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71화 (171/812)

170화 개국기원절(開國紀元節)

조청 간의 협약이 체결되고, 이선은 후속처리에 들어갔다.

"청국의 간도 영유권을 인정한 것은, 저들의 논리가 옳아서라기보다, 저들의 힘이 아직 우리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힘을 축적해야할 시기이지, 발산할 때가 아닙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다. 진위대가 3류도 못되는 길림 팔기군을 이겼다고 좋아할 시기가 아니었다. 힘을 키워야 했다.

국경 분쟁의 책임자가 한성으로 소환되었다. 함경북도 관찰사 이중하, 5연대장 권동수 부령, 종성 진위대장 이범윤 참령이 원수부에 출두했다.

이선은 엄한 어조로 말했다.

"비록 간도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고는 하나, 하마터면 청국과 전면전까지 이어질 뻔 했습니다. 중앙의 명령 없이 멋대로 병력을 움직인 건 군율을 어긴 죄요. 이런 경우 군법에서 어떻게 처벌합니까?"

"······ 사형입니다."

이범윤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청국 병사들이 우리 동포들을 학대하는 걸 지켜만 볼 수 없었습니다. 모든 책임은 명령 구조를 깨트린 소관에게 있습니다. 두 분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소관이 책임을 지겠습니다."

"소관도 결국 5연대 병력을 이끌고 함께 국경을 넘었으니, 이 참령만 처벌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상관인 소관이 책임을 져야 마땅합니다."

"아닙니다. 애초에 관찰사로서 간도 백성들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한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두 장교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공이 있으니, 관대한 처분을 내려주십시오."

권동수와 이중하가 잇달아 자신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선의 곁에 있던 내부협판 이범진(李範晉)이 머리를 조아리며 청했다.

"내부협판으로서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저의 죄가 가장 큽니다. 대죄(待罪)를 청하니 다른 이들은 용서해주십시오."

이범진은 대원군의 측근으로 경찰력을 이끌었던 이경하의 아들이었고, 이범윤과는 사촌이었다.

이범진은 하급 관리 시절 청국 상인들의 횡포를 저지하려다, 적반하장으로 청국 군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 적이 있었다. 이선이 개입하여 책임자를 처벌하고 사과를 받았으나, 이범진이 이후 강경한 반청 자주파가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촌인 이범윤도 반청 자주 성향을 공유했다. 이범진은 책임감을 느꼈다.

"책임을 계속 위로 올리면, 군무독판인 내가 책임을 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사직하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좌중이 모두 놀랐다.

"안 됩니다! 완화군 대감께서 물러나시면 어떡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를 처벌해주십시오."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백성들이 귀관을 영웅으로 여기는데, 여론을 고려하면 과한 처벌은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묻지 않을 수는 없지요. 직위해제하고 대기발령하겠습니다. 당분간 한양에서 쉬시오."

간도 전투의 승리를 언론이 떠들썩하게 보도한 덕에, 이범윤 등은 '간도 백성을 구하고 조선의 무위를 떨친 영웅'으로 칭송 받았다. 강하게 처벌하면 청나라에 굴복하는 인상을 줄 터였다.

이선은 관대한 처벌을 결정했다. 대신 자신이 책임을 지기로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감께서 물러나려 하십니까?"

"내 뜻은 굳건하니 그렇게 합시다. 나는 성상께 사직 상소를 올릴 생각입니다."

이선은 관대한 처벌로 마무리 짓고, 바로 사직 상소를 냈다.

"책임은 군무독판이자 원수부 군무국장으로서 군부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신에게 있사오니, 비록 죄는 있으나 공도 큰 이범윤 등은 관대히 처우하시고 신이 물러나게 해주십시오."

임금은 사직 상소를 반려했지만, 이선은 끝내 사직을 관철했다.

사직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와 백성을 가리지 않고 여론이 이선을 칭송했다.

"역시 완화군 대감은 그릇이 달라. 공은 아랫사람에게 돌리고 책임은 스스로 지다니."

"애초에 군 대감이 아니었더라면 조선군이 이렇게 강해질 수나 있었겠나? 아라사와 법국, 덕국이 조선을 도와 청국을 압박했겠나? 그런데도 공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시다니······."

"왕족의 품격은 다르네. 역시 대단한 분이야."

이선이 사직하자 청국도 만족해했다. '책임자 처벌'은 충분히 성의를 보인 셈이었다.

그날 밤, 김옥균과 개화당 관료들이 이선의 집을 찾았다.

"정녕 이대로 물러나실 생각이십니까?"

"책임을 지기로 했으니 당연히 물러나야지요."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감께서 없으면 조정은 어찌하라고······."

"나 한 사람 물러난다고 조정 업무가 마비되면, 그건 정상적인 정부가 아닐 터인데."

이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군제 개혁과 징병령이 정착되어 군무독판으로서 해야 할 일은 대략 마무리 졌으니, 후임자에게 물려줘도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김옥균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감께서는 갑신년 이래 개화를 대표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조정에 대감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등이 일제히 이선의 사직을 만류했다.

"직책을 맡지 않는다고 해서, 국정을 도외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분간 나는 직함 없이 자유롭게 여러 분야를 살펴볼까 합니다. 나름대로 할 일이 많다는 뜻이지요."

이선은 결코 권력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단지 표면적인 직위에서만 물러날 뿐이었다.

개화당 관료들은 비로소 이선의 뜻을 이해했다.

"대감의 깊은 뜻을 알겠습니다."

"군 대감께서 조정에 없으신 만큼, 저희가 더욱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다들 고맙습니다. 조정을 잘 부탁하지요."

간도 분쟁은 조선에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청나라가 작정하고 조선을 쳐들어오려 한다면, 현시점에선 외교적 방법 밖에 없었다.

외세의 침입 우려는 여론의 불만을 잠재우고, 동원 체제를 정당화시켰다. 근대화 개혁과 집행은 더욱 강경하게 실시되었다.

군비를 더 강화해야 했다. 이선의 후임으로 군무독판에 취임한 박영효는 1893년도 징병을 더욱 엄격하게 시행하기로 했고, 상비군 규모를 늘렸다. 1894년까지 7개 여단 14개 연대를 목표로 했다. 한성부에 2개 친위 연대, 13도에 각 1개 연대씩 징병을 완료할 예정이었다.

해군 건함은 워낙 돈이 많이 들어 당장 강화할 수 없었으나, 상륙에 대비해서 요충지마다 해안포를 설치했다.

꼭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해안 봉쇄에 대비해서 철도 부설에도 속도를 올렸다. 기존의 조선은 대부분의 물류를 수로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앞으로는 철도로 전국을 이을 생각이었다. 1차 사업으로 선정된 경부선과 경의선의 부설은 1894년까지 완료될 예정이었다.

여러 목표에서 볼 수 있듯이, 단기적으로 모두 1894년에 맞춰져 있었다.

개국기원 501년, 1892년 9월 7일.

이 날은 조선의 개국기원절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개창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이 해는 1392년 조선 왕조 건국으로부터 특별히 5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본래 국가기념일은 모두 양력으로 환산하여 정하려 했으나, 개국기원절만은 음력 7월 17일에 지내기로 했다. 연도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양력 계산도 어렵고, 14세기에 쓰이던 율리우스력과 현재 쓰이는 그레고리력 간의 차이도 고려해야 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다음날인 9월 8일은 임금의 탄신일인 만수성절(萬壽聖節)이었으므로, 임금의 41번째 탄일을 겸하여 성대한 진연이 준비되었다.

임금과 왕족, 신료들은 종묘에 의례를 올리고,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하례를 행하였다. 이 날만큼은 임금 이하 신료들의 복장은 모두 옛 조복차림이었다.

"생각건대 우리 태조는 하늘과 사람의 의사에 순응하여 왕업을 이룩하고 선대 임금들에게 물려주었으며, 열성(列聖)은 전대의 업적을 두터이 하여 위업을 이어받고, 그것을 후세에 굳건히 지켜낸 결과 업적을 거듭 빛내고 하늘의 의사를 잘 받들었다······."

임금의 조문 낭독이 끝나자, 왕족을 대표해 이재면과 신료를 대표해 김홍집이 앞으로 나섰다.

"대조선국 만세! 대군주 폐하 만세!"

만세 선창에 일제히 신료들이 화답했다.

"대조선국 만세! 대군주 폐하 만세!"

'만세'와 '대군주 폐하'는 갑신경장 이후 비공식적으로 써왔으나, 공식석상에서 문무신료가 일제히 외치기는 처음이었다.

여전히 청나라에 보내는 문서에는 제후를 자처했으나, 일본과 서양각국에는 독자적인 개국기원 연호를 쓰고 '짐(朕)'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

간도 분쟁 이후로 조선 전반에 청에 대한 적개심이 깔리면서, 청에 대해 자주독립을 선포하고 칭제건원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는 너무 급진적인 조처로 반려되었으나, 건국 500주년 개국기원절을 기점으로 실질적으로는 외왕내제(外王內帝) 체제에 들어간 것이다.

경복궁 인정전의 하례는 조선 고관들만 참석했으므로, 문제가 발생할 건 없었다. 문제는 진연에서 있었다.

진연은 대군주의 친림 하에 각국 공사관의 외교관과 외국 고문관, 교사 등을 초대해 경회루에서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생각건대 하늘이 우리 종묘사직을 도운 결과 나라의 운수가 장구하여 경사스러운 개국 500년이 되는 명절을 맞이하였으니, 기쁨과 축하하는 마음은 여느 해보다 특별하오. 이로써 연회를 열어 조정의 신하들과 외국 사절을 한 대청에 모아 놓고 축하하는 술잔을 함께 들어 널리 경축하는 뜻을 보이니 드물게 성대한 일이오."

조선에 가장 오래 근무 중인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필두로, 각국 공사가 임금에게 예를 표했다.

"국왕 폐하, 러시아 황제 폐하께옵서 국서와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황제 폐하를 대리하여 조선국의 건국 500년과 국왕 폐하의 탄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귀국 황제 폐하의 은의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뜻을 전해 주시오."

부임 순서대로 예를 표하다가,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순서가 왔다.

"대군주 폐하, 삼가 일본국 천황 폐하의 명을 받들어, 조선국의 건국 500년과 대군주 폐하의 탄신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순간 청국 상무위원 마건상의 눈이 돌아갔다. 그동안 각국 외교관은 영어나 프랑스어로 축하를 했기에, '폐하(Your Majesty)'라는 표현은 통역하기 나름이었다.

하지만 오토리 공사는 일본어로 명백히 '헤이카(폐하, 陛下)'라고 존칭을 올렸다. 이는 통역할 필요도 없었다.

마건상은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참았다. 하지만 연회가 시작되자 바로 오토리를 찾아가 따졌다.

"일본 공사, 이 무슨 참람된 짓이오? 조선 국왕은 대청국 황제 폐하의 제후요. 제후에게 어찌 황제에게 쓰이는 폐하라는 존칭을 올린단 말이오?"

마건상의 지적에, 조선 관료들이 불쾌감을 느꼈다. 조선 관료들을 대신해 오토리가 답했다.

"조선은 조일수호조규 이래 일본과 동등한 자주지국임을 알렸으니, 마땅히 조선에서 칭하는 바와 같이 대군주 폐하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조선은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 '대군주'로 칭했다. 일본은 천황을 자처하는데, 조선은 국왕을 자처하면 격이 너무 떨어져 보임을 감안해서였다.

일본도 비공식적으로 '대군주 폐하'라는 존칭을 써주었다. 그런데 공식석상에서 일본 측이, 청국 외교관이 보는 앞에서 대군주 폐하라고 지칭하는 건 처음이었다.

"일본은 조선이 황제를 참칭하라 권하는 것이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이는 당연한 조선의 권리입니다."

오토리의 답에, 조선 관료들은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수긍하는 의사였다. 마건상은 불쾌감을 표했다.

"보아하니, 조선이 일본과 내통하여 중국에 반역할 뜻을 가졌나보오? 그래서 월경하여 천병에 맞선 것인가?"

김옥균이 정색하며 말했다.

"상무위원, 오늘은 조선의 개국기원절이자, 성상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어찌하여 좋은 날을 망치려 하십니까?"

"조선에서 개국기원을 자처하는 것도 분수에 어긋나는 일이오! 조선은 바로 그 개국 이래 중국의 제후란 말이오. 애초에 제후의 신분으로 감히 묘호를 쓰는 것도 참람한 일이었소. 다만 조선의 내정은 자주이니, 그동안 무엇을 해도 중국은 관대히 넘겨주었소. 그런데 이제는 서양과 일본을 끌어들여 노골적으로 중국을 능멸하니, 황상의 신하가 되어 어찌 참을 수가 있겠소!"

각국 공사들이 만류했지만, 마건상은 강경했다.

"아라사, 덕국, 법국이 조선을 부추겨서 중국에 맞서게 했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마건상과 청국 외교관들은 연회석상에서 나가버렸다.

개국기원절 진연에서 청국 외교관이 불쾌감을 표명하고 나갔다는 소식은, 바로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 신임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는 전문을 받아보며 씩 웃었다.

"오토리 공사가 말 한마디로 청국을 격동시켰군."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가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입니다. 뭐, 실속이 사라질수록 체면에 더 집착하는 법이지요."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중장이 빈정거리듯이 답했다.

"청국 정토(征討) 계획은 어찌 되고 있습니까?"

"참모본부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토 총리도 몰라야 합니다. 그 소심한 원로 어르신은 청국에 맞선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하거든."

"하하, 걱정 마십시오. 목표한 대로 8개 사단이 완비되면······."

"서양이 일본의 불평등조약 개정을 거부하는 건, 아직 일본이 약하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일본의 국가적 사명인 불평등조약 개정의 사명을 갖고 외무대신에 취임한 무쓰는, 참모차장 가와카미 와 함께 전혀 색다른 해결책을 모색했다.

"청국을 꺾고 동양의 패자가 되기 전에는, 서양은 계속 일본을 우습게 여길 터. 러시아로 인해 북방으로 가는 길이 막혔으니, 남쪽에서 활로를 찾아봐야지요."

무쓰와 가와카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171. 시찰(視察)

군무독판 직위에서 사임한 후, 이선은 종친에게 주어지는 명예직인 영종정경만 맡았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실직(實職)도 맡지 않았지만, 개화당을 통해 배후에서 계속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행동의 자유를 얻게 된 이선은, 조선 13도를 시찰하며 개혁의 진행 상황을 직접 살펴보기로 했다.

"조정의 일을 잘 부탁합니다. 전보를 통해 주기적으로 연락하지요."

전국적으로 전신이 깔려있으니, 한양에 없어도 정보의 부재는 걱정하지 않았다.

"예,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급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돌아올 터이니, 아무쪼록 여러분이 계속 수고해주십시오."

"군 대감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김옥균과 개화당 지도부가 고개를 조아리며 이선을 환송했다.

이선은 안영흠과 장무영, 왕실 호위대에서 차출한 정예 호위병을 거느리고 개성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경의선 철도 부설은 한창 진행 중이었고, 1단계로 공사가 완료한 개성까지 먼저 개통했다. 프랑스가 차관과 기술을 제공한 경의선 부설은 1894년까지 완공하는 걸 목표로 했다.

"이러니까 꼭 예전처럼 함께 떠나는 것 같군요."

안영흠이 새삼스럽게 과거를 회고했다. 1880년, 이선은 안영흠과 장무영 두 사람만 데리고 개성에서 청나라로 떠났다.

"그런 시절도 있었지. 불과 12년 전인데도, 너무 먼 옛날 같구려."

이선은 빙긋 웃었다. 쫓기듯 떠나야했던 그때와 달리, 이제 그는 사실상 조선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개혁의 성과를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다.

개성에 도착한 이선은, 개성 유수의 환영을 받았다.

"어서 오십시오, 군 대감. 개성에 왕림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연회를 준비할까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유람하러 온 게 아니니 바로시찰을 나갔으면 합니다."

이선은 정중히 사양하고, 바로 현지 시찰에 나섰다. 송상(松商)을 대표하는 위치에 올라간 송금도가 영접에 나섰다.

"홍삼 생산은 잘 되어 갑니까?"

"예, 생산량과 판매량이 1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증대했습니다."

"과연 대단하군."

이선은 개성 교외에 자리잡은 엄청난 규모의 인삼밭을 보며 감탄했다.

홍삼은 국가 소유의 전매(專賣)였지만, 실질적인 생산과 판매는 송상에게 맡기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형태였다.

"근래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청국에서 고려 홍삼이라고 하면 없어서 못 팔 정도지요."

홍삼이 아편 치료의 특효약이라고 알려지면서, 청국에서는 엄청난 수요가 있었다. 홍삼 판매로 얻는 삼포세는 조선 조정의 중요한 소득원이었다.

"홍삼뿐만 아니라, 경장 이후 개성의 상업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근래 한성과 개성을 잇는 철도가 개통하면서 더욱 번영하고 있지요."

송금도의 말처럼, 개성 시내는 번화하고 북적였다. 조선이 기존의 농본억상에서 개화 이후 상업 장려로 변화하면서, 예전부터 상업이 발달한 개성은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송상은 공동으로 출자하여 근대적 회사를 차리고, 대외무역에 나서고, 은행을 설립하고, 얻은 이익을 국내 산업에 투자했다.

"이 모두 개화 정책 덕분입니다. 개성 사람들은 모두 군 대감을 칭송해마지 않습니다."

본래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은 전통적으로 한양에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는 지역이었으나, 경장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성상의 은혜지요. 조정에서도 여러분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새로이 성장하는 상업 부르주아지는 개화 정책의 수혜자이자, 정권의 지지기반이 되어주었다. 오사카 상인이 메이지 신정부의 기반이 된 것과 유사했다.

개성 시찰을 마친 이선은 평양으로 향했다. 개성 북쪽으로는 철도가 한창 부설 중이라, 이선은 공사현장에 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인부를 독려했다.

평양까지는 말을 타고 이동했다. 기존의 의주대로를 확장한 신작로(新作路)가 뻗어 있었다. 철도 부설과 도로 확장은 조선의 교통과 물류를 혁신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선은 최대한 조용히 다니고 싶었으나, 가는 곳마다 지방관들이 열렬히 환영하며 반겼다. 이선은 환대를 정중히 사양하고, 바로 목적지로 향했다.

조선 제2의 도시, 평양에 도착하자 환대는 최고조에 달했다. 평안남도 관찰사, 평양 진위대장, 향회 의원 등이 모두 도열하여 완화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마침내 이선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군악대가 연주를 시작했다.

빰빠라밤-!

"완화군 대감! 평양 관민들은 대감께서 친림해주신 것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입니다!"

이선은 부담감을 느꼈지만, 자신을 기다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위해 한 사람씩 격려를 했다. 이들은 황송해하며 격려를 받았다.

"군 대감, 을밀대에 환영 연회를 준비해놓았습니다. 참석해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호의는 고맙지만, 나는 주민에게 민폐를 끼치려고 온 게 아닙니다."

"민폐라니요, 그 무슨 말씀을. 평양 관민들이 군 대감을 환영하는 뜻으로 준비한 자리입니다."

평양의 관료와 유지들은 조정의 최고 실세로 알려진 이선에게 잘 보이려고 필사적이었다.

"조선 제일이라는 평양 기생들이 군 대감을 모시는 영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한창 청년인 호위대원들이 그 소리에 솔깃해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뭐, 좋습니다. 그럼 호의를 사양치않지요."

'평안 감사는 제 싫어도 그만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평안 감사는 지방관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였다. 평양이 조선 제2의 도시이자, 전통적으로 상업이 발전한 도시이기에 부(富)가 넘쳤다. 평양 기생이 조선 제일로 유명하다는 것도, 결국 상업의 발달과 관계가 있었다.

이선이 평양 기생의 환대를 받으며 연회를 즐긴 것도 딱 첫날뿐이었다. 그는 바로 다음날부터 현지 시찰에 나섰다.

"조정은 평양을 특별히 여기고 있습니다. 수천 년 전통의 고도(古都)이자 한양 다음 가는 도시이며, 북방으로 진출하는 거점이 될 곳이니 말이지요."

이선은 평양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했다. 북방에 은밀히 야심을 품고 있는 이선에게, 평양은 북방을 향해 열린 창이었다.

본래 상업이 발달하고, 인근에 자원이 많으며, 부지가 넉넉한 평양 역시 식산흥업 정책의 수혜자가 되었다. 평양 일대에 조선 최초의 공장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대감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실로 영광입니다."

"지금의 조정만큼 서북 사람들을 우대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저희는 조정을 위해 충성할 것입니다."

조선의 서북(평안도·함경도) 차별은 고질적인 문제였고, 조선 최대의 지역반란인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원인이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 세도정권 하에서 서북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대원군 집정 이후 차별이 완화되었고, 갑신경장 이후에 서북 사람들이 중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차별이 덜한 군부에서 서북 출신들이 약진했다. 군부의 수장이 바로 이선이었으니, 근대화의 수혜를 받게 된 서북 사람들이 이선을 존경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이치였다.

"그만큼 서북 사람들이 새 시대에 적응이 빠른 덕이 아니겠습니까? 저기 보이는 젊은 장교처럼 말이지요."

이선의 지목에, 좌중의 시선이 말석에 있는 청년 장교에게 집중되었다. 장교는 이선을 향해 경례를 했다.

"부위(副尉) 홍범도! 완화군 대감께서 저를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청년 장교는 바로 홍범도였다. 무관학교 1기로 졸업한 이후 장교로 임관한 홍범도는, 근래 평양의 4연대 사령부로 배치 받았다.

"기억하다마다. 홍 부위는 무관학교 1기 생도고, 내가 직접 면접을 봤는데. 이리 보게 되니 반갑구려."

이선이 반갑게 홍범도와 악수를 나누며 격려했다. 좌중은 모두 홍범도가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마침 4연대 시찰을 나가려고 했는데 잘 됐군. 안내를 부탁하겠소."

"옛, 영광입니다!"

"4연대로 배치 받은 지 얼마나 됐소?"

"올해 초였습니다."

평안도 사람인 홍범도로서는 금의환향이었다. 옛 평양 병영 나팔수였던 홍범도가 신군의 장교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신식 제복을 입은 홍범도의 주위로 사람들이 신기한 듯이 모여들었다. 홍범도는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올 초에 5연대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부럽던지, 연대원 모두가 출동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가 장하오. 훈련에 열성을 다하면, 언젠가 빛을 발할 날이 오겠지."

기존의 친군 서영(西營)을 개편한 4연대, 평양 진위대는 지방군 중에서도 최정예로 평가받는 부대였다. 중앙의 친위대 못지않은 높은 훈련도와 무기로 무장했다.

평양의 4연대 외에도, 평북 지방을 관할하는 6연대 역시 정예 병력이었다.

국경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거둔 함경도의 5연대를 포함, 서북군은 조선에서 각별히 신경을 쓰는 부대였다.

청국과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3개 연대를 새로 평안도와 함경도에 배치하기로 했다. 평양에는 독립여단이 창설될 예정이었다. 이선의 서북 시찰은 이와 관계가 있었다.

"연대, 분열(分列)!"

4연대 장병들이 정기훈련을 개시했다. 이선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본래 해왔던 훈련이었다.

보병의 분열행진과 사격연습, 포병과 기병의 훈련에 이르기까지 평양 진위대는 편제를 완료한 신식 군대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한양의 친위대 못지않은 정예병이라 평가받는 평양 진위대답게,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흠,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군. 훌륭합니다."

유사시에 대비하여, 평양은 요새화가 진행 중이었다. 독일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 평양성 주위에 요새와 포대가 설치되었다.

'만약 청국과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한양과 평양이 적의 첫 번째 목표가 될 것이다. 전쟁을 막는 게 내 목표지만, 유사시에는 반드시 대비해야지.'

이선은 평양 진위대에 당부의 말을 전했다.

"제군은 조선 제2의 도시 평양을 책임지는 부대이자, 유사시 서북 전선을 지켜야할 부대입니다. 훈련에 만전을 기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된 훈련이, 반드시 전장에서 보답을 받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진위대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

"대조선국 만세! 대군주 폐하 만세!"

이선은 평양 시찰을 마치고, 의주에 들러 조청 국경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근래 조청관계가 악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무역이 이루어지는 의주 개시(開市)는 활발했다.

"경의선이 완공되면, 물류의 혁신이 이뤄지겠지."

'병력 수송도 신속해질 것이고.'

6연대와 국경 방비를 논의한 이선은, 평안도를 떠나 함경도로 향했다.

조선의 두 번째 개항장인 원산은, 일본 및 러시아와 교류하며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나가사키-부산-원산-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정기항로는, 서해 못지않게 동해도 대외무역을 발전시켰다.

특히 러시아와의 관계가 부쩍 가까워지면서, 함경도 일대는 러시아와의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함경도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 내내 가장 천대받던 지역이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개화의 바람을 재빠르게 잡을 수 있었다. 연해주에서 성공한 고려인은 대개 함경도 출신이었고, 이들의 성공은 함경도 주민들을 자극했다.

"배워야 산다!"

양반 계층의 미약함이 오히려 실용적 교육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어와 영어, 각종 외국어와 서양 지식이 환영받았다.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인 원산학사가 상징하듯, 함경도 주민들의 근대적 교육열풍은 대단했다. 갑신경장 이후 하층 계급 출신으로 성공하는 이들이 나타나자, 교육열은 더욱 자극을 받았다.

"조선의 대외무역은 청국과 일본에 의존도가 높은데, 함경도에 와보니 다른 이야기군요."

이선은 모처럼 얀코프스키와 재회했다. 이선의 배려로 함경도에 대규모 목장을 설립한 얀코프스키는, 조선군의 기병으로 활용될 말을 납품하고, 소를 러시아 무역에 판매하여 부를 축적했다.

얀코프스키는 이를 기반으로 조선-러시아 무역의 큰 손으로 떠올랐다.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던 폴란드 정치범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조선 종단철도가 결합된다면, 조선은 유럽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수립할 수 있을 겁니다."

"나 역시 20세기에는 그런 날이 오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조선이 나아갈 길은 결국 북방에 있다고 믿으니까요."

조선의 북쪽 끝, 최전방 종성에 도착한 이선은 1년의 절반이 겨울이나 다름없는 강추위 속에서 복무하는 종성 진위대와 변계 경무서 대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제군의 노고가 있기에, 우리 동포들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5연대의 '불법 월경'에 대해서는 일제 책임을 묻지 않았다. 특히 병사들에게 일절 불이익이 없게 하였다.

이선은 종성에 머무르는 동안 최전방의 병사들과 같은 천막에 머무르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격려를 했다. 장병들은 감격하여 외쳤다.

"대조선과 우리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여러분의 노고에 반드시 보답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이선은 두만강 너머, 북방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북방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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