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184화 (184/812)

184화 국민전쟁

개전 이후 보급은 전쟁의 관건이 되었다.

방어자인 조선은 보급과 수송에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었다.

이선은 군무대신으로서 전시 군정(軍政)을 총괄했지만, 갈수록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3여단을 신속히 한성으로 올리라고 하지 않았나? 왜 이리 진격 속도가 느린가?"

"그, 그게……. 경부 철도가 완공되지 않았고, 덩달아 열차 배치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병사들 대부분은 철길을 따라 도보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문서상으로는 경부선이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거의 완공되었지만, 실제 운행을 시행하자 허점을 보였다. 제대로 운행되는 구간이 드물었다.

그나마 전선으로 향하는 경의선은 상황이 좀 나았다. 한양-평양 철도는 일부 터널과 철교를 제외하고 정상 운행 중이었다.

'이상하네. 전쟁 계획은 분명히 독일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 프로이센의 선례를 따르고 있는데. 왜 계획대로 안 되는 거지?'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받으며 고심하던 이선은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조선은 프로이센이 아니지. 지난 200년간 전쟁을 밥 먹듯이 했던 나라의 사례를 그대로 접목한다고 제대로 굴러갈 리가 있나…….'

단순히 철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전역이 전반적으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조선은 지난 250년간 전쟁이라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일부 지역에 국한한 국지전으로 끝났다. 조선이 국가적 차원에서 대규모 전쟁을 치르는 건 병자호란 이후 처음이었다. 장기 평화에 익숙해져 있던 조선 관료와 군인,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시작된 총력전에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조선군 최고 지휘부도 근대전에 익숙한 이들이 아니었다. 장성 계급을 달고 있는 이들은 정치적 이유로 장성이 되었거나 옛 무과시험 급제자인 이들이었다. 단적으로 군무대신을 역임하고 원수부 군무국장으로 있던 윤웅렬이 급히 1사단장으로 임명된 것도, 1만 이상의 군대를 지휘해 본 사람이 극히 드물었던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전쟁은 사람이 하는 거지.'

외관상으로는 서양식 군제와 신무기에 10만 대군까지 확보했지만, 이를 운용해야 할 이들이 근대전에 무지했다.

1884년 이후 신식 군사교육을 받고 무관학교를 졸업, 임관한 장교들은 아직 위관에서 영관급에 불과했다. 조선군의 중추는 사실상 2~30대 청년 장교들이었고, 이들에게 작전 수행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 그나마 다행인 건 청군은 더 전근대적 군대라는데 있나…….'

조선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게도 각지의 정보를 통해 전해 듣는 청군의 상황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조선군이 우왕좌왕이라면 청군은 지리멸렬이었다. 최소한 전략적 목표가 확실하고 지휘권이 일원화되어 있는 조선군과 달리, 청군은 이도 저도 아니었던 것이었다.

방어자인 조선과 달리, 공격자인 청군의 보급은 더 열악했다. 애초에 청군은 보급을 중시하는 군대도 아니었고, 현지 징발에 의존하는 처지였다.

청국은 애초에 다음과 같은 대의명분을 내걸었다.

"대청은 조선과 조선 백성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조선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정을 농단하여 왜적과 한패가 된 간신과 역적들을 토벌하기 위함이다. 역적들의 손아귀에 놓여있는 조선 국왕도 대청 황제 폐하의 원조와 해방을 기다리고 있다."

"중국과 조선은 본래 한집안이나 다름없다.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 조선 백성들이여, 천병과 함께 역적과 왜적을 타도하자!"

하지만 이런 선동은 조선 백성들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청군은 전근대적 중화사상과 근왕 의식을 명분으로 내걸었는데, 개화파 정부에 극도로 부정적인 위정척사파 사대부들조차 '오랑캐' 청국과 손을 잡길 원하는 이들이 없었다.

특히 주전장이 된 평안도 일대는 칙사 접대의 비용을 전담하는 등 예로부터 반청 감정이 강했고, 사대부 계층이 드문 지방이었다.

개화 이후에는 유학보다 실용 학문이 주를 이뤘고 서북 사람들을 차별하던 옛 조정과 달리 개화파 정부는 능력에 따라 중용했다. 그렇기에 평안도 주민들은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다.

"만청 오랑캐를 무찌르자! 병자년의 치욕을 씻자!"

개전 이전부터 평안도 사람들의 입대 비율은 높았고, 전쟁이 시작되자 더욱 강해졌다.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자발적으로 의용군에 입대하여 청군에 맞서 싸우는 이들도 많았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회피하고 중립을 지킬지언정, 최소한 청군에 협력하겠다는 의사는 없었다.

조선군의 청야 작전으로 만주군이 행군하는 의주 가도상의 마을은 모두 소개(疏開)되었고, 주민들은 모두 피난을 해서 텅 비어 있었다. 식량이나 각종 보급품도 대부분 사라진 뒤였다.

어떻게 식량을 확보해도 운반할 인부가 없었다. 돈을 주겠다고 해도 모여드는 이가 없었다. 결국 보급은 병사들이 알아서 하는 형태가 되고야 말았다.

그나마도 조선군의 유격전으로 방해를 받자 만주군 지휘부는 식량의 해로 수송을 요청했다.

"황해 일대에서 일본 해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현시점에서 수송선을 운용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평양에서 회군과 합류하여 보급을 받을 것."

서전의 해전에서 패배한 이후 북양함대는 더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진남포로 향하는 회군의 수송은 북양함대가 호위하고 있지만, 그 외에는 알아서 하라는 태도였다.

청군 내부의 고질적인 지역감정도 발목을 잡았다. 회군 지휘부는 이홍장과 동향인 안휘 출신들이었다. 하지만 만주군 지휘부는 대부분 산동 출신이었다. 안휘 출신과 산동 출신은 노골적으로 대립했다.

만주군 내부에서도 산동 출신인 봉천군 사령관 좌보귀와 안휘 출신인 성자군 사령관 위여귀의 대립이 극심했다.

"대체 이 전쟁을 어떻게 수행하라는 거요? 평양에 가면 답이 있긴 한 거요?"

"중당께서 섭지초 장군과 정여창 제독의 명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오! 우리는 그저 명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요!"

결국, 만주군은 보급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 전쟁은 쌀과 소금으로 버틴다. 평양만 도달하면 충분히 급양할 수 있으므로 그때까지 참고 견뎌내라."

병사들은 불평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약탈하고 싶어도 약탈할 대상이 없었다.

청천강 너머 안주에는 조선군의 방위부대가 있었지만, 청군은 안주 공격을 포기하고 우회하여 평양으로 진격했다. 그저 평양만 도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고 진격을 이어나갔다.

"진남포가 보입니다."

북양함대에는 운이 좋게도, 일본 연합함대는 진남포가 아니라 다른 곳을 항행하는 중이었다. 조속한 함대 결전을 원하는 연합함대는 여순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길이 엇갈렸다.

"좋다, 포격 개시!"

진남포에 도달한 북양함대는 전함 정원과 진원을 내세워 해안을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강화나 인천과 달리 진남포의 해안 방위는 단단하지 않았다. 조선군 수비대는 한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방어를 포기하여 평양 방양으로 퇴각했다.

진남포 점령이라는 1차 목표를 달성한 이후 북양함대는 곧바로 압록강 하구 안동 방향으로 향했다. 만주군에서 수차례 보급 문제를 애원했기에 결국 북양함대는 만주의 보급품을 해로로 전달하기로 결정하고 안동으로 향했다.

섭지초가 이끄는 회군 1만 2000명은 손쉽게 진남포에 상륙하여 점령했다. 서전에서 쉬운 승리를 거두자, 섭지초의 자만심이 상승했다.

"역시 조선놈들은 겉만 그럴싸한 허수아비 군대였군. 이대로 단숨에 평양까지 진격한다."

진남포를 점령한 회군은, 대동강을 따라 전략목표인 평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게 지옥으로 들어가는 길이 되리라고는 그때만 해도 청군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평안남도 평양.

조선 제2의 도시인 평양은, 이번 전쟁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로 떠올랐다.

대동강 서쪽에 있는 평양은 당시 조선에서 드물게도 시내 전체를 두꺼운 성곽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내성과 외성으로 나뉜 이중 방어 형태의 성곽을 넘어야만 평양 시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평양성의 동쪽은 대동강으로 연결되어 있어 조선군은 부교를 설치하여 서안과 연결했다.

조선군은 전쟁 이전부터 독일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 평양성을 근대적 요새로 탈바꿈했다. 요소마다 보루가 건설되고, 야포와 기관총을 설치했다. 평양은 전반적으로 평야 지대였지만, 성 남서쪽의 고지대인 안산(安山)은 보루와 참호가 건설되어 평양 방위를 외곽에서 지원했다.

평양에 주둔하는 조선군 4연대는 9월 이후 한 달 내내 요새화에 공을 들였다.

10월 중순이 되자 평양은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요새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만청 오랑캐 놈들, 어디 덤벼보라."

진위 4연대 참모장교 홍범도 정위는 망원경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지난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평양 방위의 책임을 맡았던 4여단장 김유현(金有鉉) 정령, 4연대장 구연항(具然恒) 부령, 연대 참모장 정관조(鄭觀朝) 참령, 1대대장 고청룡(高靑龍) 참령, 2대대장 이응조(李膺祖) 참령, 3대대장 조병완(曺秉完) 참령, 참모장교 주시준(周時駿) 정위, 홍범도 정위는 임박한 전투에 대비해 작전 계획에 골몰했다. 이들은 4연대에 오래 복무하여 평양에 관해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각지에서 지원병력이 평양에 도달했다. 평양 방위의 전권을 받은 1사단장 윤웅렬 부장이 지원병력을 이끌고 평양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황해도의 12연대가 평양에 도착했고, 강원도의 11연대가 수송 열차를 타고 평양 외곽에 도달했다. 이들은 대동강에 가설된 부교를 넘어 평양성에 입성했다.

함경도의 5여단은 함흥에서 육로로 평양으로 행군하는 중이었다. 이들은 청군의 측면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지원군이 계속 도달하는 상황에서, 조선군 최고 정예가 평양에 도달했다.

바로 근위사단이었다. 근위사단의 4개연대 중 3개연대가 평양 방위에 합류한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장군."

"근위사단이 직접 오다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근위사단 참모장 한규설(韓圭卨) 참장이 평양에 도착하자 윤웅렬이 휘하 장교들을 대동하고 직접 맞이했다.

"그런데 근위사단은 수도 방위의 책무를 맡고 있지 않았습니까? 전략의 변화가 있었나 보군요."

군복 차림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군이 한성 공격을 포기한 듯합니다. 회군이 진남포에 상륙하고, 북양함대도 돌아간걸 보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군 최고의 정예인 근위사단을 그냥 놀릴 수는 없지요."

육군 부장의 제복을 입은 청년은 바로 이선이었다.

"와, 완화군 대감!"

"군무대신 각하께서 평양에는 어인 일로……."

"근위사단이 평양으로 오는데 사단장인 내가 오지 않으면 말이 되겠습니까?"

이선은 근위대와 친위대가 창설된 시점부터 명목상의 지휘관을 겸임했는데 신설된 근위사단장의 지위도 이어받았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휘는 참모장인 한규설이 했기에 근위사단을 전선으로 움직여도 이선이 직접 전장에 나타나리란 예측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평양에서 격전을 앞두고 있는데 왕족 중 최소한 한 사람은 전선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선의 말에 장교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군무대신 각하의 솔선수범에 경의를 표합니다."

"각하께서 와주신 것만으로, 병사의 사기가 오르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각하께서 평양으로 오셨으니 군무부의 업무는……."

윤웅렬의 우려에 이선이 빙긋 웃었다.

"군정은 군무부에, 군령은 원수부에 맡겼습니다. 내각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으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내가 한양에 있다고 해서 행정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평양에 있으면서 전시행정을 지휘하고, 함께 싸운다는 상징성을 보이는 게 낫다.'

양군의 주전력이 평양으로 집중되고 평양에서 전장이 형성될 것이 거의 확실시되자 이선은 가만히 한양에 앉아 있을 수만 없었다.

박영효를 군무협판으로 임명하고 자신이 맡고 있던 군정의 전권을 부여했다.

"나는 근위사단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병사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고자 합니다. 후방의 일을 잘 부탁합니다."

"가, 각하! 각하께서 평양으로 가셨다가,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내각, 군무부, 원수부 가리지 않고 이선의 평양행을 말렸다. 하지만 이선의 결심은 굳건했다.

"왕족 중 최소한 한 사람은 전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군대와 백성들에 대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럼 적당한 왕족을 물색해서 보내지요."

이선은 단순한 왕족이 아니라 개혁과 군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이선보다 적당한 왕족은 없었다.

"아닙니다. 내가 군대 지휘에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적어도 평양의 방위에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과연 이선이 평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이르자, 군의 사기가 드높아졌다.

"완화군께서 근위사단을 이끌고 평양으로 오셔서 함께 싸운다!"

"오오! 완화군이 직접 오시다니……."

"왕실에서도 군대와 함께 생사를 함께할 생각이로군."

"그렇다면 더욱 이길 수밖에 없네. 완화군 대감의 높은 뜻을 받들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오랑캐들을 무찔러 성은에 보답하세!"

전투 전부터 지리멸렬한 행보를 보이는 청군과 달리, 조선은 왕족부터 일개 병졸에 이르기까지 아니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전의를 보였다.

청군에는 그저 외부 원정에 불과했지만, 조선에는 전국민적인 국민 전쟁(國民戰爭)이 막이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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