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72화 (172/812)

172화 녹두장군

서북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이선은, 조정에 현황을 보고하고 향후 대책을 마련했다.

이선은 이윽고 삼남 시찰을 준비했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일대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삼남, 특히 영남은 보수적이라 조정의 방침에 반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호위에 만전을 기하십시오."

"충고 잊지 않지요."

장무영과 호위대원이 경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선은 가는 곳마다 무력으로 겁을 줄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지방도 진위대와 순검들을 통해 확실히 통제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군 대감!"

이선이 가는 곳마다 지방관과 진위대장이 환영했다. 진위대가 없는 곳에는 경무서장이 순검을 동원해서 호위했다.

"근래 이 고을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아주 평안합니다."

"세금 징수와 징병 확보는?"

"계획대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민심의 동향은?"

"향촌 사족 일부가 불평하는 정도인데,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농민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토지세 인상과 징병령에 반발하는 자들이 없잖아 있긴 한데, 그래도 이만하면 예전과 비교해서 훨씬 나으니 큰 불평은 없지요."

"개화에 대한 반발은?"

"간간이 서양인에 적대감을 보이는 자들이 있기는 하나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일은 없습니다."

지방관이야 중앙에서 파견한 사람들이니 조정에 충성함은 당연했다. 예전에는 매관매직으로 지방관직을 사고팔았기에 탐관오리가 허다했다. 하지만 탐관오리를 근절하고, 새로 임용된 지방관의 실적으로 승진 경쟁을 붙이니 크게 달라졌다.

"충군애국이야말로 관료의 소양이다!"

중앙의 방침에 순응하여, 각종 개화 정책을 집행하고 세금과 병력을 보내는 데 집중했다. 최소한 '애민'은 하지 않더라도 '충군애국'을 소임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지방 곳곳에 설치되는 진위대, 경무서, 학교들도 다르지 않았다.

진위대 장교와 경무서 순검의 상당수는 옛 포군(砲軍) 출신이었다.

포군은 대원군 집정기에 양요를 대비해 전국 곳곳에 설치한, 일종의 향토의용군 체제였다. 포군은 문자 그대로 각 지방의 포수들을 군대로 끌어들인 것이지만, 지휘부는 지역의 하층 양반과 상층 양민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대원군의 충실한 지지기반이었고, 임금의 친정 후에도 포군 체제는 계속 유지되었다.

임오군란과 갑신경장 이후, 지방 군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포군을 연착륙시키는 게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실제 역사에서, 이들 포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민보군과 친일조정에 반대하는 을미의병의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하지.'

주변부라 할지라도 지배층에 속하는 포군은, 결코 동학농민군의 혁명적 사회변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은 민보군을 조직해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그런데 을미개혁으로 지방 제도가 개편되면서 포군 조직이 해산되자, 포군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들이 보기에 조정의 행태는 토사구팽이나 다름없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이라는 충격적인 사태가 잇달아 발생하자, 위정척사파 유림을 중심으로 항일의병이 일어났다. 하지만 유림이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은 한계가 있었다. 바로 의병의 군사력을 제공해준 게 지방 포군들이었던 것이다.

갑신경장 이후, 개화당 신정부는 각 지방의 포군을 끌어안았다. 포군 지휘부의 일부는 군사교육을 받아 진위대 장교로 임용되었고, 일부는 경무서 순검이나 지방 관료로 재취업을 보장받았다.

무관학교 생도들이 장교로 임용되면 점차 이들로 장교진이 대체되겠지만, 과도기적인 과정이었다.

포군의 포수들도 징병제가 실시되기 전, 지방 진위대의 근간이 되었다.

"무자비한 개화당 정권이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우리의 공로를 이해해주는군."

포군 지휘부는 기본적으로 출세와 거리가 멀었던 하층 양반이나 상층 양민이었고, 신정부가 관직을 보장해주자 만족감을 표하고 지지층이 되어 주었다.

이들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는데도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지방에서 '멋들어진 군복과 큰 칼을 차는' 권위를 보장해 주는 데 만족했다.

실제 역사에서 향촌 사족과 포군이 조정에 맞서 연합하게 된 것과 달리, 진위대와 순검으로 변신한 포군과 기존 사족은 지방의 권위를 놓고 경쟁하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메이지 일본과 달리, 향촌 사족의 무력 반란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포군에 속하지 않은 하층 양반이나 상층 양민도 다르지 않았다. 아전 계층의 퇴진으로 비게 된 지방 행정직을, 지방의 관직 없던 지식인들이 시험에 응시해서 채우게 되었다.

지역별로 학교가 기하급수로 늘어나니 교사직도 사범학교 졸업생으로는 수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주로 가난한 지식 청년들이 단기 교육을 맡고 교사에 임용되었다.

박봉이라 할지라도 지방 행정직이나 국립학교 교사도 어엿한 '관리'였기에, 하층 출신 지식인들의 출세욕을 채워 주기에 충분했다.

전국적으로 설립된 향회도 사대부들이 반발해 퇴진하면서, 새로 형성되는 지방 지배계층의 무대가 되었다. 특히 개화의 혜택을 받아 부를 축적하게 된 신흥 지주와 상공인들이 향회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지방에 가는 곳마다 관료, 진위대, 순검, 교사, 신흥 지주, 상공인들이 이선을 환영했다.

개화의 세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유림, 기득권을 빼앗긴 향촌 지주, 과도한 세금과 징병에 반발하는 빈농은 이선이 탐탁지 않았겠지만, 이들이 조직화해서 위력을 행사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 군은 완화군 대감의 친림을 환영합니다!"

"이 모두가 조정의 개화 정책 덕분이니······."

지방에 가는 곳마다 관료와 향회에서는 조정의 덕을 칭송했다. 하지만 이선도 눈과 귀가 있었기에, 이들의 아첨이 모든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선은 경북 지역을 시찰하면서 처음으로 적대적인 분위기를 감지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영남 사람들의 상당수는 개화 정책을 반기지 않습니다."

경상북도 관찰사가 솔직한 의견을 말했다.

영남은 본래 유림의 본거지라 할 정도로 많은 급제자를 배출했지만, 무신란(이인좌의 난) 이후 영남 사족은 권력에서 배제됐다. 이는 영남 사족의 주류인 남인의 실각과 관계가 있었다.

오랫동안 실각한 영남 사족은 갈수록 보수화됐고, 조정과 경화사족이 개화 정책으로 나아가니 더욱더 반발감을 느끼고 위정척사를 고수했다. 개화에 반발하는 영남 만인소가 괜히 등장한 게 아니었다.

"과세와 징병에 대한 저항이 상당합니다."

신정부의 양전, 지조 개정, 소작료 제한은 삼남의 지주와 농민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다.

전통적인 호남의 대지주들은 상업 지주로 재빨리 갈아타는 이들도 등장했고, 소작농들은 조정이 소작농 보호와 자영농화에 나서자 '선정'을 기뻐했다.

하지만 많은 인구 대비 농업 생산기반이 약해, 중소지주와 소규모 자영농 중심으로 사회가 형성된 경상도 지역은 신정책의 수혜보다 압박이 더 컸다.

중소 농민들은 상업 지주가 운영하는 자본주의적 농업과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다. 토지세와 인두세는 계속 인상되었고, 인구대비 할당량으로 인해 징병 해당자는 가장 많았다.

부산과 개항장을 중심으로 부를 축적하는 이들도 있었고, 하층 지식인 계층이 출세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개화의 혜택에 비해 근대적 의무는 훨씬 과중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대책을 마련해야겠군요. 적절한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전체적인 부는 성장했지만, 분배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선은 '문명개화'의 어두운 면을 보고, 고민을 안은 채 전주로 향했다.

전주는 당시 전라도의 가장 큰 도시이자, 조선 왕조의 본향이라 할 수 있었으므로, 특별히 여겨지는 지역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慶基殿)은 성지처럼 여겨졌다.

이선은 전라북도 관찰사와 관료, 전주 진위대장, 전주 향회의 의원들과 경기전에 제사를 올렸다.

완화군을 맞이하는 환영연에서,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과연 음식으로 유명한 고장다웠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농민이 이와 같은 음식을 맛볼 수 있겠는가?'

"전주는 우리 왕가의 본향이니, 나 역시 특별히 여깁니다. 전주 관민의 의견을 기탄없이 들어보고 싶습니다."

"왕실에서 전주를 특별히 여기시는 걸 어찌 모르겠습니까? 감읍할 따름입니다."

"조정의 선정으로 만백성이 칭송하니, 참으로 태평성대입니다."

이선은 슬슬 입에 바른 소리가 지겨워졌다.

"단순히 왕조의 본향이라서가 아닙니다. 전라도는 조선에서 가장 비옥한 농토를 보유하고 있으니, 조정에서 중시하는 곳입니다. 나는 바로 그 땅을 경작하는 농민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향회 의원들은 각 지역을 대표하는 분들이 아닙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전라북도 향회에는 각 군에서 선출된 의원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출신성분은 대개 지주였으므로, 농민의 입장과는 달랐다.

"조정이 선진 농법을 들여 생산량이 크게 증대됐고, 세금도 공정하게 걷히고 있습니다. 농민들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소작료도 조정의 방침대로 삼 분의 일만 걷는 경우가 많고, 오 할 이상은 절대 걷지 않습니다."

좋은 말의 향연이 쏟아지는 상황이니, 이선이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냥 넘어갈 상황이었다. 그때 말석에 앉아있던 단신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군 대감께 누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감히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관리와 향회 의원들의 눈길이 곱지 않다는 걸 느꼈다. 이선은 흥미를 느꼈다.

"그대는 누구요?"

"저는 고부군을 대표해서 온 전봉준(全琫準)이라고 합니다."

이선은 순간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곳에 있었단 말인가!'

가까이 다가가니, 사내는 비록 5척 단구로 체격은 작았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역사책의 사진 속에서 보던 그 사내로군.'

"아무래도 선생에게는 진정한 농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황공하옵니다. 삼가 말씀을 올리자면······."

이선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따로 독대하고 싶은데, 선생의 생각은 어떠신지?"

"실로 광영입니다."

관리와 의원들이 전봉준을 불편하게 여긴다는 걸 이선은 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전봉준은 전북 향회의 유일무이한 농민 대표였다.

연회가 끝난 후, 이선은 전봉준을 관사로 초청했다.

"연회장에서 선생이 말하면 불편해 할 이들이 많아 보여서 따로 모셨습니다."

"어찌 아셨습니까? 대감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보아하니 선생은 농민을 대표하는데, 저들은 모두 관리와 지주를 대표하니까."

"바로 보셨습니다. 과연 듣던 대로 완화군 대감의 총명은 놀랍습니다."

전봉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먼저 선생에 대해 알고 싶군요. 간단히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선은 전봉준에 관해 알고 있었지만, 바뀐 역사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다.

"예, 저는 본래 고부 사람으로, 고부 향교 장의(掌議)를 지낸 전창혁(全彰爀)의 아들입니다. 보시다시피 워낙 키가 작아서 별명이 녹두지요, 하하하."

전봉준은 호쾌하게 웃었다. 그는 가난한 몰락 양반 출신이었다. 자영농이지만 땅은 논밭 합쳐 세 마지기밖에 되지 않았고, 식구를 건사하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어릴 적부터 한학을 익힌 전봉준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편지를 대필하는 일로 생계를 꾸렸다. 대부분 농민의 삶은 비참했고, 전봉준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다.

전봉준의 나이 서른 살 무렵, 한양에서 경장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망이 있었던 그에게, 경장은 흥미로운 소식이었다.

얼마 후, 전봉준은 무작정 한양으로 상경하였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던 운현궁의 식객으로 지내며, 변화하는 조선 사회를 관찰했다.

'잠깐, 그러면 오다가다 지나쳐서 볼 수 있었겠군.'

"그때 완화군 대감을 몇 번 먼 발짝이나마 뵌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따로 말씀을 나누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그럼 진작 운현궁에서 말을 걸지 그랬습니까?"

"일개 식객에 불과한 제가, 어찌 감히 고귀한 분께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전봉준의 말은 도리상 맞았지만, 그래도 이선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한양에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내가 중하게 썼을 것 아닌가! 뭐, 지금이라도 만나게 됐으니 다행이지만.'

한양에서 변화한 시대를 체험한 전봉준은, 3년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부로 돌아온 전봉준은 예전의 전봉준이 아니었다.

"시대가 바뀌었소. 농민도 배워야 하오! 학교에 갑시다."

전봉준은 농민회를 조직해 적극적으로 농민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고부 농민의 대소사를 대리했고, 관과 농민을 잇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자연히 일부 관리와 지주들은 전봉준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러나 전봉준은 고부 안에서만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전봉준은 농촌 계몽운동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지주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고부를 대표하는 향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역사의 변화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삶도 바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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