금을 안겼고, 이홍장은 그 일부를 서태후에게 상납했다. 근황파들이 이런 유착 관계를 의심하여 이홍장에게 정치적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홍장이 조선의 내정에 불간섭 정책을 취하는 건 단순히 뇌물을 받아서가 아니라,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외세라는 변수를 염두에 두어서였다. 하지만 일본을 우습게 여기고, 러시아를 적대하는 근황파 관료들에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청나라 내부의 권력투쟁이 조선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지요. 일단 추이를 지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1892년, 개국기원 501년. 북방에서부터 변화가 감지가 되었다.
그동안 미비한 행정력으로 인해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 백성의 존재를 묵인하던 길림장군(吉林將軍)이, 강경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대청국에 거주하기를 원한다면, 모두 변발하고 대청의 풍습을 따르라. 세금은 오직 대청국에만 납부하라."
간도의 조선 백성들은 반발했다.
"지금껏 황무지를 개척한 건 우리들인데, 개간을 마치니까 추방한다고!"
"청국 관리놈들 배만 불러주려는 속셈 아니냐?"
"변발하고 호복(胡服)을 입으라니, 우리더러 조선을 저버리고 오랑캐가 되란 말이냐?"
3만이 넘는 조선 백성들은 변발 호복을 거부하고, 지금까지의 생활을 고수하기로 했다.
그러자 보복이 시작되었다. 길림장군은 병력을 동원해 조선인 마을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변발을 거부한다면, 모조리 체포하여 추방하겠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어떻게 개간한 땅인데, 우리는 못 나간다!"
길림장군은 결국 무력으로 조선인 정착촌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마을은 불태우고, 저항하는 자는 죽여라! 투항하는 자는 살려주어 조선으로 추방하라!"
조선 백성들은 자경단을 구성해 맞서 싸웠지만, 청군의 상대가 될 순 없었다.
아무리 길림에 주둔하는 청군이 전통적인 팔기군 중에서도 2류에 불과한 부대였다지만, 백성들이 대항하기엔 무리였다.
곳곳에서 조선인 정착촌이 공격당하고, 백성들의 피해가 늘어났다.
결국 조선 백성들은 두만강 너머 조선에 도움을 요청했다.
"되놈들이 우리 백성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두만강 국경을 지키는 제5연대 3대대, 종성(鍾城) 진위대는 조선 지방군 중에서 정예로 손꼽히는 부대였다. 주로 함경도 출신 포수로 구성되어 사격술 자체가 남다른데다, 최전방의 특성상 무기와 훈련도 특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
"이건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상부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오."
"동포의 피해를 어찌 지켜만 보고 계십니까?"
"이러는 동안에도 우리 동포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종성 진위대장 이범윤(李範允) 참령은 고심 끝에, 상관인 5연대장과 함경북도 관찰사에게 월경을 통보하고 두만강을 건넜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진위대원 제군, 강을 넘어 동포들을 구제하자!"
"와아!"
"되놈을 물리치자!"
진위대원 상당수는 청국에 대한 악감정이 상당했다. 종성 진위대의 주 업무는 가끔씩 국경을 넘어 약탈을 하러 오는 청국 마적의 격퇴였다. 마적은 번번이 진위대의 무력 앞에 패퇴하여 철수했지만, 신출귀몰하게 이동하는 마적의 존재는 진위대원들에게 짜증을 주었다.
이범윤 개인도 청국에 대한 악감정이 상당했다. 국경 너머 마적을 진압하는데 협조해달라고 요청해도, 길림장군은 마적은 자신의 관할에서 알아서 할 터이니 조선은 신경 쓰지 말라 답했다.
"마적도 제대로 못 잡는 놈들이, 백성을 상대로만 용맹을 발휘해? 비겁한 놈들!"
"못 잡는 거겠나? 안 잡는 거겠지. 유착관계가 있는 게 틀림없어."
"마적과 한 패나 다름없는 청군 놈들이 우리 백성을 괴롭히다니!"
이범윤의 지휘 하에 월경한 종성 진위대 800여명은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단숨에 간도로 진격했다. 보병 외에도 야포와 기관총까지 들고 진격하는 본격적인 공세였다.
"공격!"
"대조선 만세!"
갑작스러운 조선군의 출현에 청군은 당황했다.
"朝鮮?"
"殺!"
청군도 조선군의 기습에 저항했으나, 화력과 군기의 측면에서 조선군이 압도적이었다.
탕! 탕! 탕! 타다다다다당!
종성 진위대는 일제 사격으로 청군에게 화력을 퍼부었다.
독일식 군사교육을 받은 조선 장교단은 화력의 우위를 신봉했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돌격하여 싸우려 드는 청군 지휘관이 상대할 수가 없었다.
"승리다!"
"대조선 만세! 대군주 만세!"
조선군의 첫 '대외 원정'은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종성 진위대는 청군의 공격을 받아 포로로 잡힌 유민들을 구제했다.
"우리 조선군 만세다!"
종성 진위대는 조선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조선인 정착촌들을 하나하나 되찾았다. 수복한 조선인 정착촌에 태극기를 꽂고, 대조선령(大朝鮮領)이라는 팻말까지 써놓았다.
"뭐라고! 조선 놈들이 미쳤나?"
길림장군은 격노하여 추가 파병을 했지만, 진위대에게 번번이 패퇴했다. 무기 수준도 현저히 낮고, 군기도 떨어지는 길림군이 조선군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길림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런 덜떨어진 놈들······."
길림장군은 즉시 '조선군의 불법 월경'을 북경으로 보고했다.
뒤늦게 이범윤의 보고를 받은 함경북도 관찰사 이중하는 당황했다. 즉시 전보를 쳐서 회군을 요구했지만, 이미 두만강을 건넌 뒤였다.
이중하는 한양에 상황을 보고한 뒤, 자신의 선에서 결단을 내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종성 진위대가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이중하는 5연대 사령부와 협의하여, 두만강으로 병력을 집결하게 했다. 경성(鏡城)에 있던 5연대 2대대도 두만강 방향으로 이동했다.
- 간도 일대에서 청군에 의한 조선 백성 공격이 다수 목격됨.
- 5연대 3대대, 동포의 요청을 받아들여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진격.
국경분쟁이 전투로까지 이어지자, 전문을 받은 군무독판 이선도 예측 불허의 상황에 놀랐다.
"현지 상황을 신속히 보고하라!"
- 청군과 교전, 압도적 승리. 간도의 정착촌을 수복하고 진격을 멈춤.
- 5연대 2대대는 두만강으로 이동 중.
"역시 청군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니까!"
"강경하게 나오면 저들도 어쩔 수 없소!"
군부의 장교와 관료들은 승전 소식에 기뻐했다. 승리 소식은 기쁜 일이었지만, 문제는 뒷감당이었다. 이선은 냉철함을 유지했다. 군부의 총수인 그는 조선군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조선은 청국과 일전을 벌일 능력이 없소! 이 이상 확전되는 건 막아야 하오. 일단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리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 하시오. 백성들에게 위해가 가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이선은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북경은 격노했다.
"조선군이 감히 천조(天朝)의 영토를 범하여 천병(天兵)을 해쳤다고 합니다!"
"조선이 미치지 않고서야?"
"조선이 서양 오랑캐의 영향을 받더니,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조선을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조선이 황명을 받아들이길 거부한다면, 정벌해야 합니다!"
북경으로부터 그 어느 때보다 강경한 전문을 받은 마건상이 군무부로 들이닥쳤다. 외무부가 아닌 군무부를 찾았다는 점에서, 목표를 명확히 한 것이었다.
이선은 문관의 제복이 아닌 군복 차림으로 마건상을 맞이했다. 상징적인 표시였다. 그는 외교적 타협을 모색했지만, 청국에 순순히 굴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