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외교전
가장 먼저 조선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며, 청에 맞서 공동 투쟁에 나서자고 한 건 일본이었다.
"이는 명백한 천진 조약 위반입니다. 일본 정부는 청국 정부를 엄중히 규탄하며, 조선의 독립을 적극 지지하는 바입니다."
주조선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는 일본 정부의 훈령을 받아 조선 외무부를 찾았다.
"귀국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이선은 일본의 지지를 예상하였기에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일본이 '조선 독립'을 운운하는 건 신경에 거슬렸지만, 현재 상황을 고려해야 했다.
'일본 입장에선 기다리던 전쟁 명분이라 판단하겠지.'
"조선이 청국과 단교한 이상, 청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일본과 조선이 공동으로 청국에 맞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리하면 청국도 감히 조선의 독립을 침해하진 않을 겁니다."
일본 공사의 제안에 이선이 반문했다.
"공동 투쟁의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외교적 공조입니까?"
오토리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일본 정부는 동양 평화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지만, 유사시 청국의 전쟁 위협에 대비하여 일본과 조선이 연대해 공수동맹을 체결하는 게 어떤지 의사를 타진해 보고자 합니다."
공사는 일본이 먼저 동맹을 제안하면, 조선이 기뻐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선은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귀국 정부의 뜻입니까, 외무성과 군부의 뜻입니까? 주체를 확실히 했으면 좋겠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외무성과 군부는 정부와 뜻을 같이하지요."
오토리는 난감해했다. 하지만 이선은 바로 본질을 파고들었다.
"귀국 총리대신은 청국과의 전쟁을 원치 않는 거로 압니다. 귀국 정부의 의사가 통일되기 전에는, 동맹을 맺기 어렵습니다."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와 참모본부가 전쟁 여론을 주도했지만,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청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다.
이토는 직접 청과 조선의 관계를 '중재'하겠다고 나섰지만, 무쓰는 조선 공사관에 조선의 의사를 파악하라고 전했다.
조선의 여론이 강경론으로 치닫고, 청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하자, 무쓰는 공수동맹을 추진하라고 훈령을 내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본이 먼저 동맹을 제안한 이상, 정책이 바뀌진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는 단번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각의를 거치도록 하겠습니다. 답변을 기다려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양국 모두에 도움이 되는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이선이 일본의 적극적인 제안에도 유보 자세를 취한 건 다른 동맹을 타진하기 위함이었다.
'청나라와 일전까지 각오할 나라는 물론 일본이지. 하지만 일본은 믿을 수가 없어. 조선 입장에서 좀 더 신뢰가 가는 건…….'
이선이 접촉을 취한 건 노불 동맹, 즉 러시아-프랑스 동맹이었다.
1893년에 군사동맹으로까지 확대된 노불 동맹의 주적은 물론 독일이었다. 하지만 세계적 범위로 확대하면, 패권 경쟁의 대상은 영국이었다.
동아시아의 무역패권을 쥐고 있는 영국은 현상 유지를 원하겠지만, 노불 동맹은 현상을 깨길 원할 터였다.
'프랑스는 베트남, 러시아는 만주와 신강 문제를 놓고 청과 대립이 있지. 잘만하면 청에 맞서 공동투쟁을 이끌 수 있다.'
이선은 베베르 공사를 만나 러시아의 의견을 청취했다.
"러시아 정부는 청국의 무도한 행태를 강력히 규탄하며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바입니다."
"만약 청국이 무력으로 조선의 독립을 침해한다면, 러시아는 조선을 지원해줄 수 있겠습니까?"
"청국이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중재하고자 합니다."
"노불 동맹을 조선까지 확대할 수 있겠습니까? 청국에 맞서 러시아, 프랑스, 조선이 연대하는 것입니다."
이선은 러시아와 프랑스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설명했다. 베베르는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본국의 훈령을 요청하겠습니다."
며칠 후, 베베르는 청국 주재무관 콘스탄틴 보가크 중령과 함께 외무부를 찾았다. 보가크 중령은 동양 3국 주재무관을 겸하였으므로, 러시아 군부 내에서 가장 동양 군사 상황에 정통한 이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현재의 엄중한 상황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계십니다. 전쟁은 동양에 비극이 될 것이며, 오직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하길 원하십니다."
"나 역시 그 누구보다 평화를 원합니다. 하지만 청국이 중화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을 침공한다면, 조선 단독의 힘으로 억제하기가 힘듭니다. 조선이 청국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면, 러시아 입장에서도 바라는 바가 아닐 겁니다."
"청국의 상황을 보건대, 그들이 선제공격할 가능성은 적습니다. 북경 조정의 강경한 조선 토벌 주장에도, 북양대신 이홍장은 모호한 태도를 보입니다. 러시아 정부는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고자 합니다. 그러니 전쟁 염려는 마십시오."
보가크의 호언장담에 이선은 러시아가 유사시 군사적 개입을 할 의사가 없음을 짐작했다.
주러시아 공사관에서 상황을 짐작할만한 비밀 전문을 보내왔다.
- 근래,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건강이 크게 악화하였다는 정보가 있음. 러시아는 결코 청이 조선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지만,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으려 함. 특히 외무대신 기르스가 전쟁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음.
-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는, 러시아가 동양에서 전쟁에서 휘말리길 원치 않아 함.
- 러시아의 숙적인 영국은, 러시아가 무력으로 동양 문제에 개입하는 걸 원치 않음.
이선은 전문을 받고 상황을 파악했다.
'알렉산드르 3세의 병세가 악화했군. 실제 역사에서도 1894년 말에 죽던가? 전제군주국인 러시아의 특성상, 황제의 병세가 위태로운 상황에 군사 분쟁은 피하고 싶겠지.'
조선을 도와 전쟁을 준비하자는 군부와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는 외무부가 대립했다.
알렉산드르 3세는 현실적인 인물이었고, 북만주를 원하는 러시아 군부 일각의 강경론을 물리쳤다. 만주 점유는 영국을 자극하리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차르는 주청 공사 카시니에게 이홍장과 접촉해 평화를 중재하라고 훈령을 내렸다.
'역시 또 영국이 문제인가. 영국이 현상 유지를 원한다면, 차라리 아예 청나라를 주저앉히면 또 모르겠는데…….'
이선은 내각에 상황을 보고하고 정보를 계속 수집했다.
조선이 외교 관계를 단절하자 북경 조정은 격분했다. 원인 제공은 자신들이 했다는 걸 전혀 모르는 태도였다.
"조선이 마침내 반역의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사대의 의리를 저버린 조선을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제후국의 무례를 더 이상 용인할 수가 없습니다. 천조에 반역을 한 조선을 정벌해야 합니다!"
"북양대신 이홍장이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서 다행입니다. 북양함대와 회군에 명하여 조선을 정벌하라 명하소서!"
조정의 강경론과 달리, 이홍장은 여전히 평화적 해결책을 골몰했다.
"조선의 배후에 아라사와 일본이 있는데, 선제공격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먼저 저들의 상황을 탐지해야 한다."
이홍장은 러시아 공사 카시니가 평화를 중재하자 만족스러워했다. 이홍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러시아가 조선 편을 들어 군사개입을 하는 것이었는데, 그럴 가능성이 줄었다는 뜻이었다.
"귀국이 평화를 원한다는 건, 실로 바람직하외다. 우리의 요구는 간단하오. 조선이 제후국의 오랜 의리를 저버리지 말고, 중국에 계속 충성을 다하는 것. 이것만 지킨다면, 내정의 자주는 앞으로도 용인하겠소."
"조선 측 성명서를 보셨겠지만, 조선은 대신들의 즉각적인 석방, 청국의 사과와 배상을 원하고 있습니다."
"어찌 종주국이 제후국에 사과를 할 수 있단 말이오? 조선이 먼저 굽힌다면, 김옥균과 홍영식은 석방하겠소. 죽은 병사의 유가족들에게도 적당한 보상을 하리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되오."
이홍장은 먼저 굽힐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조선을 낮추어 보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랬다가는 북경에서 난리가 날 터였다.
러시아의 중재안을 받아든 조선 정부는 격분했다.
"조선이 먼저 굽히라니? 계속 충성하라고?"
"청국은 대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이왕 외교 관계를 단절한 김에 전 세계로 독립을 선포하고 일전을 각오합시다!"
"진정하시지요. 이는 형식의 문제가 아닙니까? 조선이 먼저 굽히는 시늉만 한다면 청국도 충분히 양보할 것이고, 전쟁은 피할 수 있는……."
법무대신 김윤식의 온건론에 강경론을 선도하는 내무대신 서리 박영효가 격분하여 외쳤다.
"귀공은 대체 조선의 신하입니까, 청국의 신하입니까? 그리 청국이 좋으시다면, 북경으로 가서 관직을 청하시지요!"
"뭐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게요! 나는 조선의 신하이지, 어찌 청국의 신하겠소? 당장 사과하시오!"
김윤식이 노여움을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박영효는 물러서지 않았다.
"청국은 완화군 대감을 납치하여 정부를 뒤엎으려 했고, 홍영식 대감과 김옥균 대감을 납치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어찌 굽힐 수가 있단 말입니까!"
여론은 이미 강경론이 지배했다. 각의도 강경론으로 치달았다.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등 강경파들은 이선을 찾아와 권했다.
"러시아는 청국과 전쟁까지 벌일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사시 조선을 도와줄 수 있는 나라는 일본뿐입니다."
"일본이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동맹을 받아들이시지요."
"경들은 일본의 신의를 믿을 수 있습니까?"
이들은 일본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이선의 주장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일본이 가장 신뢰가 가는 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조선 독립을 위해 같이 청국과 싸울 용의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건 외교적 수사지요. 저들은 단지 청국을 거꾸러트리기 위해, 조선을 이용하려고 할 뿐입니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이해관계는 일치하지 않습니까. 늘 냉철하신 군 대감께서 어찌 일본에만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역사를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 비극은 청일전쟁부터 시작된 것이고.'
역사가 많이 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선은 일본의 침략성을 여전히 의심했다.
'이유를 막론하고, 1894년에 청국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의지는 확고하지 않은가? 일본은 청국을 무찌르면, 결코 거기서 만족하고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 국가 일본의 칼날이 어디로 향한단 말인가?'
비록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정한론자들이 실각하긴 했다지만, 일본 정계의 주류는 대외팽창론이었다. 여기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 단지 팽창의 방향을 놓고 의견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다만 그 칼날을, 조선과 만주가 아니라 대만과 남양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일본과는 이해관계를 같이할 수 있었다. 때로 외교에는 신뢰 관계보다 이해관계가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고전적 동맹관이 일본에도 적용될 수 있었다.
이선은 즉시 주일본 공사관에 비밀 전문을 보냈다. 이때 주일본 공사는 김가진(金嘉鎭)이었다.
김가진은 개화파이자 일본통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무엇보다 조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애국자였다. 이선은 김가진을 신뢰하였고,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김가진은 즉시 일본 외무성을 찾았다.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가 즉시 맞이했다.
"공사께서 먼저 외무성을 찾아왔다는 건 우리 측 제안에 대한 답변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조선 정부는, 유사시 청국에 맞서 일본국과 공수동맹을 체결할 용의가 있습니다."
"반가운 말씀입니다. 그럼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해 볼까요?"
"다만,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외무대신께서 직접 조선으로 오셔서 아국 외무대신과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하였으면 합니다."
"완화군과 직접 말입니까?"
무쓰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사항은 직접 논의하는 게 낫겠지요. 좋습니다. 총리께 허가를 받는 대로 즉시 가도록 하지요."
무쓰는 참모차장 가와카미를 대동하고 총리관저를 찾았다. 무쓰의 설명을 들은 이토는 좌불안석이었다.
"청국과 전쟁을 꼭 해야 하나?"
"그럼 청국이 조선을 지배하는 걸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그런 상황은 러시아가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걸세."
"그럼 조선을 계속 러시아의 영향권 하에 두시렵니까? 조선과 동맹을 맺고 함께 청국을 무찌른다면, 우리를 대신하여 대륙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장기말이 되어줄 겁니다."
이토는 솔깃해하면서도, 여전히 걱정이 있었다.
"청국을 이길 수는 있나? 북양함대는 동양 최강이고, 청국은 엄청난 인구와 영토를 자랑하는 대국일세."
"참모본부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가와카미는 참모본부의 '청국 정토 계획안'을 이토에게 설명했다.
"…… 참모본부의 계획은 이와 같습니다. 개전 6개월 이내로 청국을 굴복시키겠습니다."
"흠. 다만 서양 열강의 동태가 문제인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청국을 편들어 군사 개입할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습니다. 오히려 청국이 패배하면 그 잔해를 물어뜯을 계산을 할 겁니다."
이토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좋소. 외무대신과 참모차장, 경들이 즉시 조선으로 가시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겠지."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